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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기담 수집가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지음 / 프시케의숲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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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근 작가는 자신을 책방지기이자 이야기 수집가라 소개하고 있다. 2007년부터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꾸려오고 있단다. 주인장은 그곳에서 책과 사람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수집한다는데. 그가 수집한 기묘한 이야기 스물아홉 편이 《헌책방 기담 수집가》에 실려 있다. 작가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 재밌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는데, 어떤 이야기는 소설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책을 찾는 사연과 그 책을 찾아내는 과정이 궁금해서, 하나의 사연이 끝나면 또 다른 사연이 궁금해서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책을 찾아주는 과정을 통해 체득한 것일까. 작가는 말한다. 책과 사람 사이에는 운명이라고 부를 만한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것 같다고. 어느 순간 끊어져 버린 끈을 이어주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작가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을 할까 싶지만. 작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중한지 아는 것 같다. 덕분에 “사소하면서 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책에 얽힌 사연이라 쉽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작가에 따르면 그건 용기가, 그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망설이는 의뢰인들에게 작가는 물을 건네곤 하는데, 이 장면이 마치 의식처럼 다가왔다. 사연을 받아 적는 모습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수첩을 펼쳐 만년필로 적는 데서 작가가 의뢰인과 그의 사연을 대하는 마음이 읽혔던 것이다. 사연이 맘에 들고 안 들고 역시 작가는 크게 따지지 않았다.


“손님께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시는 것만 해도 큰 용기가 필요한 거니까요.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특별하죠.” 이런 태도가 손님의 마음은 물론 독자의 마음까지 활짝 열리게 하는 것 같다. 책의 끝자락에 이르면 작가가 헌책방 직원으로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 퇴근하고 다른 헌책방을 드나들었다고. 신촌의 ‘공씨책방’과 ‘숨어있는 책’ 단골이었다는데 이 대목에서 작가가 왜 절판된 책을 찾아주고 수수료 대신 사연을 받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나는 당시에도 사람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자서전, 평전, 일기 같은 책을 주로 숨책에서 샀다. 뿌리깊은나무출판사에서 펴낸 《숨어사는 외톨박이》와 《민중 자서전》 시리즈라면 보이는 족족 사 모았다.” 그러고 보니 《헌책방 기담 수집가》는 이들 시리즈와 닮은 것 같다.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작가가 ‘괴짜 보부상’이란 별명을 붙인 ‘거리의 책장수’ H씨가 내겐 아주 흥미로웠다. 그는 이 책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제주도 여행 후 그가 들려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완도까지 시내버스로 이동한 후 완도에서 배로 제주도까지 갔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작가는 생각한다. “이 사람, 제정신인가?” 그래서 뭣 하러 그런 고생을 했냐고 묻는다. 그랬더니 괴짜 보부상 H씨 왈.


“세상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 있지만요, 해보지 않으면 영 모르는 일도 있으니까요. 저는 거기서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제주도를 만나고 왔습니다. 사장님은 모르실 거예요.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말의 여운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진실은 소설보다 더 기묘하다. 왜냐하면 소설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그려야 하지만, 진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사, 마크 트웨인의 말인데, 이 책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이 책 뒤표지에 실린 장강명 작가의 추천사처럼, 나도 벌써 속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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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 - 당신의 몸과 마음이 아플 때,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것들
김준혁 지음 / 계단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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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는 의학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스무 명이 넘는 인물들이 현대 의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세심하게 짚어준다. 소독의 개념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견되었는지, 레지던트라는 의사 교육 과정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도입되었는지. 의과학에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에겐 이런 점에 먼저 관심이 가겠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의학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문제점을 짚고 질문을 던진다. 산욕열의 원인을 발견하고도 왜 환자들을 구하지 못했는지. 레지던트 제도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한정된 의료 자원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 등등. 제멜바이스와 할스테드, 밴팅의 사례를 읽으며 사적 감정으로 치부해왔던 의료 현장(병원)에서의 소통 문제나 남의 일로 여겨왔던 레지던트 제도의 문제점, 한정된 의료 자원의 분배 문제를 인지하게 되었다.

 

남자 의사와 여자 의사는 무엇이 다른지, 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성을 바꾸려는 시도는 정당한지, 강제 불임 시술에 우생학적 관점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저자는 사례를 통해 문제점을 짚고 질문을 던지는데, 사안에 대한 관찰이 얼마나 꼼꼼하고 문제의식은 또 얼마나 세밀한지 과학자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남자 의사와 여자 의사는 무엇이 다를까’라는 꼭지에서 던지는 질문만 해도 그렇다. “돌봄에 있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성격적 특질, 세심함, 부드러움, 예민함, 날카로움, 심미성, 심지어 공감 능력은 주로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왜 우리는 의사가 ‘남성’이어야 한다고 무심코 생각하는 걸까요?” 질문을 받고서야 그러게, 왜 그럴까 궁금해질 정도로 너무나 익숙해서 문제의식조차 가지지 못했던 것에 물음표를 던져보게 하는 책이었다.

 

‘의사는 왜 웃지 않을까’ 꼭지에서 윌리엄 오슬러의 연설을 소개하는데, 평소 냉담하다 여기던 의사들의 태도를 다소 이해하게 되었다. 오슬러는 1889년 연설에서 의료인에게 ‘평정’이 지니는 가치를 연설했단다. 환자와 거리를 둬 의료인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급박한 의료 현장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려면 고통을 마주했을 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실의에 빠진 환자에게 지지대 역할을 하기 위해 눈앞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이 책은, 의료정보의 소유권 문제, 직업병의 사회적 책임 문제, 감염병 환자의 사생활 보호 문제 등 다양한 이슈들을 담고 있다. 의료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들이어서 함께 읽고 토론하기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보면 좋을 영화나 문학 작품들을 소개한 점 역시 좋았다. 의학은 딱딱할 거라는 편견을 영화와 문학 작품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깨주었다. 덕분에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서사 의학’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덧) 개봉 때 기회를 놓치고 내내 아쉬워했던 영화 <패터슨>을 뒤늦게 집에서 봤다. 의사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에서 출발한 영화란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윌리엄스와 관련된 부분을 옮겨 두자.

 

“윌리엄스는 (…) 자신이 의사였기에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답합니다. 자신이 시로 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인데, 진료 과정의 만남이 자신을 일깨운다고 말합니다. 환자가 자신에게 단어를 부여하고, 여기에서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다는 감각. 철학에서는 이를 ‘촉발’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마주친 것이 나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그 변화는 나로 하여금 움직이게 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주위의 촉발에 반응하는 일입니다. 사실, 모든 예술이 그렇지요.”(76쪽)

 

“(…) 의료에는 깊은 소통의 단절이 있으며, 그것은 기술만으로 넘을 수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환자의 말에 집중하는 의료인과 의료인의 말에 반응하는 환자 그리고 두 사람이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을 서로 최대한 정확하게 이해할 소통 방법입니다. 윌리엄스에게 그것은 시 쓰기였습니다. 서사 의학은 소설(시, 논픽션 등의 글과, 영화나 미술 등의 예술 작품도 포함하여) 읽는 힘을 길러 이에 접근하려 합니다.”(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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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
하야시 노리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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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노리코가 쓴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는 포토 다큐멘터리다. 사실의 기록. 그러니까 저자가 ‘일본인 아내’라 명명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쓴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일본인 아내들을 몰랐다. 2000년대 초반 영화를 통해 재일조선인들의 존재를 발견했던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일본인 아내들을 발견한 셈이다.

“1959년 12월부터 1984년 7월까지 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 사람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주하는 귀국사업이 진행됐다. 주최는 북한과 일본적십자사. 이 사업으로 일본에서 바다를 건넌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은 약 9만 3,000명이다. 그중 일본인 아내와 그 자녀 등 일본 국적 소지자는 약 6,800명, 일본 국적 일본인 아내는 약 1,830명으로 알려졌다.”(37쪽)

9만 3,000명! 이 많은 사람이 북한으로 향했다니! 2천 명 가까운 일본 여성들이 남편을 따라 고향 땅을 떠났다니! 믿기지 않았다. 남한에서 태어나 50년 가까이 이 땅에서 사는 나로서는 솔직히 그들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시 일본에서 겪어야 했던 재일조선인의 차별이나 가난의 정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텐데, 일본과 북한의 관계 역시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당시 양국은 교류가 활발해 보였다. 그랬으니 일본인 아내들이 남편을 따라 이국땅으로 향한 것 아니겠는가. 실제로 일본인 아내들은 고향을 자주 왕래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저자에게 말했다.

그런데. 60년 동안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현재 북한에 사는 일본인 아내들은 여든이 훌쩍 넘은 고령. 한국전쟁으로 생긴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듯 고향방문단사업이란 이름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은 이들만 그것도 겨우 한두 차례 고향에 다녀왔다고 했다. 60년 동안 겨우 한두 차례라니!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런 과거 이야기 하는 건 정말 싫어요…….” 인터뷰 과정에서 일본인 아내 미츠코 씨가 저자에게 한 말이다. 타키코라는 여성 역시 같은 말을 했다. 침묵이 흐르는 순간, 타키코 씨 딸은 어머니를 대신해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이렇게 엄마에게 옛일을 묻잖아요. 그러면 약간 신경에 자극을 받으세요. 옛일을 기억하면 마음이 아프니까요.”

이 책에는 잔류 일본인도 나온다. 경성에서 태어난 일본인 여성 루리코 씨. 그녀는 철도원이었던 아버지가 회령으로 전근하여 북에 잔류하게 된 일본인 고아인데, 그곳에 남게 된 사연은 일본인 아내들의 경우보다 더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하다 가족과 떨어지거나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의 이미지와 겹쳐져 이 책에 소개된 인물 중 가장 안타까운 경우였다. 잔류 일본인들의 존재 역시 이 책을 통해 인지하게 되었는데, 그 수 역시 상상을 초월했다.

“후생노동성 추정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 한반도 북위 38도선 위쪽에 남아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 등으로 사망한 일본인은 약 3만 5,000명. 그 가운데 민간인은 2만 5,000명이 넘는다.”(195쪽) 민간인 중 한 명이 루리코 씨였던 것이다.

저자의 인터뷰가 특별한 점. 북에 다녀온 후 그녀는 일본인 아내들의 고향을 방문한다. 가족을 만나거나 이웃을 만나는데 일본인 아내들을 대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인 아내들, 그러니까 인터뷰이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 역시 특별해 보였다. 여성적, 아니 인간적 연대감이고 해야 할까. 다큐멘터리 작가의 사명감이나 사적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선 따뜻함이 느껴졌다. 한편, 기록자의 객관성은 인용한 논문이나 자료의 통계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에는 일본인 아내들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담은 사진이 함께 실려 있는데, 흑백으로 찍은 결혼식 사진 액자를 들고 있는 일본인 아내의 모습이 두 컷 실려 있다. 젊은 시절과 노년, 그 간극이 극명해서일까. 왠지 뭉클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을 사진은 담고 있었다. 일본인 아내들의 젊은 시절 사진들은 하나 같이 뭉클했다. 흑백 사진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돌아갈 수 없는 순간.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이 거기 있기 때문일지도.

일본인 아내들에 대해서 더 듣고 싶었다.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나 취재 과정에 대한 에피소드 등. 저자에게 궁금한 것도 많았다. 이런 독자들을 위해 저자는 에필로그에 책을 서둘러 출간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들 모두 노령이라는 것. 취재를 충분히 하지 못했는데 사망하기도 해서 아직 취재 중임에도 책을 출간했다는 것. 잘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생존해 있을 때 세상에 알리는 게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사라지면 관심도 사라질 테니까.

개성, 평양, 함흥, 회령, 신의주 같은 곳을 방문한 기록도 흥미로웠다. 우리 땅임에도 아직은 밟을 수 없는 땅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들을 꾸려 책으로 소개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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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고독한 날 - 정수윤 번역가의 시로 쓰는 산문
정수윤 지음 / 정은문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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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고독한 날』은 번역가 정수윤이 시(와카)로 쓴 산문집이다. 소소한 일상을 1000년 전에 쓰인 시와 엮어 풀어낸 ‘이야기’라서 그랬을까. 소설처럼 읽혔다. 40대 번역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 짧은 글 안에 소개된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같은 작가들이 소설의 ‘사건’을 대체하고도 남을 만큼 흥미로웠다. 한편, 읽는 내내 마음이 고요해졌는데, 소설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그 느낌이 좋았다. 어쩌면 시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감도 들었다.

내게 시는 늘 아리송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맘먹고 펼쳤다가 서가에 다시 꽂아둔 시집이 여러 권이다. 끝까지 읽은 시집이 단 한 권도 없을 정도다. 그래서였으리라. 정수윤 작가가 정의한 시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언어로.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언어로.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져지는 언어로. 이렇게 바꾸어 불러보는 것을 우리는 시라고 한다.”(152) 이런 것이 시라면 어려울 리 없을 것 같은데 나에겐 왜 시가 어려울까.

정수윤 작가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만난 다카하시 선생님을 소개하던 꼭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가 남긴 명언이란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미있게”(56) 글 쓰는 사람이라면 새겨두어야 할 명언 같다. 아니, 누구라도 소통하려면 이런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자이 오사무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단다. “딱딱한 건 딱 질색이야! 나는 유머러스해지겠다. 우스꽝스러워지겠다. 그것이 독자를 위로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더라도 어릿광대가 되겠다.”(91)

‘울다가 웃다가’ 꼭지는 이런 차원에서 감동적이었다. 정수윤 작가가 쓴 유일한 소설 『모기소녀』에 얽힌 사연. 여러 공모전에 냈다가 고배를 마시고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로 각색해 상을 받았는데, 그때 수상소감을 발표하러 단상에 올랐을 때의 이야기다. “제가 이 이야기를 쓴 건…… 혼자서 옥탑방에 살 때 저를 찾아온 모기 한 마리 덕분입니다. 외롭고 심심했던 그때…… (여기서부터 나는 눈물이 터졌다) 저를 찾아와준 모기와(어엉) 거미와(으어엉) 바퀴벌레(으어어어엉엉)…… 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이때 좌중이 웃음을 떠뜨렸단다. 작가도 울다가 웃었다는. 읽는 나도 웃는 한편으로 뭉클했다!

“흔들리는 인간은 본인은 괴로울지라도 외부에서 보면 그 결이 대단히 반짝여 보인다. 흔들리는 수면이 아름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완벽하게 정돈된 사람은 인형 같아서 사람의 결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185) 정수윤 작가가 자신의 산문을 와카의 숲을 지나다 주운 도토리에 비유했는데, 이처럼 단단한 문장들이 『날마다 고독한 날』에 도토리처럼 흩어져 있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도 눈길을 끓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 “영문학과 교수 시절 소세키는 학생들에게 이 문장(I LOVE YOU)을 번역해보라고 했는데 나 그대를 사랑하오, 당신을 사랑하나 봅니다 등등밖에 나오지 않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일본인은 그런 직접적인 어휘를 쓰지 않습니다. 차라리 달이 아름답네요, 같은 게 나을 겁니다.””(39-40) 번역이 외국어를 옮기는 단순한 일이 아님을 알려주는 단순명쾌한 일화다. 번역은 언어보다 한 차원 높은 문화를 옮기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로 번역하기’ 꼭지 역시 번역 작업을 곱씹어 보게 한다. “내가 번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시각적인 이미지다. 책을 읽다가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르는 순간을 좋아한다. 특히 일본 작품은 어떤 빛이나 시선에 매우 민감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같은 소설이 대표적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펼쳐지는 하얀 눈의 나라, 그 시각적인 각인이 소설을 끝까지 끌고 간다.”(119) 이어서 일본어의 특성을 소개한다. 관념어보다 표상어가 더 풍부하다. 계절어는 일본인의 언어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하이쿠에서 본 계절어가 특별했던 터라 이런 소개 역시 흥미로웠다!

하이쿠만 알았지 와카는 말로만 들었던 장르였는데, 정수윤 작가와 함께 ‘와카의 숲’을 거닐 수 있어서 참말, 좋았다! 이 책에는 ‘천 년 전 이국의 식물, 와카 65편’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울렸던 두 작품을 옮겨둔다. 5·7·5·7·7. 글자 수를 맞춰 정수윤 작가가 번역한 와카다.

“내 얼굴 보고 사랑한다는 소문 떠돌았나 봐 / 눈물로 젖어버린 소매 색이 짙어서”(218)

“내 얼굴 보고 사랑한다는 소문 떠돌았나 봐 / 눈물로 젖어버린 소매 색이 짙어서”(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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