라틴은 행복이다
고정석 지음 / 바람구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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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라디오 <성기완의 세계 음악 기행>. 이 프로를 통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나라의 음악을 듣고 그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을 상상하곤 한다. 

매일 흥미로운 게스트 코너가 이어지는데, 화요일은 '길 위에서 듣는 음악'이다. 이 코너는 고정 게스트가 아니라 특별손님들이 초대된다. 주로 낯선 나라들을 장기간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  

지난 주 초대 손님은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고 돌아온 고정석. 회사에서 간간히 짬을 내서 듣는지라 집중력은 떨어지지만, 잉까, 안데스, 멕시코, 페루, 콘도르... 이런 단어들만 들어도 마음이 설렌다. 

고.정.석.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이름을 써넣고 검색 버튼을 누른다. 책 코너에 <라틴은 행복이다>, 저자 고정석이라는 정보가 뜬다. OK! 

1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를 꿈꾼 사나이. 라틴아메리카로 떠나기 위해 1년간 스페인어를 배우고, 스쿠버 다이빙과 승마, 라틴아메리카의 고대 문명과 근현대사에 관한 책까지 꾸준히 읽었단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멕시코부터 아르헨티나까지 8개월간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다녀왔다는 정보 만으로도 내 마음은 사로잡히고 만다. 이런 사람의 여행기라면 굳이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기대.

책은 사진과 에세이가 보기 좋게 편집되어 있다. 원색적이고 이국적인 풍물사진들, 거기에 덧붙여진 다소 잔잔한 여행기.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글의 느낌은 차분함이다. 글을 통해 고정석이라는 사람의 일면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는 무척이나 차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각 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혹은 사색적인 여행기라기보다 관찰자적인 여행기라는 편이 적절할 듯하다. 여행지에서 만난 현지인들(주로 숙소의 주인들)이나 여행자들의 이야기도 간간히 이어지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콜롬비아와 페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스페인어 배우기에 좋고, 물가도 싸고, 시간이 멈춘 듯 여유로운 나라가 콜롬비아라는 것과 세계적인 문화유적들 때문에 얻게 된 명성에 비해 외국인 여행객들을 돈줄로만 여긴다는 페루. 어디까지나 고정석의 경험적 시각일테지만 지식창고에 넣어둔다. 아쉬움이라면 나의 관심사인 아르헨티나 이야기는 거의 없다는 사실.  

어쨌거나 여행기를 읽고 나면 누군가의 발걸음을 따라 나 역시 여행을 마친 기분이 든다. 그 때문인지 책을 읽고 나면 여행을 다녀온 듯 마음이 가뿐하다. 한동안 일상이 견딜만 해지는 것이다. 여행기를 읽는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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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나기를 위한 시원한 책읽기!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1
김남희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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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뜨거운 햇볕으로 대지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나무와 들풀들이 한껏 푸르러지는 본격적인 여름. 풍덩 빠져들고 싶을만큼 새파란 하늘에 두둥실 흰구름이 피어오르면 나도 모르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사람이란 모두 어슷비슷한 겐지 오랜만에 반디앤루니스에 들렀더니 여행기 코너가 평소와 달리 북적댄다. 세계 각지의 여행 안내서부터 여행하면서 겪은 경험담을 엮은 여행기까지 여름은 바캉스의 계절이 아니라 여행기의 계절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출판된지 한참되었지만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로 여전히 잘 팔리는 여행기부터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갓출간된 신간까지 눈길을 끌어 당긴다. 여비나 시간이 없어 떠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여행기를 읽으면서 그 아쉬움을 달래보는 것도 한 방법일 듯하다. 서가의 한자리를 차지할만큼 우리나라에도 꽤 많은 여행기들이 출판되어 있다. 

몇 년 전 한비야 시리즈를 읽으면서 한껏 고무되었던 뒤로는 한동안 특별히 여행기를 읽은 기억은 없다. 그러다가 작년 늦여름부터 우연찮은 계기로 여행기를 몇 권 읽었고 여행을 테마로 한 컴필레이션 음반 몇 장을 듣기도 했다. 여행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여행기나 음악을 통해서도 감정이 한껏 고양된다는 사실을 그 시간을 통해 깨달았다. 올 여름 또다시 여행기에 눈길이 가는 것은 지난 여름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일상에 찌든 심신을 잠시나마 달래 주었던 고마운 순간들 말이다. 
 
지리산을 꿈꾸게 해준 유성용의 <여행 생활자>, 언제부터인가 왠지 모를 거리감이 생겨버린 김영하의 <김영하의 여행자> 등 신간들을 일별하고 작가들의 신작 산문집까지 드르륵 넘겨보고 난 뒤에 서점을 나왔다. 인터넷 서점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서점에서 책을 사는 일은 드물어졌다. 

서점에서 둘러보고 찍어둔 책들은 아직 구입하지 못했다. 대신 일전에 한비야와 함께 비교 소개된 도보여행가 김남희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라기에 마음이 끌렸으리라. 

<걷기 여행 1>에는 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29일간의 국토 종단기와 숨어 있는 흙길 열 곳을 다녀온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국토 종단기는 일기장을 보는 듯 정제되지 않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진솔하고 생생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고, 뒤에 실린 흙길 열 곳에 관한 도보기행은 차분한 여행기와 친절한 안내서가 짜임새 있게 엮여 있다.  

국토 종단기가 풋풋한 느낌이라면 흙길 여행기들은 어쩐지 추억을 더듬는 듯한 아스라함이 느껴진다. 국토 종단기를 읽을 때는 풋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는데 흙길 이야기를 읽을 때는 코끝이 찡해질만큼 왠지 모를 아련함이 느껴졌다. 국토 종단은 어렵겠지만 흙길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내어 가볼만 하겠다. 정찬의 소설집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신비롭게 다가오기도 했던 영월 동강의 어라연과 월정사만 들렀다 서둘러 돌아왔던 오대산의 상원사를 찍어 둔다. 

사진 보는 재미도 있고, 현지 주민들이 들려준 이야기들도 흥미롭지만 중간중간 그리고 글꼭지마다 앞 쪽에 인용된 시나 글을 읽는 맛도 쏠쏠하다. 국토 종단기 부분에 인용된 한광구의 <꿈꾸는 식물>을 읽다가 숨이 멎는 순간에 맞닥드리기도 했다. 꿈이 마르는 나이라니 대체 꿈이 마르는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던 길을 멈추고 길바닥에 앉아 엉엉 울었다는 김남희처럼. 

비 오시는 소리 들린다.
꿈이 마르는 나이라서 잠귀도 엷어진다.
아, 푸욱 잠들고 싶다.
한 사나흘 푸욱 젖어 살고 싶다.
 

꿈이 마르기 전에 잠귀가 엷어지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할 것인가. 좋은 여행기들은 자꾸 자기를 돌아보게 만든다. 잘 살고 있느냐고. 잘 살아 가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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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생이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모양이다. 나에게도 자전거란 물건이 생겼다. 우연찮게 중고자전거가 한 대가 굴러 들어온 것이다. 이름 하여 "탱고".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자전거와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김중혁의 소설 <펭귄 뉴스>, 한겨레신문에 실린 소설가 김연수의 '자전거 도둑', 그리고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읽은 게 지난 여름이었다. 한 권의 책, 한 꼭지의 글이 갖는 힘이란 게 이런 걸까. 나와 자전거의 인연은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가을부터 틈나는 대로 찾아갔던 여의도공원 시절을 마감하고, 탱고와 함께 홍제천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난 주말 탐색전을 마치고, 이번 주말부터 본격적인 홍제천-한강 달리기가 시작됐다. 이번주는 일단 상암 월드컵경기장에 있는 상암CGV 접수가 목표.

가끔 조조영화를 보러 다니던 곳이라 목표설정이 쉬웠다. 지하철의 침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오~ 그라시아스 탱고!'. 재일조선인 학교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를 낙점하고 상암으로 달렸다. 상암경기장의 돔이 눈에 들어올 즈음 쌩하니 앞질러가던 자전거가 힘좋게 오르막을 통과했다. 질세라 기어까지 풀고 애를 써봤지만 역시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자전거 보관소에 탱고를 맡겨놓고 극장으로 들어서려는데 앞질러 갔던 파마머리 언니가 바로 코 앞에서 주차 중이었다. 표를 끊고 돌아서려는데, 파마머리 언니도 "<우리 학교> 1장이요", 한다. 한달음에 호감도 100% 충전. 순간 어설픈 동질감까지 느껴졌다. 혼자 자전거를 달려 조조영화를, 그것도 같은 영화를 앞 뒤로 앉아 보는 인연이라니.

김동원 감독에 버금가는 따뜻함을 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와, 기분 좋게 다음 스케쥴을 향해 달리는데, 뭔가가 '쿵' 하고 뒷바퀴를 찍었다. 순간 자전거가 넘어지고 무릎이 꺾이기는 했지만 무사히 착지. 일어서서 자전거를 움직이려는데 직직 타이어 끌리는 소리만 날뿐 구르지를 않았다. 에고고 뒷바퀴가 완전히 아작 났다. 

초등학교 고학년정도로 보이는 사내 아이까지 뒤에 태운 아저씨가 하필 뒷바퀴 중앙을 들이 박은 것이었다. 브레이크를 못 잡았다나. 아 이를 어째. 구르지도 않는 자전거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어찌어찌 상암경기장으로 다시 돌아가 근처 자전거 대여점에서 림이라는 타이어 안쪽 부품을 교체하는데 그만 1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일정이 완전히 꼬여버린 것이다. 뒤에서 자전거 들어주고 수리비까지 낸데다 "저 때문에 늦어져서 죄송합니다",하는데 어쩌겠는가. 사노라면~ 할 수 밖에. 

미리 세워둔 일정을 포기하고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팔 다리가 뻐근하고 몸이 축축한 게 느껴졌다. 역시 인생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굴러가는 게 또 인생이다. 자전거 바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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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_행복한 오기사의 스페인 체류기>, 오영욱, 예담

2. <원더랜드 여행기_Izaka의 쿠바 자전거 일주>, 이창수, 시공사

3.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홍은택, 한겨레출판

4. <안녕 뉴욕_영화와 함께 한 뉴욕에서의 408일>, 백은하, 씨네21

5. <박훈규 언더그라운드 여행기_젊은 예술가의 세계기행 2>, 박훈규, 안그라픽스 

한비야의 여행기들 이후 오랜만에 짜릿했던 여행기들. 저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모처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현실을 훌훌 벗어 던지고 낯선 곳을 향해 떠날 수 있는 용기. 그건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마음에 품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용기 있는 자만이 세상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낯선 곳에 또다른 세상이 있음을 그들은 보여준다. 

여행기는 용기 있는 자들이 용기가 부족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일지도 모른다. 삶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그들의 편지를 읽다보면 어느새 다른 세상의 존재, 다른 삶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다. 이것이 여행기의 매력일 터.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일상의 무게가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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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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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다닐 무렵이었을 것이다. 일본식 주택에 산 적이 있다. 그 집 앞으로 대성각이었던가 대흥각이었던가 '閣'자로 끝나는 큰 기와집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살았던 집은 바로 건너편에 있던 그 '큰집'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80년대 중반은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이 한참 입에 오르내리던 때였다. 어쩌면 그 일본식 주택은 한때 일본인 현지처가 살았던 집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관광버스가 그 '큰집' 앞을 더러 점령하곤 했다. 관광버스가 실어나르는 손님들은 대부분 일본인이라고 했다. 그 큰집의 실체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나의 호기심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집에 누가 사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높다란 담장과 대문이 그 집을 빙둘러 에워싸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은 언제나 꽁꽁 닫혀있었다. 비밀의 집이었던 것이다. 

이현수의 <신기생뎐>을 읽으면서 한때 내가 살았던 집이 일본식 주택이었다는 사실과 그 집 건너편에 요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얼마 전 우연히 그 곳을 지날 일이 있었는데, 큰 기와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곳의 '언니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옛부터 기생들을 노류장화(路柳墻花)라고 했다던가. 아무라도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밑의 꽃'. <신기생뎐>은 그런 기생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반 백년을 기방을 떠돌며 교잣상을 차려온 부엌어멈 타박네, 마지막 소리기생 오마담, 춤기생 미스민, 오마담의 기둥서방 김사장, 부용각의 유일한 남자 박기사, 서랍 많은 사람으로 통하는 춘자 하루코, 그리고 부용각. 이렇게 <신기생뎐>은 부용각을 중심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펼쳐 보인다. 

욕쟁이 할머니같은 타박네의 구수한 입담에 쿡쿡 웃다가도 갈피갈피 펼쳐지는 기생들의 신산한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콧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참빚과 사향주머니 하나 달랑 들고 여덟 살에 진주권번에 들어선 뒤 예순이 되도록 기방을 지키고(?) 있는 오마담. 네 번째도 또 '조개'냐며 한숨 짖던 아버지가 성의 없이 붙여준 나끝순이란 이름을 버리고 민예나라는 춤기생이 된 미스민. 어느 여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밥집을 찾아 나선 길에 그만 능소화에 이끌려 부용각으로 들어섰다가 오마담에게 넋을 빼았기고 자그마치 이 십년을 머물고 있는 박기사. 세 사람의 사연과 사랑 앞에선 할 말을 잃게 된다. 

'어찌어찌 길을 내어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터덜터덜...찾곤 했'던 팔십 고령의 교방 선생이 오마담에게 던지던 한마디 한마디는 어찌나 그 뜻이 깊고도 헤아리기 어려운지. 말도 삶을 닮아 구비구비다. 어느 날 찾아간 오마담이 목욕을 시키다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목욕탕 문 밖으로 목련이 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선생님, 꽃이...... 꽃이...... 져요."하고 감탄하자, 조용히 던진 선생의 한 말씀이 목련 꽃송이처럼 내 가슴에 툭하고 떨어졌다. 

 "육갑허네, 지지 않는 것은 꽃도 아니여. 질 줄 알아야 꽃인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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