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연휴에 꽤 많은 책을 읽었는데 차례대로 <불안 세대><부서지는 아이들> <편안함의 습격> <경험의 멸종><도둑맞은 집중력>. 이 책들은 작년과 올해를 휩쓴 인문교양서들인데 신기하게도 모두 같은 세계관 위에서 쓰여졌 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그리고 심리학의 일상화와 과잉 정서 진단,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에 회오리처럼 빨려들어간 우리의 진짜 모습,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들 말이다.



이 책들은 묻는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고. 그렇게 편리하고 재미있게 가짜 결핍 속에 사는 동안 우리의 우울증과 불안증은 높아졌고, 아이들은 자신을 깨지기 쉬운 존재처럼 여기고, 불편함과 지루함을 못 견디게 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잊어버리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 가장 큰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의 삶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지금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이 책들을 읽으며 줄을 죽죽 그으며 그래, 맞아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편안함의 습격>을 읽는 내내 내가 이러고 있는 거다. 도대체 순록은 언제 잡는다는 말이야?!



<편안함의 습격>은 주제면에서는 위에서 나열한 책들과 비슷하지만 글쓰는 방식에서는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과 비슷했다. 빌 브라이슨이 지금 시대에 알래스카 오지 순록 사냥을 떠난다면 바로 이런 책을 쓰지 않을까? 빌 브라이슨만큼 정신없으면서도 본인의 알콜 중독 이야기부터 시작해 우울증, 불안, 자살, 비만, 번아웃, 지루함, 운반본능까지 다양한 이야기거리들을 맛깔나게 풀어내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작 나는 ‘그래서 순록은 언제 잡는거야?’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책을 다 읽고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이 편안함의 습격에서 이야기하는, 편안함과 효율과 멸균에 푹 파묻혀 기다림과 지루함을 미친 듯이 못 견뎌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다못해 책에서 순록을 잡으러 떠났으면 순록을 잡아야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불과 10~20년 전 빌 브라이슨의 다양한 기행기를 보면서 킥킥댔던 내가 말이다. 세월은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는단 말인가. 아님 내 안에 있는 통제강박과 극강의 효율추구가 시대와 더불어 더 강화되고 빛나게 발현된 것일지도.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몇 십년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이 모든 책들에서 결국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경험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자신을 깨어지기 쉬운 존재로 여긴다면 인간의 고통은 왜 필요한가? 우리의 상처와 번뇌와 깊은 슬픔이 그저 정신과의 하나의 병명일 뿐이라면 그 심연을 지나온 후의 성숙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손해보기 싫어하는 세상에서 기꺼이 사랑하고 상처받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저 호구인 것일까? 터치 몇 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한 듯 느껴지는 지금 우리에게 진짜 경험이라는 것이, 진짜 몸으로 경험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왜 요즘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에 빠져있는지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원시적 감각, 그냥 몸뚱이 하나로 지면을 박차면서 느껴지는 터질듯한 심장박동, 후둑 떨어지는 땀, 손끝의 저릿함, 그 원시적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관계도 사라지고, 경험도 사라지고, 불편함과 지루함도 사라지는 이 시대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 몸의 경험. 그 자체가 아닐까.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몰입의 시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까 싶다. 나도 달리기나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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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18살인 우리 아들은 아이폰의 탄생과 함께 태어났다. 나는 아들이 1살 때부터 아이폰을 사용했는데 내 핸드폰을 가져가려는 아들에게 못 이기는 척 뺏긴 적이 많았다. 식당에서는 적극적으로 핸드폰을 보여준 적도 많고, 나아가 놀이공원 같이 꽤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때는 아이의 시선을 일부러 핸드폰에 가둬두려고 노력한 적도 많았다


아이가 3살 정도 되어 tv 화면에 다가가 두 손으로 확대하려고 시도하거나 손글씨를 쓰는데 꽤 오랫동안 애를 먹은것도 어찌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이 아이들이 십대가 되었고, 이 아이들은 기존의 현실 세계의 상호 작용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에서 성장한 셈이 되었다. 조너선 하이트는 이 새로운 십대의 출현을 화성에서 성장하는 첫 세대가 된 것과 비슷한 세대의 출현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이 바로 불안사회를 만든 아동기 대재편이다.

 

아동기 대재편의 배경은 이렇다. 첫째, 아동의 일상과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술, 즉 스마트폰의 발전이 있었다. 두 번재 아이를 과잉보고하고 현실에세계에서 아이의 자율성을 제약하려는 추세(이것은 어제 내가 읽은 <부서지는 아이들>에 나오는 바로 그 추세이다.) 기존의 아동기가 놀이 기반이었다면 이제 스마트폰 기반으로 명백하게 달라진 것이다


이 명백하게 달라진 아동기의 결과는 이와 같다. 십대 우울증이 2.5배 증가했고 여자 청소년 자살율이 167% 증가했으며, 이제 아이들은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에서 살며 사회적으로 박탈되었고, 수면 박탈로 인한 건강 악화와 주의력 분산, 그리고 중독 문제가 심해졌다, 아이들은 현실 세계에 발 딪지 못하고 화면에 빠져 살면서 점점 불안과 우울 속에 허우적대며 취약해지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변화인가?

 

어제 읽은 <부서지는 아이들>과 이 책을 보며 정말 이제 우리 아이들은 다른 세대가 되었구나 실감했다. 전에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엄청나게 히트하면서 mz세대의 등장을 알렸는데 이제 내추럴 본 디지털로 무장한 불안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건강하거나 행복해보이질 않는다. 내가 좀더 간편하기 위해 아이 손에 쥐어주었던 스마트폰, 잠깐의 만족을 위해 무신경하게 보냈던 날들이 후회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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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몇 달전 나에게 ADHD검사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자기가 너무 산만하고 정신 없고 무언가를 자주 까먹는 것 

같다고. 그럼 산만하고 정신없고 자주 까먹는 행동을 바꾸기 위한 무언가의 행동을 해본적이 있냐고 물어보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 행동을 바꿔보자고 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주변 친구들은 다 하나씩 문제가 있는데...” 


다 하나씩 문제가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트라우마가 없는 친구가 없다고 했다. 한 명은 은따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증, 한명은 전학 트라우마로 인한 우울증, 한 명은 선생님에게 정서적 학대를 당했고, 자기는 수줍음이 많고 사회성이 많은 사회불안장애인데, 거기에 내향적 ADHD인 것 같다고 한다.

우리 딸은 중2이다. 딸은 사춘기 특유의 아이답게 다 하나씩 문제가 있는 아이들 틈에서 자신의 문제거리를 찾고 있었다. 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따를 당한 적이 있으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할 거다. 전학을 가면 적응하기 전에 좀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수줍음이 많은 것은 장애가 아니며, 산만하고 정신없고 무언가를 자주 까먹는 것은 네가 덤벙거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지 ADHD라는 병명과 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딸은 무언가 서운한(?) 눈치였는데, 오늘 <부서지는 아이들> 책을 보면서 딸과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이것이 그냥 우리 딸만의 중2병스러운 대사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책은 심리상담이 일반화되고, 다정한 양육이 대세가 되면서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불안이 증폭되고, 정신 건강 산업이 블루 오션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네 기분에 집중해볼까?”“너의 최종 목표는 행복이야”“네가 불편하다면 없애줄게.” 이런 말들이 우리 아이를 부서지기 쉽고 안전한 상자 속에 가둬있어야 하는 약한 아이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다정한 양육이 일반화되면서 아이들은 의지할 수 있는 부모를 잃었고, 부모들은 권위를 잃었다. 더불어 양육의 기쁨까지. 아이들은 아이라는 이유로 권리 의식에 빠졌고 부모의 권위와 책임은 외주화되었다. 부모들은 더 이상 아이들을 훈육하지 않고 온갖 상담치료실과 소아정신과를 돌면서 병명을 모으고 약을 먹이고 아이들을 더 약한 존재로 키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 책에서는 허용적인 부모도, 권위적인 부모도 아닌, 권위있는 부모가 될 것을 주문한다. 권위있는 부모는 사랑과 규칙을 양육의 토대로 삼는다. 합리적 방식으로 자녀의 활동을 지도하고 대화를 통해 자녀와 의견을 교환하지만 ”부모와 자녀의 의견이 크게 다를 때는 확실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부모다.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고 규칙을 가르침으로써 말이다.


다정한 양육을 하고자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말을 예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육아서를 읽고 낮에는 화내고 밤에는 울면서 반성하면서 어떻게든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던 1인으로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들이 송두리째 아이를 약하게 만들었나 생각도 들면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 아무리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이건 아닌데,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가 지금 처참하게 부서지는 아이들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우리 시대는 권위적인 부모 아래에서 울고 싶어도 화내고 싶어도 할 말을 꾹 삼키고 함구하며 살았다. 어쩌면 나는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을 아이를 키우면서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방법을 잘 몰랐던 것일지도, 우리 부모 또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방법을 잘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정과 반을 지나 이제 합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양육은 어때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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