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몇 달전 나에게 ADHD검사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자기가 너무 산만하고 정신 없고 무언가를 자주 까먹는 것 

같다고. 그럼 산만하고 정신없고 자주 까먹는 행동을 바꾸기 위한 무언가의 행동을 해본적이 있냐고 물어보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 행동을 바꿔보자고 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주변 친구들은 다 하나씩 문제가 있는데...” 


다 하나씩 문제가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트라우마가 없는 친구가 없다고 했다. 한 명은 은따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증, 한명은 전학 트라우마로 인한 우울증, 한 명은 선생님에게 정서적 학대를 당했고, 자기는 수줍음이 많고 사회성이 많은 사회불안장애인데, 거기에 내향적 ADHD인 것 같다고 한다.

우리 딸은 중2이다. 딸은 사춘기 특유의 아이답게 다 하나씩 문제가 있는 아이들 틈에서 자신의 문제거리를 찾고 있었다. 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따를 당한 적이 있으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할 거다. 전학을 가면 적응하기 전에 좀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수줍음이 많은 것은 장애가 아니며, 산만하고 정신없고 무언가를 자주 까먹는 것은 네가 덤벙거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지 ADHD라는 병명과 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딸은 무언가 서운한(?) 눈치였는데, 오늘 <부서지는 아이들> 책을 보면서 딸과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이것이 그냥 우리 딸만의 중2병스러운 대사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책은 심리상담이 일반화되고, 다정한 양육이 대세가 되면서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불안이 증폭되고, 정신 건강 산업이 블루 오션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네 기분에 집중해볼까?”“너의 최종 목표는 행복이야”“네가 불편하다면 없애줄게.” 이런 말들이 우리 아이를 부서지기 쉽고 안전한 상자 속에 가둬있어야 하는 약한 아이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다정한 양육이 일반화되면서 아이들은 의지할 수 있는 부모를 잃었고, 부모들은 권위를 잃었다. 더불어 양육의 기쁨까지. 아이들은 아이라는 이유로 권리 의식에 빠졌고 부모의 권위와 책임은 외주화되었다. 부모들은 더 이상 아이들을 훈육하지 않고 온갖 상담치료실과 소아정신과를 돌면서 병명을 모으고 약을 먹이고 아이들을 더 약한 존재로 키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 책에서는 허용적인 부모도, 권위적인 부모도 아닌, 권위있는 부모가 될 것을 주문한다. 권위있는 부모는 사랑과 규칙을 양육의 토대로 삼는다. 합리적 방식으로 자녀의 활동을 지도하고 대화를 통해 자녀와 의견을 교환하지만 ”부모와 자녀의 의견이 크게 다를 때는 확실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부모다.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고 규칙을 가르침으로써 말이다.


다정한 양육을 하고자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말을 예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육아서를 읽고 낮에는 화내고 밤에는 울면서 반성하면서 어떻게든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던 1인으로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들이 송두리째 아이를 약하게 만들었나 생각도 들면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 아무리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이건 아닌데,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가 지금 처참하게 부서지는 아이들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우리 시대는 권위적인 부모 아래에서 울고 싶어도 화내고 싶어도 할 말을 꾹 삼키고 함구하며 살았다. 어쩌면 나는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을 아이를 키우면서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방법을 잘 몰랐던 것일지도, 우리 부모 또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방법을 잘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정과 반을 지나 이제 합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양육은 어때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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