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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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다닐 무렵이었을 것이다. 일본식 주택에 산 적이 있다. 그 집 앞으로 대성각이었던가 대흥각이었던가 '閣'자로 끝나는 큰 기와집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살았던 집은 바로 건너편에 있던 그 '큰집'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80년대 중반은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이 한참 입에 오르내리던 때였다. 어쩌면 그 일본식 주택은 한때 일본인 현지처가 살았던 집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관광버스가 그 '큰집' 앞을 더러 점령하곤 했다. 관광버스가 실어나르는 손님들은 대부분 일본인이라고 했다. 그 큰집의 실체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나의 호기심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집에 누가 사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높다란 담장과 대문이 그 집을 빙둘러 에워싸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은 언제나 꽁꽁 닫혀있었다. 비밀의 집이었던 것이다. 

이현수의 <신기생뎐>을 읽으면서 한때 내가 살았던 집이 일본식 주택이었다는 사실과 그 집 건너편에 요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얼마 전 우연히 그 곳을 지날 일이 있었는데, 큰 기와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곳의 '언니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옛부터 기생들을 노류장화(路柳墻花)라고 했다던가. 아무라도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밑의 꽃'. <신기생뎐>은 그런 기생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반 백년을 기방을 떠돌며 교잣상을 차려온 부엌어멈 타박네, 마지막 소리기생 오마담, 춤기생 미스민, 오마담의 기둥서방 김사장, 부용각의 유일한 남자 박기사, 서랍 많은 사람으로 통하는 춘자 하루코, 그리고 부용각. 이렇게 <신기생뎐>은 부용각을 중심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펼쳐 보인다. 

욕쟁이 할머니같은 타박네의 구수한 입담에 쿡쿡 웃다가도 갈피갈피 펼쳐지는 기생들의 신산한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콧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참빚과 사향주머니 하나 달랑 들고 여덟 살에 진주권번에 들어선 뒤 예순이 되도록 기방을 지키고(?) 있는 오마담. 네 번째도 또 '조개'냐며 한숨 짖던 아버지가 성의 없이 붙여준 나끝순이란 이름을 버리고 민예나라는 춤기생이 된 미스민. 어느 여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밥집을 찾아 나선 길에 그만 능소화에 이끌려 부용각으로 들어섰다가 오마담에게 넋을 빼았기고 자그마치 이 십년을 머물고 있는 박기사. 세 사람의 사연과 사랑 앞에선 할 말을 잃게 된다. 

'어찌어찌 길을 내어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터덜터덜...찾곤 했'던 팔십 고령의 교방 선생이 오마담에게 던지던 한마디 한마디는 어찌나 그 뜻이 깊고도 헤아리기 어려운지. 말도 삶을 닮아 구비구비다. 어느 날 찾아간 오마담이 목욕을 시키다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목욕탕 문 밖으로 목련이 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선생님, 꽃이...... 꽃이...... 져요."하고 감탄하자, 조용히 던진 선생의 한 말씀이 목련 꽃송이처럼 내 가슴에 툭하고 떨어졌다. 

 "육갑허네, 지지 않는 것은 꽃도 아니여. 질 줄 알아야 꽃인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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