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인생이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모양이다. 나에게도 자전거란 물건이 생겼다. 우연찮게 중고자전거가 한 대가 굴러 들어온 것이다. 이름 하여 "탱고".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자전거와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김중혁의 소설 <펭귄 뉴스>, 한겨레신문에 실린 소설가 김연수의 '자전거 도둑', 그리고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읽은 게 지난 여름이었다. 한 권의 책, 한 꼭지의 글이 갖는 힘이란 게 이런 걸까. 나와 자전거의 인연은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가을부터 틈나는 대로 찾아갔던 여의도공원 시절을 마감하고, 탱고와 함께 홍제천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난 주말 탐색전을 마치고, 이번 주말부터 본격적인 홍제천-한강 달리기가 시작됐다. 이번주는 일단 상암 월드컵경기장에 있는 상암CGV 접수가 목표.

가끔 조조영화를 보러 다니던 곳이라 목표설정이 쉬웠다. 지하철의 침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오~ 그라시아스 탱고!'. 재일조선인 학교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를 낙점하고 상암으로 달렸다. 상암경기장의 돔이 눈에 들어올 즈음 쌩하니 앞질러가던 자전거가 힘좋게 오르막을 통과했다. 질세라 기어까지 풀고 애를 써봤지만 역시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자전거 보관소에 탱고를 맡겨놓고 극장으로 들어서려는데 앞질러 갔던 파마머리 언니가 바로 코 앞에서 주차 중이었다. 표를 끊고 돌아서려는데, 파마머리 언니도 "<우리 학교> 1장이요", 한다. 한달음에 호감도 100% 충전. 순간 어설픈 동질감까지 느껴졌다. 혼자 자전거를 달려 조조영화를, 그것도 같은 영화를 앞 뒤로 앉아 보는 인연이라니.

김동원 감독에 버금가는 따뜻함을 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와, 기분 좋게 다음 스케쥴을 향해 달리는데, 뭔가가 '쿵' 하고 뒷바퀴를 찍었다. 순간 자전거가 넘어지고 무릎이 꺾이기는 했지만 무사히 착지. 일어서서 자전거를 움직이려는데 직직 타이어 끌리는 소리만 날뿐 구르지를 않았다. 에고고 뒷바퀴가 완전히 아작 났다. 

초등학교 고학년정도로 보이는 사내 아이까지 뒤에 태운 아저씨가 하필 뒷바퀴 중앙을 들이 박은 것이었다. 브레이크를 못 잡았다나. 아 이를 어째. 구르지도 않는 자전거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어찌어찌 상암경기장으로 다시 돌아가 근처 자전거 대여점에서 림이라는 타이어 안쪽 부품을 교체하는데 그만 1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일정이 완전히 꼬여버린 것이다. 뒤에서 자전거 들어주고 수리비까지 낸데다 "저 때문에 늦어져서 죄송합니다",하는데 어쩌겠는가. 사노라면~ 할 수 밖에. 

미리 세워둔 일정을 포기하고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팔 다리가 뻐근하고 몸이 축축한 게 느껴졌다. 역시 인생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굴러가는 게 또 인생이다. 자전거 바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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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_행복한 오기사의 스페인 체류기>, 오영욱, 예담

2. <원더랜드 여행기_Izaka의 쿠바 자전거 일주>, 이창수, 시공사

3.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홍은택, 한겨레출판

4. <안녕 뉴욕_영화와 함께 한 뉴욕에서의 408일>, 백은하, 씨네21

5. <박훈규 언더그라운드 여행기_젊은 예술가의 세계기행 2>, 박훈규, 안그라픽스 

한비야의 여행기들 이후 오랜만에 짜릿했던 여행기들. 저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모처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현실을 훌훌 벗어 던지고 낯선 곳을 향해 떠날 수 있는 용기. 그건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마음에 품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용기 있는 자만이 세상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낯선 곳에 또다른 세상이 있음을 그들은 보여준다. 

여행기는 용기 있는 자들이 용기가 부족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일지도 모른다. 삶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그들의 편지를 읽다보면 어느새 다른 세상의 존재, 다른 삶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다. 이것이 여행기의 매력일 터.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일상의 무게가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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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어떤 대상이 수시로 떠오르거나 보이는 현상. 이를 들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금 내 상태가 바로 들림의 상태이라 하겠다.  

지난 봄 식식거리며 내 곁을 스쳐지나는 자전거에 홀딱 반했다. 달리거나 보관되어 있는 자전거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으리라. 하지만 세상에 식지 않는 사랑이란 게 존재하던가! 자전거에 대한 관심도 그렇게 식어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자전거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전에는 세상에 자전거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는데, 관심을 갖고 보니 사방에 자전거다. 신문 잡지에는 자전거에 얽힌 사연이 간간히, 거리에는 원색의 화려한 '쫄쫄이'를 입고 자동차들 사이를 유유히 헤쳐 나가는 자전거족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하지만 짝사랑처럼 그저 멀리서 바라볼뿐 쉽게 다가갈 수는 없는 세계였다. 물론 거기에는 나의 의지나 용기가 부족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렀다. 짝사랑이란 으례 이런 것. 그러다가 최근 자전거로 떠난 여행기를 차례로 읽었다. 이창수의 <원더랜드 여행기>와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은 자전거에 관심이 생기던 무렵부터 점찍어 두었던 책이지만, <원더랜드 여행기>는 알라딘 검색창에 '자전거'를 입력해서 우연히 찾은 책이다. <원더랜드 여행기>의 원더랜드는 쿠바. 카스트로 정권이 무너진 뒤 달라질 쿠바를 그 전에 직접 체험하고 싶어 자전거로 체 게바라의 발자취를 따라 간 쿠바 여행기가 바로 <원더랜드 여행기>.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은 제목 그대로 미국을 자전거로 횡단한 홍은택 기자의 80일간의 여행기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자전거 여행의 묘미를 간접체험할 수 있었다. 두 저자가 두 발로 힘겹게 페달을 밟았다면, 나는 한장 한장 손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그 사이 한강변에서 실전 경험도 세 차례 가졌다. 이렇게 조금씩 자전거와 내가 연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힘! 

사소한 관심에서 출발한 자전거에 대한 사랑이 두 권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점점 현실화 되고 있는 듯하다. 요즘은 틈 나는대로 인터넷에 올라온 자전거의 구조에 관한 글을 찾아 읽고 있다. 알고 보니 <바이시클라이프>라는 자전거 관련 월간지도 있다. 그야말로 '웰컴 투 바이시클 월드, 웰컴 투 원더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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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은 시각, 회사에서 가끔 예상치 못한 간식이 제공된다. 그 때마다 저녁시간을 알차게 보내야한다는 강박같은 게 발동한다. 그럴 땐 주로 극장엘 간다.

올해 한국영상자료원의 프로그램이 작년보다 훨씬 풍성해졌다. 어제 간식 때문에 김수용 감독의 1964년작 <학생부부>를 봤다. 신성일, 엄앵란 커플이 주연을 맡아 당시에는 꽤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가난한 대학생 송기호(신성일)와 고아 출신 여대생 강문영(엄앵란)이 하숙비와 학비 때문에 어쩔수 없이 동거에 들어가고 송기호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여가수가 등장하면서 갈등이 생기지만 결국 갈등이 해소되면서 결혼에 이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하숙집 부부의 갈등도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제목이 알려주듯 신성일과 엄앵란의 영화다.

예전의 영화들을 보다보면 후시녹음 때문에 당시에는 심각했을 장면에서 웃음이 터지는 일이 종종 있다. 상황과 목소리를 일치시키려고 최대한 노력했겠지만 긴장감이 떨어지거나 하는 등의 장면과 목소리의 불일치 때문. 실제 배우가 아니라 성우가 녹음한 경우는 더욱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것도 옛 영화를 보는 재미라면 재미다. 이런 재미 외에도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풍경 1호는 1960년대의 '딴스홀'이다. 높은 무대가 있고 거기서 주로 관악기로 이루어진 밴드가 음악을 연주한다. 무대 앞의 넓은 홀에서 젊은이들이 음악에 맞춰 흥겹게 혹은 조금 밀착하여 춤을 춘다.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맥주나 양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무대 위의 '악사'나 가수를 구경한다. 나도 한때 맛보았던 나이트클럽의 풍경과 큰 차이는 없지만 춤과 음악 그리고 춤추는 사람들은 '딴스홀'과 '나이트클럽' 만큼의 거리가 있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풍경 2호는 '아파트'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아파트가 지어졌는지 하숙집 여주인이 친구를 찾아 나선 길에서 당시의 '아파트' 모습을 볼 수 있다(네이버 지식검색에 물어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1930년에 지어졌단다. 인터넷 만세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지어졌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당시 영화들에서 만날 수 있는 서울 거리 풍경들도 지금과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롭다.

한국영상자료원, 그 곳에 우리의 과거가 있다. 그래서 난 그 곳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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