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파잔'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야생에서 잡은 아기 코끼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뒤 저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날을 굶기고 구타한다. 절반의 코끼리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지만 강인한 코끼리는 살아남아 관광객을 등에 태우고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그들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고 본능의 심연에서 어려풋하게 냉혹한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유를 향한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하는 것. 




저자는 이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다고.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가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이미 파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라고. 



책의 제일 앞 프롤로그의 이 첫부분을 읽은 순간부터 나는 이 책을 사랑할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 역시 어떤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는데, 그리고 이미 영혼이 파괴되고 껍질만 남은 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음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는데. 



지대넓얕 시리즈는 모두 훌륭하지만 개인적으로는 0권은 정말이지 훌륭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우주, 인류, 베다, 도가, 불교, 철학, 기독교 등 다루는 주제와 시간 범위부터 장난이 아닌데 채사장 특유의 명확하고 깔끔한 정리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꿰어간다. 본문은 세계의 근본구조는 무엇입니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이런 답을 제시한다. 


"나-세계"



이것은 본질적으로 이원론의 세계관이고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명제일 것이다. 이 세계관을 가지고 전개되는데 1,2장이 세계를 시간적 구성으로 나눈다면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공간적 구성으로 나눈 3~7장. 그 중 동양적 세계관은 3~5장, 서양적 세계관은 6~7장이다. 그리고 책을  한걸음한걸음 따라가다보면 세계와 나와의 관계, 일원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이 세계의 근본구조는 무엇입니까? 라고 할 때 "세계와 나는 하나다."가 이 책의 결론이다. 즉, 이 책은 한마디로 '세계와 나는 나뉘어져 있다'라는 이원론에서 시작해  과학과 역사, 철학과 종교를 거쳐가면서  '세계와 나는 하나다'라는 고대 성인들의 사상을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알기 쉽게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재미있고 흥미롭다. 이 책을 읽고 채사장, 정말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게다가 문장은 어찌나 간결하고 깔끔하고 재미있는지, 정말이지 내가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게 만든 몇 명의 사람 중에 채사장도 포함이다.



#1. 준비운동-세계를 투명하게 보기 


이 책의 전체가 모두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나 프롤로그, 그리고 준비운동이다. 그는 준비운동으로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구조화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판단중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세계관을 판단중지 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구조화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준비운동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다"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것을 모든 지혜의 출발점으로 여긴다. 주역에도 '관'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부터 시작해 칸트의 인식론도 마찬가지다. 나의 고정관념과 판단, 생각, 확신, 신념 등을 모두 내려놓고 세계를 투명하게 보기. 그렇기 위해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이는 개인적 차원의 일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우주적 차원의 일이기도 하다. 



"자기반성은 스스로와 대면하는 사유과정을 말한다. 마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유의 출발점이자, 최소 조건이 된다. 당신이 사유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개관적 대상으로 마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6)


그리고 강한 인간원리에 의하면 우주 또한 이러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 우주는 그 안에서 관찰자의 탄생을 허용해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찰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바로 강한 인간 원리와 참여 인간 원리다. 이것이 바로 우주에 인간이 탄생한 이유라는 것이다. 



#2. 자아, 세계, 그리고 관계



저자는 세상에는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재론과 관념론. 우선 실재론은 세계가 자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 반면 관념론은 자아가 세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이 차이로 두 세계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실재론은 결국 세계와 자아의 분리라는 이원론으로 향하고, 관념론은 세계와 자아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일원론으로 향한다. 이것을 아는 것은 책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 현대인의 사고를 지배하는 세계관은 대부분 이원론인데 이것은 반쪽짜리 세계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앎'의 영역은 2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안다는 것을 아는 영역'과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영역', 그렇지만 사실 앎의 대부분의 영역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영역이다.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인정하기보다 그것이 없다고 가정한다. 그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어쩌면 더 큰 세계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원론'이다. 



일원론은 간단하다.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지옥이라면 이것은 흔적으로 남아 당신의 다음 삶을 결정할 것이고, 당신의 마음이 천국이라면 당신의 다음 삶도 그렇게 결정될 것이다. 붓다가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왜 팔정도를 강조했느니, 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등 도덕 선생님 같은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을 심판하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에서다. (378)



"마음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다. 결론적으로 유식 사상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사실은 우리 마음에 그려진 이미지이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잇는 것은 오직 의식뿐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의식의 심연까지 깊게 파고 들어감으로써 의식을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까지 더듬는다. 즉 최종 종착지에 이르러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아와 세계를 일으키게 하는 근원적인 능력이었던 것이다. 만약 인류라는 존재가 자아가 무엇인지, 세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탐색하고자 하는 운명에 처해진 존재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러한 능력, 자아와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의 탐색에 있을 것이다. (380)


"이것은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우파니샤트>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의 관계, 유학의 <태극도설>, 그리고 서양 철학의 핵심이 되는 관념론, 중세 기독교의 신비주의와 이어지는 것이다. 세계가 내 마음의 반여잉고, 그러므로 세계와 자아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설명은 세계를 진지하게 통찰하고자 하는 모든 이가 결국에 도달하게 되는 최종 결론이다.(380) 


초기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은 이러한 결론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다. 바로 '일체유심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는 자기계발적 메시지로 해석되기에는 너무도 묵직한 개념이다. 일체유심조는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꿰뚫는다. 우리가 언젠가 이 말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 아마도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내 앞에 드러난 현상 세계가 내 마음이 지어낸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로써 자유로워질 테니 말이다. (381)


그동안 내가 뇌과학책과 심리학, 자기계발서, 촐학, 물리학, 불교 관련 책을 읽으면서 조각조각 메꿔오던 퍼즐이 이제야 맞춰지는 것 같았다. 범아일여, 일체유심조, 관념론, 모두 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 한마디를 찾으러 20년 가까이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무거움에 대한 사유는 지금부터 그 무게에 맞게끔 고민해나가야겠지.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 바깥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이 아름다운 눈앞의 세계는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 능력이 만들어낸 내 의식 안의 세계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는 내가 눈뜬 것과 동시에 생성되어 내가 눈 감는 동시에 소멸한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을 보는 자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 불교의 일체유심조, 칸트의 관념론,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궁극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470)



덧붙여,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 최근 <내면소통>을 읽는데 이 책에서 말하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뇌과학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이 책을 다 읽고 한발짝 더 나아간 책을 읽고 싶은 갈증에 헤매이고 있다면 <내면소통>을 추천한다. 










#3. 나와 세계의 관계를 알았다면 이제 침참해야 할 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주제와 결론은 명확하다고 말한다. 주제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이고 결론은 세계와 자아의 합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오래된 고대의 지혜를 들춰보아야만 하고 일원론의 세계관을 알아야 하는가? 



영리한 작가답게 이에 대한 답 또한 써져있다. 실용적인 이유로는 우리가 고전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고, 실제 이유는 우리가 반쪽의 세계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원론이라는 비좁은 섬 안에 머물고 있기에 자기 내면의 가려진 영억으로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두번째는 존재론적 이유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 세계관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하라. 

둘째, 외부의 떠들썩한 목소리를 가라앉힐 당신만의 시간을 만들어라. 

셋째, 남는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져라. 

넷째,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깊은 정적 속에서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안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하라. 

다섯째, 이제는 현실로 나아가라. 책과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져야 한다.

여섯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어느 날에,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이 다하게 될 날을 에아려보고 남은 삶 전체의 거시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고대의 인도인처럼, 삶의 시간 중 언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언제 내면을 향한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팽개쳐두었던 나의 살을 다시 펼치고 먼지를 떨어내고 다림질해야 한다. 

일곱째,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당신이 계획한 깨달음을 향해 열린 길을 따라 항해해야 한다.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지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552~553)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는데 뭉클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할 수 있는 거 말고, 정말 내 삶이 다하게 될 날을 헤아려 보면서 어떤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마침 오늘은 몸도 마음도 편안한 날이니 계획을 한번 세워볼까나..


나는 올해 48살이 되었다. 내 삶은 아마도 길게는 30년 정도가 남지 않았을까. 부계 유전으로 고혈압과 혈관질환, 당뇨를 가지고 있고, 나도 고위험군이다. 아버지 친척들을 보아도 80이 넘기신 분은 한분도 계시지 않으니 아마도 이 정도로 생각하는게 합리적이겠지. 그리고 아무리 건강하게 관리한다고 해도 75세 정도부터는 건강이 급속도로 하락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건강하게 몸과 마음을 영위하며 생활할 시간은 25년 내외로 남아있는 셈이다. 그리 길지 않은 거다. 



나는 50까지는 30대부터 고민해오던 돈과 경제적 자유에 대한 불안에서 자유롭고 싶다. 대출을 모두 갚고 싶다. 대출을 모두 갚게 되면 1년 정도 안식년을 갖고 싶다. 따뜻한 나라에서 요가와 명상을 하면서 내가 요즘 빠져있는 자기계발 프로그램의 이론적 내용을 정리하고 싶다. 그전에 페미니즘에 대한 책도 한 권 내고 싶고,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닌 개인의 만족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 50대의 내 인생은 몸과 마음의 합일을 위해 더 노력하고 싶다. 요가와 명상을 직업으로 삼고 싶고, 다른 이들의 건강과 성장을 위해 기여하고 공헌하고 싶다. 그리고 이 일을 70이 될 때까지 하고 싶다. 70이 넘으면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루하루 정진하고 싶다. 



25년이 짧다고 생각했는데 미리 그려보려고 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그리고 거시적이고 우주적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 당장의 대출과 이자에 대한 걱정부터 건강과 진로(?)에 대한 고민부터 드는 게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나의 의식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지향해나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좀더 천천히 불안과 걱정과 염려와 이유를 내려놓고 사유를 시작할 때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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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막내아들 이미지

<재벌집 막내아들>을 재미있게 봤었다. 극중 송중기(진도준 역)는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다. 그는 칼기 폭파사건을 예상해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값으로 논만 휑한 분당땅을 받고, 그것은 10 몇 년 후 그가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든든한 씨드머니가 되어준다. 



타이타닉에 투자하고, IMF를 예상하며 Y2K를 알고 바이코리아를 이끈다.이 모든 것은 그가 미래의 모습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안다면' 현재가 달라질까?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아느냐고? 우리가 점쟁이도 아니고, 미래를 아는 사람은 '신'밖에 없는데, 신은 인간이 아니니 결국 미래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신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화된 신은 아닐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범신론적 신을 믿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어쨌든 그렇게 미래와 현재를 따로 떼어놓고 보지만 사실, 세상을 바꾼 1%의 사람들은 미래를 아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미래를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하게 미래를 아는 법일 것이다. 



"전념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술이다. 우리가 지금 무엇에 전념하고 있는지는 말이 아니라 결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결과가 전념의 증거다." (p.41)



그러니까 지금 현재의 나는 과거의 전념의 결과다.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소름끼치는지 모른다. 



예전에 우치다 타츠루의 책을 보다가 완전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바로 "무지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기회와 사건을 통해 나의 무지를 확인하는 일을 만난다. 그때마다 우리는 무지를 타파하겠다거나 나를 알아보겠다는 생각을 철저히 무시한 결과가 바로 무지라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자연스레 생긴 자연체같은 것이 아니라 목적과 의지를 가진 철저한 실행의 결과가 '무지'라는 말에 얼마나 충격적이던지. 여기서 '무지'라는 말에 '미래'를 넣으면 결과는 똑같다. 미래는 현재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불가항력의 무엇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철저한 목적과 의지와 실행의 결과가 미래다. 그러니 우리의 전념이 적극적 전념이건 소극적 전념이건 그 결과는 미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거겠지. 



한때, 미래만 보고 산 적이 있다. 내일의 나를 어때야 해. 3년 후, 5년 후의 나는 어때야해. 나는 그렇게 미래를 사는 사람이었다. 그것만을 보고 살았다. 그런데 그것때문에 나는 현재를 산 적이 없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아파도 괴로워도 그저 참았다. 미래를 위해. 그리고 나는 지금 거울을 바라본다. 나는 무엇을 이루었나? 내가 원하던 미래가 에고로 가득찬 그저 그런 삶이었던가.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앞으로 3년 후를 위해서. 3년 후에 지금처럼 똑같이 힘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3년 후, 5년 후, 10년 후의 미래를 보며 이 책을 읽는다. 



"행동이 바뀌는 이유는 정체성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자신이 가장 전념하는 모습이다. 정체성의 바탕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전이 있다. 따라서 전념하는 비전이 다라질 때 정체성은 즉시 달라진다. 그러면 생각과 행동도 바로 달라진다. 맞다, 미래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p.41) 



나는 이게 모든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정체성이 바뀌지 않는 한, 그리고 가끔 그 정체성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정체성이 과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이다. 정체성은 미래에서 온다. 



우리가 다음날 중요한 약속이 있으면 오늘 술자리를 자제하듯이, 1달 후 발표할 일이 있으면 지금부터 틈틈이 준비하듯이, 3년후 미래를 위해 오늘 투자하듯이.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말하듯 시간차를 뛰어넘는 말이 평범한 말을 신의 계시처럼 들리게 만든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의 평범한 미래를 상상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거라는 '믿음'은 아닐까. 





































그게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이고 긍정확언의 본질이며, 네 안의 잠든 거인을 깨우고, 생각하면 부자가 되고, 잠재의식의 힘이고, 부의 시크릿이고 야망의 힘이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던 그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거머쥔다. 



그리고 90%의 사람들이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그릴 때, 그 사람들은 미래를 먼저 그린다. 완성된 집의 형태를 먼저 보고 그것의 설계도를 그려나간다. 그리고 그 집을 짓기 위해 현재에 무엇을 할지 역산한다. 성공은 그렇게 비합리적으로 온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관심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기꺼이 희생한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 나중에 미래의 내가 더 많은 돈을 쓸 수 잇또록 지금은 소비의 즐거움을 희생할 것이다. 일시적인 만족을 희생하고 교육과 건강, 인간관계에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이다. 미래의 나를 좋아하다가 그 감정이 커져 사랑하게 되면 현재의 보상을 희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나를 위해 투자하게 된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 나는 그 일 혹은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투자한다." (p.83)



나는 미래의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가? 미래의 내가 진심으로 성공하기 원하는가? 이 책은 결국 그것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망설이지 말고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기꺼이 투자하기. 내가 아이한테 하듯이, 우리 회사에 하듯이.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미래의 나를 위해 기꺼이 투자하고 헌신해야겠다.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먼저 다른 사람이 목표를 이룰 수 잇게 도와라. 거기서 출발해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변혁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점으로 갈 수 있다. 변혁적 관계를 탄탄하게 구축하면, 미래의 당신은 상상 이상으로 훌륭하고 탁월해질 것이다. 거래적 관계로는 지금 이 지점까지만 올 수 있었다. 거래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미래의 나는 더 멀리 갈 수 없다. - P80

누군가에게 진정한 관심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기꺼이 희생한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 나중에 미래의 내가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도록 지금은 소비의 즐거움을 희생할 것이다. 일시적인 만족을 희생하고 교육과 건강, 인간관계에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이다.
미래의 나를 좋아하다가 그 감정이 커져 사랑하게 되면 현재의 보상을 희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나를 위해 투자하게 된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 나는 그 일 혹은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투자한다. - P83

두려움이 용기가 되면 용기와 비전이 동기가 되는 것보다 낮은 수준의 의식 상태에 머물게 된다. 두려움을 초월해 수용과 용기. 사랑을 행동의 이유로 삼으려면 더 높은 수준의 정서가 발달해야 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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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나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말하고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연구한다. 인문학자가 잘못한  건 없다. 인문학은 그런 학문이다. 과학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인문학에는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가르는 분명하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매우 그럴법하거나 그럴 것 같기도 한 주장과, 별로 그렇듯하지 않거나 아주 말이 안 되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럴법한 견해끼리 충돌하면 승패를 가리지 못한다. 어느 쪽도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인문학에는 과학과 달리 영원한 진리가 없다. 한때 진리로 통하는 이론도 100년을 견디지 못한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이 다 그랬다. (28p)



<유시민의 과학공부>를 흥미롭게 읽었다. 쉽고 재미있었으며 무엇보다 인문학자/ 과학자라는 틀을 통해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을 흥미롭게 대비시킨다. 몇 년의 나만 하더라도 이런 식의 대명사로서의 '인문학자', '과학자'를 내세워 그들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글들을 읽는 게 너무 괴로웠었다. 



읽는 내내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과학자'혹은 '인문학자'라는 집단 혹은 사람이 무엇인데? 누구를 말하는데? 그것이 실체가 있기는 한 것인가? 통계론적 수치로서의 평균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또한 당신이 편의상 혹은 자기 글의 맥락을 위해 그저 두루뭉실하게 퉁쳐버린 가상의 집단 아닌가? 그런 가상의 통친 집단을 이미 있는 집단인양 기정사실화해 논리를 전개해나간다는 것 자체가 모래 위에 쌓인 성 아닌가?"


 이런 생각들 때문에 글을 집중해서 읽어나갈 수가 없었고, 그런 구분 자체가 너무 폭력적일 정도로 거칠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야 알았다. 그가 말하는 인문학자는 바로 자신이었음을, 그리고 과학자/인문학자의 나눔은 현실을 방법론의 차이이고, 질문 방식의 차이였음을 말이다.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인문학은 '왜'와 '무엇을'을 묻는다.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인간은 왜 신을 창조했는가? 살의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욕망을 채우고 싶어서다. 그러다면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믿는 자에게 진리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망상이며 권력자에게는 유용한 통치도구다. 문과는 보통 이런 식으로 묻고 답한다. 

사회생물학의 질문은 인간과 다르다. '어떤 적응의 이익이 있기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군집에서 종교행위가 진화했는가?" 신의 숫자와 이름과 교리는 다르지만 모든 종교에 종교가 있었고 지금도 있다. 초월적 존재를 믿고 종교 공동체에 속하려는 성향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보편적 특성으로 인정할 수 있다. 다윈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행위 양식이 인간 사회에서 진화한 것은 '적응의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적응의 이익'은 생존과 번식에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를 가리킨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도바 더 잘 생존했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종교 자체가 '적응의 이익'이 있는 게 아니라 '적응의 이익'을 제공하는 다른 요소가 종교라는 형식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다른 요소는 무엇이며 왜 하필 종교라는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했는가? (131)


그러니 이 책은 이과와 문과의 학문적 방법론의 차이를 다룬 책이자, 30년 동안 문과만 공부한 한 남자가 과학을 공부하며 인간과 생명과 자연과 우주를 대하는 태도를 알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학문의 방법론은 단순히 학문이라는 좁은 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세사응 ㄹ어떻게 바라보고 설명하느냐, 나아가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 문제까지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유시민이 안내하는 과학지식은, 과학을 차갑고 냉정한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세상과 사물을 알아가고자 하는 연구자의 뜨거운 집념의 열정의 산물로서 느껴지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유시민의 지적 여정과 깨달음을 함께하는 즐거움+과학자의 사고와 질문법을 알게 됨*세상을 과학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세 겹의 즐거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과학은 스스로 발전했고, 인문학은 과학을 껴안으면서 전진했다. 인문학은 과학의 사실을 즉각 받아들여 활용하기도 하지만 완강하게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은 인문학보다 힘이 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물질의 증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잇게 되엇다. 인문학에 가장 크고 깊고 넓은 변화를 가져다준 과학적 발견은 무엇이었을까? 누구에게 가장 큰 감사패를 주어야 할까?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을 공동 수상자로 추천한다. 두 사람은 '우리 집과 우리 엄마'의 진실을 밝혔대.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32/~33)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질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다. 그러나 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다른 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를 '철학적 자아'라고 하자.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반 명제로 확장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47)



세상은 사실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까,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도 이야기, 나를 괴롭게 하는 것도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했는데, 자기만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마치 실체인양 말하는 것도 강요 강조하는 것도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나는 좀더 담백하게 살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를 투명하게 보면서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이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인문학자들은 오랜 세월 인간 본성을 두고 논쟁했지만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논쟁을 종결하려면 사실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인문학자는 하지 못했던 그 일을 신경과학자들이 해냈다. ..


'거울신경세포'라는 멋진 이름을 얻은 그 세포는 세상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마음을 읽는 세포'라거나 '문명을 만드는 뉴런'이라고 명예로운 별명도 생겼다.거울신경세포는 대뇌피질을 비롯한 뇌의 여러 부위에 분포해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는 행위를 조장하거나 억제하는 등 여러 일을 한다. 또한 공감과 도덕적 동기 유발의 기초를 제공하며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염려하고 덜어주는 행위를 장려한다. 


맹자는 사람한테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남을 도우려 하는 생물학적 본성이 있다고 봤다. 그것을 측은지심이라 했고 거기에서 인이라는 가장 중요한 미덕이 나온다고 판단했다. 오로지 관찰과 추론으로 구축한 이론이었다. 거울신경 '세포'면 어떻고 거울신경 시스템'이면 또 어떤가. 우리 뇌에 이기적 행동뿐만 아니라 이타적 행위도 하게 만드는 본성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공부를 하니 맹자가 더 대단해보인다. 뛰어난 인문학자는 물질의 증거 없이도 옳은 인식에 다가선다. 때로는 과학자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다. (88)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의 많은 선택들에 의한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것들의 실수, 성공, 행복, 슬픔, 내 한계와 내 가능성까지 모두 아는 상태에서 내가 아는 최선의 것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통제강박이자 부질없는 욕망이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 한계를 깨달음은 역설적이게도 한계 안에서의 새로운 자유를 준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가하지 않은가? 내 뇌는 매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로게 다양한 견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3장에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고 말했다. 엔트로피 법칙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우리들 각자는 '질서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어떤 사람과 배열이 똑같은 원자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이러한 저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 갈 작정이다. 존재으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도덕과 규범을 세우는 작업을, 누구에게도 '앙웃소싱'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한다. (253)



나는 내 자신을 무한정 믿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대뇌피질의 신경세포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드는 때가 올 것이다. ... 나는 욕심많고 인색하고 어리석고 보수적인 노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내가 하는, 더 젊은 내가 했떤, 모든 말과 행동을 부정하는 언행을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뇌의 하드웨어 퇴화로 인해 벌어진 신경생리학적 사건으로 여겨 주기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말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동정해 주기를 바란다. 내 자아가 오늘의 상태를 유지하는 한,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지로 그런 변화를 선택하지는 않을 테니까.



다시 강조한다.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지진으로 흔들리는 땅 위에서 폭풍우를 맞으며 서 있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퇴락해 사라질 운명이다. 자유의지는 그 곳에 기거한다. 있다고 말하기엔 약하고 없다고 하기엔 귀하다. 그래서 나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확언하지 못하겠다. 뇌과학을 조금 알고 나니, 나를 포함해 어떤 인간도 무한 신뢰하거나 무한 불신하지 않게 되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엔 흉하고 절멸하기에는 아깝다. 그 운명이 어찌 될지 나는 알지 못하고 책임질 수도 없다. 단지 나 자신의 삶 하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애쓸 따름이다. 악과 누추함을 되도록 멀리하고 선과 아름다움에 다가서려 노력하면서. 내게 남은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자. 이것이 내가 뇌과학에서 얻은 인문학적 결론이다. (.101)


그는 이렇게 과학을 공부하며 조금더 겸손해졌고, 한계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그안에서 더 지혜롭게 되엇다. 그리고 조금더 멋있어졌다. 나도 이랬으면 좋겟다. 한계를 알고 담담히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 이것이 유시민 작가의 책에서 배운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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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통찰을 준 부분이 많아서 아까워서 기억하기 위해 필사한다. 


물리학과 화학이 없으면 천문학과 생물학은 존립하기 어렵다. 윌슨은 인문학이 다윈주의를 거부하면 학문 자격이 없다고 말한 셈이다. '생물학 패권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질만했다. 윌슨은 실제로 공공장소에 욕설을 듣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인간은 분명 유전적 우연과 환경적 필연이 작용한 자연선택의 산물이고, 문명은 우리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본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힘으로 본능을 어느 정도는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본성 그 자체를 역사의 시간에 바꾸지는 못한다. 한 종의 본성이 달라지는 데는 역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진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윤리학자 싱어는 인문학자들에게, 특히 다윈주의를 오해하고 배척하는 좌파에게 사회생물학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삶의 영역을 문화에 따라 크게 다른 것(경제구조, 정부형태), 조금 다른 것(결혼주의, 인종주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사회적 위계)으로 나누고,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경향성에 근거를 둔 개혁 정책을 추진하라고 충고했다 인간 본성과 마찰을 덜 일으키는 과제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앞에서 나는 다윈주의와 관련해 우파와 좌파 모두 오류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우파는 진화라는 사실을 도덕으로 만들었다. 사실은 도덕이 아니다. 자연에 존재한다고 해서 다 아름답고 좋은 건 아니다. 생물은 어디서나 생존경쟁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존경쟁이 아름답거나 고귀하다고 하는 건 어리석다. 반면 좌파는 도덕에 반한다는 이유로 사실을 무시했따. 자연선태고가 진화는 특정한 방향이 없다. 인간도 생존과 번식을 위해 결쟁하며 인간에게도 보편적인 생물학적 본성이 있다. 좌파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사회를 재족했다가 대형 참극을 저질렀다. 

마르크스는 이기심, 소유욕, 지배욕을 포함해 계급 착취와 대립을 일으키는 모든 종류의 의식을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한 경제적 토대의 산물로 규정했다. 인간을 그렇게 이해하면 폭력혁명과 계급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계급 착취를 폐지할면 사유재산 제도에 근거를 둔 사회구조를 변혁해야 하는데 지배계급이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 없다. 부즈주아지(유산계급)은 국가 폭력을 동원해 혁명을 탄압한다. 혁명을 성취하려면 부르주아지의 국가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해야 한다. 그런 폭력을 확볼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을 조직하느 ㄴ수밖에 없다. (134)




다윈주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틀렸다. 다윈주의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꿈을 이룰 수 잇는 종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윈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물론 철학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겉으로는 진화론을 인정했지만, 인간 심리와 행동에 자연선택이 만든 생물학적 기초가 있다는 명제를 부정했다.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을 호모 사핑네스의 보편적 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보았다. 사회적 관계를 바꾸면 본성도 달라진다고 믿었다. 공산주의자는 '올바른 사상'을 지녔기 때문에 권력을 잡아도 오직 인민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꿈에 홀려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마르크스 추종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권력자보다 무자비하고 집요하게 권력을 탐했다.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으면서 권력을 독점했다. (..) 다윈주의자인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잘못 본 데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ㅅ회제도는 변하기 어려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충돌하면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사유 재산을 폐지한 게 대표적이다. 그게 도덕적으로 나쁜 정책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한 사회체제는 장기 존속할 수 없다는 말이다. (136)



인간은 적응의 이익을 생각한다. '성실'과 '태만 "결과적으로 '태만'이소련이라는 인간 군집의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되었다. '성실'과 '태만'이 공존하는 '쌍안정 시스템' 이라도 되었다면 체제가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련의 권력자들은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다. 인간 심리와 행동의 밑바닥에 생물학적 제약조건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기심가 가족에 대한 집착 같은 성향은 사적 소유를 통대로 한 계급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바꾸고 교육을 실시하면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국민 대다수가 '태만'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 사회는 혁신과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소련은 미국이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싸우다 졌다. (142~143)



'자등명 법등명' 석가모니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법(진리)을 등불로 삼는 것은 관습과 미신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산다는 뜻이다. 세상에 끌려다니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ㅇ로 살라 했으니 석가모니는 분명 깨달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무신론자이고 유물론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석가모니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문장이라고들 한다. 기계벅으로 옮기면 간단하다. '색과 공은 같다.' 문제는 '색'과 '공'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불교 철학자들은 '현상과 실체', '존재와 변화', '물질과 마음''존재와 무''물질과 에너지'등 갖가지 해석을 제시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리를 담고 있다는 증거도 없다.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게 당연하다. 이 문장을 양자역학과 연결하려면 '색'과 '공'을 '존재'와 '무'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238







"칸트는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칸트만 그런 게 아니다. 어떤 천재도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한다. 칸트의 인식론은 불가지론이다. 사물이 우리의 주관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얼 알고 무얼 모르는지 알았다. ..스무 살에 카느의 인식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지금은 아는 것처럼 말한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뇌과학과 양자역학을 얻어들었다. ‘배웠다‘고 하기에는 변변치 않아서 ‘얻어들었다‘고 햇다. 칸트의 인식론은 칸트의 언어로는 해설하기 어렵다. 연구자들의 해설서가 원저 못지않게 난해한 것은 칸트의 언어에 갇혔기 때문이다. 천재의 이론을 해석하려면 그의 시대에 없었던 정보와 지식을 동원해야 하고 그의 것과는 다른 언어를 가져와야 한다. (71p)

- P71

"과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고 느꼇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 짚어 보았다. 인문학의 가치와 한계를 생각하게 되엇다는 것이다.본문에서 누차 말했지만 과학에는 옳은 견해와 틀린 견해, 올은지 틀린지 아직 모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는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그게 인문학의 가치이고 한계다.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학,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 - P292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나는 러셀의 말에 공감한다. 신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서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 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느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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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인가,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의 판권은 2012년 8월에 발행된 초판 3쇄이고, 10년 전 얼마나 접고 밑줄을 그었는지 너덜너덜하다. 



이 책을 다시 읽는다. 읽어버릴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니 이렇게 쓸 수 밖에 없고, 언젠가 다시 쓸 수 밖에 없겠지. 그렇지만 어쨌든 2024년의 첫 책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밖에. 





기왕 10년 만이라고 이야기를 했으니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저자 또한 카프카의 말을 인용하며 "초조한 것은 죄다"로 시작해 반복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정말 완전 몰입해서 읽었고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하지만 그의 글에 관해 쓰려고 하니 한 글자도 쓸 수가 없더라. 그래서 나는 몇 번을 썼다가 지웠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가 지웠다가, 그렇게 그의 글을 숱하게 읽기만 하고 필사만 해댔다. 



이번에 글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욕심을 내려놓는다. 잘 쓰려고 하는 욕심, 뭔가 잘난척 하고 싶은 마음, 나 이것도 알아, 내가 옳아 이런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내려놓은 빈자리에 내가 감동깊었던 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 타인과 나누고 싶고 연결되는 가능성을 그 자리에 채워놓는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혁명의 본질에 대한 부분과 루터, 그리고 마지막 장의 문맹률과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데, 우선은 혁명의 본질부터!



#1. 혁명의 본체는 "읽는 것, 그리고 다시 쓰는 것:


사피엔스에서는 인간이 인지혁명이 모든 변혁을 가져온 첫번째 혁명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호모 사피엔스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호모사피엔스를 '이야기하는 동물 stoytelling anmal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신과 국가와 기업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의 근간이자 삶에 의미를 주는 원천이 된다. 그 이야기를 위해 우리는 기꺼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임을 당한다. 이런 형태는 침팬지나 늑대를 비롯해 사회생활을 하는 똑똑한 다른 종에서는 볼 수 없다."<사피엔스> 14p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상상을 하기 시작하면서 무리나 집단이 아닌 사회를 만들어냈다. 그 사회는 가족, 국가, 종교, 공동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언어를 통해 현실화되고 구속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법과 교리, 경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인지혁명은 바로 언어, 텍스트에 의해 만들어지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이 어떻게 혁명인지, 혁명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한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읽어버렸고, 읽은 이상 다시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결국 혁명의 본체라는 말한다. 




#2. 읽고 쓰는 것은 '준거를 만드는 것'


<팔순에 한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책을 보면 팔순이 되어서야 한글을 익힌 할머니들이 하는 말씀이 있다. 한글을 익히고 나서야 이제 더이상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게 되었다고. 그 전에는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항상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시 틀린 것은 아닌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물어봐야 했는데 한글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준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앞에 로빈슨 크루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가 무인도에서 혼자 있을 때 그를 가장 공포에 떨게 한 것은 바로 지각과 사고를  구별할 수 없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혼자 본 것은 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지각이 자신에 의해서만 보증된다는 것은 사실 지각되지 않은 것과 같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로빈슨 크루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인식주체로서 자기밖에 알 수 없다는 것을 준엄하게 직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 우리가 읽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 뿐이다. 그래야만 미치지 않을 수 잇을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텍스트를 읽는다. 철저하게. 제대로, 진정으로, 미쳐버릴 정도로, 읽는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_36p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이상해질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중략)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는 옳고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중략)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중략) 그는 읽었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이 세계는 이 세계의 근거이자 준거야야 할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85~86p)



이것은 저자의 말대로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일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 있다고밖에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88)그리고 거기에서 혁명이 탄생한다. 



그래서 결국 루터는 성경을 읽었고, 읽어버렸고, 읽어버린 이상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유명한 95개조의 의견서를 냈다. 1517년 문맹률 95% 식자율은 단 5퍼센트에 불과한 때, 라틴어로 쓰여 있는 95개조의 의견서를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은 1%도 되지 않았다. 그는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주장을 철회하라는 국회의 소환에 응하게 되는데 이때 유명한 대사를 날린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루터는 자신의 준거를 '책'에서 찾았다. 이슬람의 무함마드도 마찬가지다. 그는 계시를 받기 전 명삼을 위해 동굴에 가는데, 거기에 대천사 지브릴이 있다. 지브릴은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란다. 바로 "읽어라" 이슬람의 성전 <코란>이란 '읽기'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중세 해석자 혁명도 마찬가지다. 11세기 말쯤부터 법제도의 정비가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범유럽적인 대규모 상업권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12~14세기에는 이미 이윤 추구를 위한 생산 활동이나 가격경쟁, 개인의 신용 거래나 자본의 원시적 축적 등 이른바 자본제의 기초로 생산되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법의 정비, 아니 '법의 혁명'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중세 해석자 혁명이다. 



이것은 루터나 무함마드와 달리 전혀 극적이지 않다.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가 밤낮으로 홀로 책장을 넘기고 사전을 찾고 판례를 조사하여 법문을 고쳐 씁니다. 정말 수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수수한 작업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이어지는 작업 자체가 바로 혁명입니다. ..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안출된 가장 중요한 제도적 의제가 있습니다. '단체'입니다. '회사, 법인'이나 ;조합, 협회'입니다. "(212p)



그러니 문학은 단순히 문학작품으로서의 문학이 아닌 우리의 언어로 만들어나가는 세상에 대한 준거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다시 쓰는 것이 필요하다. 읽어버린 이상 다시 읽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된 이상 다시 쓸 수밖에 없다. 나의 인생의 준거를 내가 써야 하기 때문이다. 


 

#3. 언어가 가능성을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말을 하면 이루어진다.""끌어당김의 법칙"과 같은 개인의 기복신앙이나 바람과 같은 좁은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고, 텍스트를 새로 쓴다는 건, 그 가능성에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잇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5000년박에 안 되었다는 사시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스빈다. 문맹이라느 것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 정도는 쓸 수 있다거나 표지 정도는 읽을 수 있는 등 여러 수준의 문맹이 있습니다.그러나 그 90퍼센트는 '완전한' 문맹입니다. 사인을 할 수 없으니 x표를 해두는 사니의 이름도 쓸 수 없는 완전한 문맹입니다."(260)



"1850년대 잉글랜드는 가장 선진국이었습니다. 성인 문맹률은 30퍼센트였습니다. 1850년이라고 하면 디킨스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룰 출판한 해이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떨까요? 40~45%였습니다. 스탕달의 <파르므의 수도원>이 1939년, 프롤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1857년, 보들레르의 <악의 꽃> 초판도 1857년에 나왓습니다. 에스파냐의 문맹률은 75%였습니다. 정말 우리의 세르반테스는 뭘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274)



"좀 더 근사한 것은 러시아입니다. 1850년, 러시아제국의 문맹률운 90퍼세트였습니다. 완전 문맹의 데이터입닏. 도스토옙스키가 1846년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톨스토이가 1852년에 <유년시대>를 냅닏니다... 제국의 인구는 4000만명이었습니다. 대충 양보하여 10퍼센트인 400마념ㅇ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수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274)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면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76p)



그렇다면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패배했을까요? 진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스물여섯살 때 병에 걸려 대학을 그만두었고, 책을 냈으나 바그너 일파로부터 중상을 받아 전혀 팔리지 않고, 알려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고, 보상받지도 못하고, 그리고끝내 발광하여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유폐된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자신의 명성이 올라간 것도 알지 못한 채, 그게 패배인 걸깡? 암것도 되지 못한 걸까요? 모든 게 쓸데없는 것이었을까요? 이것이니체 자신이 말한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것입니다."(298p)



나는 언제나 이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부터, 작가의 마지막 문장처럼 환희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텍스트가 장악하는, 무엇이 어떻게 만들어갈지 모르지만 가능성만으로 가득찬 언어라는 세상 속으로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항상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가슴 벅차도록 고맙고 감사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옳은 일,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거였다. 나의 에고가 간절히 원하고 원하던 말을 이 책이 다 해주고 있었기에. 



이제 나는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는다. 이 책을 열렬히 환호하던 그 모든 순간 또한 내가 옳다는 맞다는 자아의 외침에 끌린 것 뿐임을 이제는 안다. 그 에고를 내려놓는다. 그 자기만족과 자기 신념을 내려놓는다. 이 말은 이걸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호불호의 자기만족을 내려놓고, 이 책에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 혁명으로서 텍스트의 가능성을 더욱더 한껏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과거에서 오는 삶을 내려놓고 새로운 텍스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언어를 고쳐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 이제 내가 만들어갈, 내가 새롭게 고쳐 쓸 나의 인생 속으로, 나의 언어 속으로. 그것이 이 책을 덮을 때마다 항상 느끼던 환희와 설렘의 이유였고, 그것이 혁명의 향기였다. 이것이 나의 미래의 문헌학이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 P36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어리석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글쎄요. 이 책도 바라건대 무지와 어리석음의 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지요. - P45

반복합니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바꿔 읽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꿔 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P87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잇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5000년박에 안 되었다는 사시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스빈다. 문맹이라느 것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 정도는 쓸 수 있다거나 표지 정도는 읽을 수 있는 등 여러 수준의 문맹이 있습니다.그러나 그 90퍼센트는 ‘완전한‘ 문맹입니다. 사인을 할 수 없으니 x표를 해두는 사니의 이름도 쓸 수 없는 완전한 문맹입니다 - P260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면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P276

그렇다면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패배했을까요? 진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스물여섯살 때 병에 걸려 대학을 그만두었고, 책을 냈으나 바그너 일파로부터 중상을 받아 전혀 팔리지 않고, 알려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고, 보상받지도 못하고, 그리고끝내 발광하여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유폐된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자신의 명성이 올라간 것도 알지 못한 채, 그게 패배인 걸깡? 암것도 되지 못한 걸까요? 모든 게 쓸데없는 것이었을까요? 이것이니체 자신이 말한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것입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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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에 읽은 책을 제대로 정리도 못했는데 벌써 2024년이라니, 


요즘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든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하기도 힘든데 새로운 사업에 대한 고민을 접을수가 없을까? 심지어 3년도 더 전부터. 


며칠 전 만난 친구들은 내가 계속 하고 싶다고만 하고 포기하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내놓았는데 이런 것들이다. 

첫째, 실패하기 무서워서. 이건 일정 정도 맞다. 하지만 이 이유가 큰 것 같지는 않다. 

둘째, 완벽한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어서. 이건 아니다. 내가 언제 완벽한 상태에서 시작했던가. 그런 적도 그걸 원한 적도 없다. 

세번째 친밀한 관계가 싫어서. 이 이야기를 듣고는 잠깐 소름이 끼쳤다. 이것도 분명 맞다는 것을 내 영혼이 먼저 알아차리고 수긍했기 때문이다. 맞다. 친밀한 (척하는) 관계를 새로 맺는게 싫어서 계속 망설이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이쯤되서는 질문을 다시 해봐야 한다. 왜 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왜 하려고 하는지를 말이다. 돈 때문에? 맞다. 대출금이 너무 많아서 돈을 갚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것도 맞다.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그럼 그 일을 하면 돈을 더 벌수 있나? 그건 아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게 돈은 더 벌수도 있을거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건 지금도 취미생활로 지금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굳이 왜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거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책을 나누는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수익모델이 마땅치 않고, 교육과 북클럽 어디메쯤에서 계속해서 진도가 나아가질 않았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생각해보니 애당초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교육도 아니고, 북클럽도 아니고, 그 어디메쯤도 아니었다. 그냥 이것들은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들이었고(할 수 있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글을 쓰고 그 글을 사람들과 나누고 같이 책을 읽는 것이었다. 즉, 나는 그냥 글을 쓰고 싶었고, 혼자 쓰는 일기가 아니라 작가가 되고 싶었던 거다. 그 글을 인스타나 블로그에 연재하고 싶었던 거고, 그것으로서 독자를 얻어서 책을 출판하고 그걸로 강의도 하고 북클럽도 하고 싶었던 거다. 


이렇게 단순한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맨날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만 생각하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한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니. 이걸 눈물이 난다고 해야 하나, 어이 없다고 해야하나, 헛똑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무언가 대단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김연수 작가의 말마따라 재능이 없고, 문창과를 못 나왔고, 독후감 대회에서 한번도 상을 받지 못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글을 쓰는 사람이, 계속 끊임없이 쓰는 사람이 작가가 된다. 이걸 깨달은 순간 3년 넘게 나를 따라다니던 사업 생각이 싹 사라졌다. 나는 3년 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구나. 하나의 글을 다 쓰고 나서 다시금 갈증을 느끼고 있었구나. 하나가 끝난 바로 그 다음부터 바로. 


그래서 이제 돌아가지 않기도 했다. 그냥 글을 쓰기로. 그냥 오늘부터. 그냥 되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그냥 닥치고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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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0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잠자기 전 일기나 다이어리에 글을 쓴다면 결국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해요. 물 한 방울이 결국 단단한 암석에 구멍을 남기는 것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