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나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말하고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연구한다. 인문학자가 잘못한  건 없다. 인문학은 그런 학문이다. 과학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인문학에는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가르는 분명하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매우 그럴법하거나 그럴 것 같기도 한 주장과, 별로 그렇듯하지 않거나 아주 말이 안 되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럴법한 견해끼리 충돌하면 승패를 가리지 못한다. 어느 쪽도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인문학에는 과학과 달리 영원한 진리가 없다. 한때 진리로 통하는 이론도 100년을 견디지 못한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이 다 그랬다. (28p)



<유시민의 과학공부>를 흥미롭게 읽었다. 쉽고 재미있었으며 무엇보다 인문학자/ 과학자라는 틀을 통해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을 흥미롭게 대비시킨다. 몇 년의 나만 하더라도 이런 식의 대명사로서의 '인문학자', '과학자'를 내세워 그들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글들을 읽는 게 너무 괴로웠었다. 



읽는 내내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과학자'혹은 '인문학자'라는 집단 혹은 사람이 무엇인데? 누구를 말하는데? 그것이 실체가 있기는 한 것인가? 통계론적 수치로서의 평균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또한 당신이 편의상 혹은 자기 글의 맥락을 위해 그저 두루뭉실하게 퉁쳐버린 가상의 집단 아닌가? 그런 가상의 통친 집단을 이미 있는 집단인양 기정사실화해 논리를 전개해나간다는 것 자체가 모래 위에 쌓인 성 아닌가?"


 이런 생각들 때문에 글을 집중해서 읽어나갈 수가 없었고, 그런 구분 자체가 너무 폭력적일 정도로 거칠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야 알았다. 그가 말하는 인문학자는 바로 자신이었음을, 그리고 과학자/인문학자의 나눔은 현실을 방법론의 차이이고, 질문 방식의 차이였음을 말이다.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인문학은 '왜'와 '무엇을'을 묻는다.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인간은 왜 신을 창조했는가? 살의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욕망을 채우고 싶어서다. 그러다면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믿는 자에게 진리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망상이며 권력자에게는 유용한 통치도구다. 문과는 보통 이런 식으로 묻고 답한다. 

사회생물학의 질문은 인간과 다르다. '어떤 적응의 이익이 있기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군집에서 종교행위가 진화했는가?" 신의 숫자와 이름과 교리는 다르지만 모든 종교에 종교가 있었고 지금도 있다. 초월적 존재를 믿고 종교 공동체에 속하려는 성향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보편적 특성으로 인정할 수 있다. 다윈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행위 양식이 인간 사회에서 진화한 것은 '적응의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적응의 이익'은 생존과 번식에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를 가리킨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도바 더 잘 생존했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종교 자체가 '적응의 이익'이 있는 게 아니라 '적응의 이익'을 제공하는 다른 요소가 종교라는 형식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다른 요소는 무엇이며 왜 하필 종교라는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했는가? (131)


그러니 이 책은 이과와 문과의 학문적 방법론의 차이를 다룬 책이자, 30년 동안 문과만 공부한 한 남자가 과학을 공부하며 인간과 생명과 자연과 우주를 대하는 태도를 알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학문의 방법론은 단순히 학문이라는 좁은 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세사응 ㄹ어떻게 바라보고 설명하느냐, 나아가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 문제까지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유시민이 안내하는 과학지식은, 과학을 차갑고 냉정한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세상과 사물을 알아가고자 하는 연구자의 뜨거운 집념의 열정의 산물로서 느껴지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유시민의 지적 여정과 깨달음을 함께하는 즐거움+과학자의 사고와 질문법을 알게 됨*세상을 과학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세 겹의 즐거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과학은 스스로 발전했고, 인문학은 과학을 껴안으면서 전진했다. 인문학은 과학의 사실을 즉각 받아들여 활용하기도 하지만 완강하게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은 인문학보다 힘이 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물질의 증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잇게 되엇다. 인문학에 가장 크고 깊고 넓은 변화를 가져다준 과학적 발견은 무엇이었을까? 누구에게 가장 큰 감사패를 주어야 할까?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을 공동 수상자로 추천한다. 두 사람은 '우리 집과 우리 엄마'의 진실을 밝혔대.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32/~33)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질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다. 그러나 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다른 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를 '철학적 자아'라고 하자.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반 명제로 확장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47)



세상은 사실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까,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도 이야기, 나를 괴롭게 하는 것도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했는데, 자기만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마치 실체인양 말하는 것도 강요 강조하는 것도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나는 좀더 담백하게 살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를 투명하게 보면서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이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인문학자들은 오랜 세월 인간 본성을 두고 논쟁했지만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논쟁을 종결하려면 사실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인문학자는 하지 못했던 그 일을 신경과학자들이 해냈다. ..


'거울신경세포'라는 멋진 이름을 얻은 그 세포는 세상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마음을 읽는 세포'라거나 '문명을 만드는 뉴런'이라고 명예로운 별명도 생겼다.거울신경세포는 대뇌피질을 비롯한 뇌의 여러 부위에 분포해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는 행위를 조장하거나 억제하는 등 여러 일을 한다. 또한 공감과 도덕적 동기 유발의 기초를 제공하며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염려하고 덜어주는 행위를 장려한다. 


맹자는 사람한테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남을 도우려 하는 생물학적 본성이 있다고 봤다. 그것을 측은지심이라 했고 거기에서 인이라는 가장 중요한 미덕이 나온다고 판단했다. 오로지 관찰과 추론으로 구축한 이론이었다. 거울신경 '세포'면 어떻고 거울신경 시스템'이면 또 어떤가. 우리 뇌에 이기적 행동뿐만 아니라 이타적 행위도 하게 만드는 본성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공부를 하니 맹자가 더 대단해보인다. 뛰어난 인문학자는 물질의 증거 없이도 옳은 인식에 다가선다. 때로는 과학자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다. (88)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의 많은 선택들에 의한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것들의 실수, 성공, 행복, 슬픔, 내 한계와 내 가능성까지 모두 아는 상태에서 내가 아는 최선의 것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통제강박이자 부질없는 욕망이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 한계를 깨달음은 역설적이게도 한계 안에서의 새로운 자유를 준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가하지 않은가? 내 뇌는 매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로게 다양한 견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3장에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고 말했다. 엔트로피 법칙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우리들 각자는 '질서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어떤 사람과 배열이 똑같은 원자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이러한 저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 갈 작정이다. 존재으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도덕과 규범을 세우는 작업을, 누구에게도 '앙웃소싱'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한다. (253)



나는 내 자신을 무한정 믿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대뇌피질의 신경세포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드는 때가 올 것이다. ... 나는 욕심많고 인색하고 어리석고 보수적인 노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내가 하는, 더 젊은 내가 했떤, 모든 말과 행동을 부정하는 언행을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뇌의 하드웨어 퇴화로 인해 벌어진 신경생리학적 사건으로 여겨 주기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말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동정해 주기를 바란다. 내 자아가 오늘의 상태를 유지하는 한,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지로 그런 변화를 선택하지는 않을 테니까.



다시 강조한다.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지진으로 흔들리는 땅 위에서 폭풍우를 맞으며 서 있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퇴락해 사라질 운명이다. 자유의지는 그 곳에 기거한다. 있다고 말하기엔 약하고 없다고 하기엔 귀하다. 그래서 나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확언하지 못하겠다. 뇌과학을 조금 알고 나니, 나를 포함해 어떤 인간도 무한 신뢰하거나 무한 불신하지 않게 되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엔 흉하고 절멸하기에는 아깝다. 그 운명이 어찌 될지 나는 알지 못하고 책임질 수도 없다. 단지 나 자신의 삶 하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애쓸 따름이다. 악과 누추함을 되도록 멀리하고 선과 아름다움에 다가서려 노력하면서. 내게 남은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자. 이것이 내가 뇌과학에서 얻은 인문학적 결론이다. (.101)


그는 이렇게 과학을 공부하며 조금더 겸손해졌고, 한계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그안에서 더 지혜롭게 되엇다. 그리고 조금더 멋있어졌다. 나도 이랬으면 좋겟다. 한계를 알고 담담히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 이것이 유시민 작가의 책에서 배운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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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통찰을 준 부분이 많아서 아까워서 기억하기 위해 필사한다. 


물리학과 화학이 없으면 천문학과 생물학은 존립하기 어렵다. 윌슨은 인문학이 다윈주의를 거부하면 학문 자격이 없다고 말한 셈이다. '생물학 패권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질만했다. 윌슨은 실제로 공공장소에 욕설을 듣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인간은 분명 유전적 우연과 환경적 필연이 작용한 자연선택의 산물이고, 문명은 우리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본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힘으로 본능을 어느 정도는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본성 그 자체를 역사의 시간에 바꾸지는 못한다. 한 종의 본성이 달라지는 데는 역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진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윤리학자 싱어는 인문학자들에게, 특히 다윈주의를 오해하고 배척하는 좌파에게 사회생물학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삶의 영역을 문화에 따라 크게 다른 것(경제구조, 정부형태), 조금 다른 것(결혼주의, 인종주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사회적 위계)으로 나누고,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경향성에 근거를 둔 개혁 정책을 추진하라고 충고했다 인간 본성과 마찰을 덜 일으키는 과제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앞에서 나는 다윈주의와 관련해 우파와 좌파 모두 오류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우파는 진화라는 사실을 도덕으로 만들었다. 사실은 도덕이 아니다. 자연에 존재한다고 해서 다 아름답고 좋은 건 아니다. 생물은 어디서나 생존경쟁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존경쟁이 아름답거나 고귀하다고 하는 건 어리석다. 반면 좌파는 도덕에 반한다는 이유로 사실을 무시했따. 자연선태고가 진화는 특정한 방향이 없다. 인간도 생존과 번식을 위해 결쟁하며 인간에게도 보편적인 생물학적 본성이 있다. 좌파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사회를 재족했다가 대형 참극을 저질렀다. 

마르크스는 이기심, 소유욕, 지배욕을 포함해 계급 착취와 대립을 일으키는 모든 종류의 의식을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한 경제적 토대의 산물로 규정했다. 인간을 그렇게 이해하면 폭력혁명과 계급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계급 착취를 폐지할면 사유재산 제도에 근거를 둔 사회구조를 변혁해야 하는데 지배계급이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 없다. 부즈주아지(유산계급)은 국가 폭력을 동원해 혁명을 탄압한다. 혁명을 성취하려면 부르주아지의 국가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해야 한다. 그런 폭력을 확볼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을 조직하느 ㄴ수밖에 없다. (134)




다윈주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틀렸다. 다윈주의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꿈을 이룰 수 잇는 종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윈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물론 철학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겉으로는 진화론을 인정했지만, 인간 심리와 행동에 자연선택이 만든 생물학적 기초가 있다는 명제를 부정했다.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을 호모 사핑네스의 보편적 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보았다. 사회적 관계를 바꾸면 본성도 달라진다고 믿었다. 공산주의자는 '올바른 사상'을 지녔기 때문에 권력을 잡아도 오직 인민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꿈에 홀려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마르크스 추종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권력자보다 무자비하고 집요하게 권력을 탐했다.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으면서 권력을 독점했다. (..) 다윈주의자인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잘못 본 데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ㅅ회제도는 변하기 어려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충돌하면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사유 재산을 폐지한 게 대표적이다. 그게 도덕적으로 나쁜 정책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한 사회체제는 장기 존속할 수 없다는 말이다. (136)



인간은 적응의 이익을 생각한다. '성실'과 '태만 "결과적으로 '태만'이소련이라는 인간 군집의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되었다. '성실'과 '태만'이 공존하는 '쌍안정 시스템' 이라도 되었다면 체제가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련의 권력자들은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다. 인간 심리와 행동의 밑바닥에 생물학적 제약조건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기심가 가족에 대한 집착 같은 성향은 사적 소유를 통대로 한 계급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바꾸고 교육을 실시하면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국민 대다수가 '태만'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 사회는 혁신과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소련은 미국이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싸우다 졌다. (142~143)



'자등명 법등명' 석가모니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법(진리)을 등불로 삼는 것은 관습과 미신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산다는 뜻이다. 세상에 끌려다니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ㅇ로 살라 했으니 석가모니는 분명 깨달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무신론자이고 유물론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석가모니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문장이라고들 한다. 기계벅으로 옮기면 간단하다. '색과 공은 같다.' 문제는 '색'과 '공'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불교 철학자들은 '현상과 실체', '존재와 변화', '물질과 마음''존재와 무''물질과 에너지'등 갖가지 해석을 제시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리를 담고 있다는 증거도 없다.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게 당연하다. 이 문장을 양자역학과 연결하려면 '색'과 '공'을 '존재'와 '무'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238







"칸트는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칸트만 그런 게 아니다. 어떤 천재도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한다. 칸트의 인식론은 불가지론이다. 사물이 우리의 주관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얼 알고 무얼 모르는지 알았다. ..스무 살에 카느의 인식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지금은 아는 것처럼 말한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뇌과학과 양자역학을 얻어들었다. ‘배웠다‘고 하기에는 변변치 않아서 ‘얻어들었다‘고 햇다. 칸트의 인식론은 칸트의 언어로는 해설하기 어렵다. 연구자들의 해설서가 원저 못지않게 난해한 것은 칸트의 언어에 갇혔기 때문이다. 천재의 이론을 해석하려면 그의 시대에 없었던 정보와 지식을 동원해야 하고 그의 것과는 다른 언어를 가져와야 한다. (71p)

- P71

"과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고 느꼇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 짚어 보았다. 인문학의 가치와 한계를 생각하게 되엇다는 것이다.본문에서 누차 말했지만 과학에는 옳은 견해와 틀린 견해, 올은지 틀린지 아직 모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는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그게 인문학의 가치이고 한계다.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학,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 - P292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나는 러셀의 말에 공감한다. 신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서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 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느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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