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인가,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의 판권은 2012년 8월에 발행된 초판 3쇄이고, 10년 전 얼마나 접고 밑줄을 그었는지 너덜너덜하다.
이 책을 다시 읽는다. 읽어버릴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니 이렇게 쓸 수 밖에 없고, 언젠가 다시 쓸 수 밖에 없겠지. 그렇지만 어쨌든 2024년의 첫 책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밖에.
기왕 10년 만이라고 이야기를 했으니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저자 또한 카프카의 말을 인용하며 "초조한 것은 죄다"로 시작해 반복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정말 완전 몰입해서 읽었고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하지만 그의 글에 관해 쓰려고 하니 한 글자도 쓸 수가 없더라. 그래서 나는 몇 번을 썼다가 지웠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가 지웠다가, 그렇게 그의 글을 숱하게 읽기만 하고 필사만 해댔다.
이번에 글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욕심을 내려놓는다. 잘 쓰려고 하는 욕심, 뭔가 잘난척 하고 싶은 마음, 나 이것도 알아, 내가 옳아 이런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내려놓은 빈자리에 내가 감동깊었던 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 타인과 나누고 싶고 연결되는 가능성을 그 자리에 채워놓는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혁명의 본질에 대한 부분과 루터, 그리고 마지막 장의 문맹률과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데, 우선은 혁명의 본질부터!
#1. 혁명의 본체는 "읽는 것, 그리고 다시 쓰는 것:
사피엔스에서는 인간이 인지혁명이 모든 변혁을 가져온 첫번째 혁명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호모 사피엔스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호모사피엔스를 '이야기하는 동물 stoytelling anmal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신과 국가와 기업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의 근간이자 삶에 의미를 주는 원천이 된다. 그 이야기를 위해 우리는 기꺼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임을 당한다. 이런 형태는 침팬지나 늑대를 비롯해 사회생활을 하는 똑똑한 다른 종에서는 볼 수 없다."<사피엔스> 14p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상상을 하기 시작하면서 무리나 집단이 아닌 사회를 만들어냈다. 그 사회는 가족, 국가, 종교, 공동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언어를 통해 현실화되고 구속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법과 교리, 경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인지혁명은 바로 언어, 텍스트에 의해 만들어지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이 어떻게 혁명인지, 혁명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한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읽어버렸고, 읽은 이상 다시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결국 혁명의 본체라는 말한다.
#2. 읽고 쓰는 것은 '준거를 만드는 것'
<팔순에 한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책을 보면 팔순이 되어서야 한글을 익힌 할머니들이 하는 말씀이 있다. 한글을 익히고 나서야 이제 더이상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게 되었다고. 그 전에는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항상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시 틀린 것은 아닌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물어봐야 했는데 한글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준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앞에 로빈슨 크루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가 무인도에서 혼자 있을 때 그를 가장 공포에 떨게 한 것은 바로 지각과 사고를 구별할 수 없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혼자 본 것은 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지각이 자신에 의해서만 보증된다는 것은 사실 지각되지 않은 것과 같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로빈슨 크루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인식주체로서 자기밖에 알 수 없다는 것을 준엄하게 직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 우리가 읽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 뿐이다. 그래야만 미치지 않을 수 잇을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텍스트를 읽는다. 철저하게. 제대로, 진정으로, 미쳐버릴 정도로, 읽는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_36p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이상해질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중략)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는 옳고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중략)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중략) 그는 읽었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이 세계는 이 세계의 근거이자 준거야야 할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85~86p)
이것은 저자의 말대로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일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 있다고밖에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88)그리고 거기에서 혁명이 탄생한다.
그래서 결국 루터는 성경을 읽었고, 읽어버렸고, 읽어버린 이상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유명한 95개조의 의견서를 냈다. 1517년 문맹률 95% 식자율은 단 5퍼센트에 불과한 때, 라틴어로 쓰여 있는 95개조의 의견서를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은 1%도 되지 않았다. 그는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주장을 철회하라는 국회의 소환에 응하게 되는데 이때 유명한 대사를 날린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루터는 자신의 준거를 '책'에서 찾았다. 이슬람의 무함마드도 마찬가지다. 그는 계시를 받기 전 명삼을 위해 동굴에 가는데, 거기에 대천사 지브릴이 있다. 지브릴은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란다. 바로 "읽어라" 이슬람의 성전 <코란>이란 '읽기'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중세 해석자 혁명도 마찬가지다. 11세기 말쯤부터 법제도의 정비가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범유럽적인 대규모 상업권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12~14세기에는 이미 이윤 추구를 위한 생산 활동이나 가격경쟁, 개인의 신용 거래나 자본의 원시적 축적 등 이른바 자본제의 기초로 생산되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법의 정비, 아니 '법의 혁명'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중세 해석자 혁명이다.
이것은 루터나 무함마드와 달리 전혀 극적이지 않다.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가 밤낮으로 홀로 책장을 넘기고 사전을 찾고 판례를 조사하여 법문을 고쳐 씁니다. 정말 수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수수한 작업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이어지는 작업 자체가 바로 혁명입니다. ..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안출된 가장 중요한 제도적 의제가 있습니다. '단체'입니다. '회사, 법인'이나 ;조합, 협회'입니다. "(212p)
그러니 문학은 단순히 문학작품으로서의 문학이 아닌 우리의 언어로 만들어나가는 세상에 대한 준거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다시 쓰는 것이 필요하다. 읽어버린 이상 다시 읽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된 이상 다시 쓸 수밖에 없다. 나의 인생의 준거를 내가 써야 하기 때문이다.
#3. 언어가 가능성을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말을 하면 이루어진다.""끌어당김의 법칙"과 같은 개인의 기복신앙이나 바람과 같은 좁은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고, 텍스트를 새로 쓴다는 건, 그 가능성에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잇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5000년박에 안 되었다는 사시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스빈다. 문맹이라느 것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 정도는 쓸 수 있다거나 표지 정도는 읽을 수 있는 등 여러 수준의 문맹이 있습니다.그러나 그 90퍼센트는 '완전한' 문맹입니다. 사인을 할 수 없으니 x표를 해두는 사니의 이름도 쓸 수 없는 완전한 문맹입니다."(260)
"1850년대 잉글랜드는 가장 선진국이었습니다. 성인 문맹률은 30퍼센트였습니다. 1850년이라고 하면 디킨스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룰 출판한 해이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떨까요? 40~45%였습니다. 스탕달의 <파르므의 수도원>이 1939년, 프롤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1857년, 보들레르의 <악의 꽃> 초판도 1857년에 나왓습니다. 에스파냐의 문맹률은 75%였습니다. 정말 우리의 세르반테스는 뭘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274)
"좀 더 근사한 것은 러시아입니다. 1850년, 러시아제국의 문맹률운 90퍼세트였습니다. 완전 문맹의 데이터입닏. 도스토옙스키가 1846년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톨스토이가 1852년에 <유년시대>를 냅닏니다... 제국의 인구는 4000만명이었습니다. 대충 양보하여 10퍼센트인 400마념ㅇ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수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274)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면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76p)
그렇다면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패배했을까요? 진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스물여섯살 때 병에 걸려 대학을 그만두었고, 책을 냈으나 바그너 일파로부터 중상을 받아 전혀 팔리지 않고, 알려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고, 보상받지도 못하고, 그리고끝내 발광하여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유폐된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자신의 명성이 올라간 것도 알지 못한 채, 그게 패배인 걸깡? 암것도 되지 못한 걸까요? 모든 게 쓸데없는 것이었을까요? 이것이니체 자신이 말한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것입니다."(298p)
나는 언제나 이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부터, 작가의 마지막 문장처럼 환희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텍스트가 장악하는, 무엇이 어떻게 만들어갈지 모르지만 가능성만으로 가득찬 언어라는 세상 속으로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항상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가슴 벅차도록 고맙고 감사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옳은 일,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거였다. 나의 에고가 간절히 원하고 원하던 말을 이 책이 다 해주고 있었기에.
이제 나는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는다. 이 책을 열렬히 환호하던 그 모든 순간 또한 내가 옳다는 맞다는 자아의 외침에 끌린 것 뿐임을 이제는 안다. 그 에고를 내려놓는다. 그 자기만족과 자기 신념을 내려놓는다. 이 말은 이걸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호불호의 자기만족을 내려놓고, 이 책에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 혁명으로서 텍스트의 가능성을 더욱더 한껏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과거에서 오는 삶을 내려놓고 새로운 텍스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언어를 고쳐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 이제 내가 만들어갈, 내가 새롭게 고쳐 쓸 나의 인생 속으로, 나의 언어 속으로. 그것이 이 책을 덮을 때마다 항상 느끼던 환희와 설렘의 이유였고, 그것이 혁명의 향기였다. 이것이 나의 미래의 문헌학이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 P36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어리석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글쎄요. 이 책도 바라건대 무지와 어리석음의 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지요. - P45
반복합니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바꿔 읽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꿔 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P87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잇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5000년박에 안 되었다는 사시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스빈다. 문맹이라느 것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 정도는 쓸 수 있다거나 표지 정도는 읽을 수 있는 등 여러 수준의 문맹이 있습니다.그러나 그 90퍼센트는 ‘완전한‘ 문맹입니다. 사인을 할 수 없으니 x표를 해두는 사니의 이름도 쓸 수 없는 완전한 문맹입니다 - P260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면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P276
그렇다면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패배했을까요? 진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스물여섯살 때 병에 걸려 대학을 그만두었고, 책을 냈으나 바그너 일파로부터 중상을 받아 전혀 팔리지 않고, 알려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고, 보상받지도 못하고, 그리고끝내 발광하여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유폐된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자신의 명성이 올라간 것도 알지 못한 채, 그게 패배인 걸깡? 암것도 되지 못한 걸까요? 모든 게 쓸데없는 것이었을까요? 이것이니체 자신이 말한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것입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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