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고독한 날 - 정수윤 번역가의 시로 쓰는 산문
정수윤 지음 / 정은문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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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고독한 날』은 번역가 정수윤이 시(와카)로 쓴 산문집이다. 소소한 일상을 1000년 전에 쓰인 시와 엮어 풀어낸 ‘이야기’라서 그랬을까. 소설처럼 읽혔다. 40대 번역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 짧은 글 안에 소개된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같은 작가들이 소설의 ‘사건’을 대체하고도 남을 만큼 흥미로웠다. 한편, 읽는 내내 마음이 고요해졌는데, 소설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그 느낌이 좋았다. 어쩌면 시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감도 들었다.

내게 시는 늘 아리송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맘먹고 펼쳤다가 서가에 다시 꽂아둔 시집이 여러 권이다. 끝까지 읽은 시집이 단 한 권도 없을 정도다. 그래서였으리라. 정수윤 작가가 정의한 시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언어로.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언어로.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져지는 언어로. 이렇게 바꾸어 불러보는 것을 우리는 시라고 한다.”(152) 이런 것이 시라면 어려울 리 없을 것 같은데 나에겐 왜 시가 어려울까.

정수윤 작가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만난 다카하시 선생님을 소개하던 꼭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가 남긴 명언이란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미있게”(56) 글 쓰는 사람이라면 새겨두어야 할 명언 같다. 아니, 누구라도 소통하려면 이런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자이 오사무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단다. “딱딱한 건 딱 질색이야! 나는 유머러스해지겠다. 우스꽝스러워지겠다. 그것이 독자를 위로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더라도 어릿광대가 되겠다.”(91)

‘울다가 웃다가’ 꼭지는 이런 차원에서 감동적이었다. 정수윤 작가가 쓴 유일한 소설 『모기소녀』에 얽힌 사연. 여러 공모전에 냈다가 고배를 마시고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로 각색해 상을 받았는데, 그때 수상소감을 발표하러 단상에 올랐을 때의 이야기다. “제가 이 이야기를 쓴 건…… 혼자서 옥탑방에 살 때 저를 찾아온 모기 한 마리 덕분입니다. 외롭고 심심했던 그때…… (여기서부터 나는 눈물이 터졌다) 저를 찾아와준 모기와(어엉) 거미와(으어엉) 바퀴벌레(으어어어엉엉)…… 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이때 좌중이 웃음을 떠뜨렸단다. 작가도 울다가 웃었다는. 읽는 나도 웃는 한편으로 뭉클했다!

“흔들리는 인간은 본인은 괴로울지라도 외부에서 보면 그 결이 대단히 반짝여 보인다. 흔들리는 수면이 아름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완벽하게 정돈된 사람은 인형 같아서 사람의 결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185) 정수윤 작가가 자신의 산문을 와카의 숲을 지나다 주운 도토리에 비유했는데, 이처럼 단단한 문장들이 『날마다 고독한 날』에 도토리처럼 흩어져 있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도 눈길을 끓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 “영문학과 교수 시절 소세키는 학생들에게 이 문장(I LOVE YOU)을 번역해보라고 했는데 나 그대를 사랑하오, 당신을 사랑하나 봅니다 등등밖에 나오지 않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일본인은 그런 직접적인 어휘를 쓰지 않습니다. 차라리 달이 아름답네요, 같은 게 나을 겁니다.””(39-40) 번역이 외국어를 옮기는 단순한 일이 아님을 알려주는 단순명쾌한 일화다. 번역은 언어보다 한 차원 높은 문화를 옮기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로 번역하기’ 꼭지 역시 번역 작업을 곱씹어 보게 한다. “내가 번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시각적인 이미지다. 책을 읽다가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르는 순간을 좋아한다. 특히 일본 작품은 어떤 빛이나 시선에 매우 민감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같은 소설이 대표적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펼쳐지는 하얀 눈의 나라, 그 시각적인 각인이 소설을 끝까지 끌고 간다.”(119) 이어서 일본어의 특성을 소개한다. 관념어보다 표상어가 더 풍부하다. 계절어는 일본인의 언어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하이쿠에서 본 계절어가 특별했던 터라 이런 소개 역시 흥미로웠다!

하이쿠만 알았지 와카는 말로만 들었던 장르였는데, 정수윤 작가와 함께 ‘와카의 숲’을 거닐 수 있어서 참말, 좋았다! 이 책에는 ‘천 년 전 이국의 식물, 와카 65편’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울렸던 두 작품을 옮겨둔다. 5·7·5·7·7. 글자 수를 맞춰 정수윤 작가가 번역한 와카다.

“내 얼굴 보고 사랑한다는 소문 떠돌았나 봐 / 눈물로 젖어버린 소매 색이 짙어서”(218)

“내 얼굴 보고 사랑한다는 소문 떠돌았나 봐 / 눈물로 젖어버린 소매 색이 짙어서”(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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