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하여 - 박상영 연작소설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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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이 드디어 자신과 닮지 않은 남주를 만들어냈다, 《믿음에 대하여》의 가장 큰 성취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었다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을 여러 개로 쪼개 남주들에 흩뿌린 것에 가깝기는 하다. 첫 직장이었던 잡지사 이야기(이젠 그만 보고 싶지만, 어지간히 힘들었나 봄)나 열렬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처럼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나 그동안 여러 번 소설에 사용했던 테마들도 여전히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알려지지 못한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대도시의 사랑법》, 《일차원이 되고 싶어》와 다른 점은 뒤가 아닌 앞을 본다는 것. 그동안의 소설들은 작가의 10대와 20대를 '털고 가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지금'과 '앞으로'를 이야기한다. 종종 방문하는 문학 전문 블로그에선 이 소설이 박상영 특유의 유머가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지만, 오히려 난 그 점이 좋았다. 이제 옛 추억을 떠올리며 농담하는 이야긴 끝이다, 라는 결기가 느껴졌달까. 애당초 코로나 팬데믹을 정면으로 관통하는 소설인 만큼 웃기는 이야기는 좀 어렵기도 하고.

다만 이야기를 너무 갈고 닦은 탓인지 마지막 단편인 <믿음에 대하여>는 좀 작위적인 티가 났고, 특히 결말은 아주 뜬금없었던 데다 유교보이로서 용납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책을 덮은 뒤에됴 계속해서 강렬한 이미지로 떠오르는걸 보면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던 듯. "믿음에 대하여"라는 제목과도 아주 잘 어울리고.

《대도시의 사랑법》이 영어로 번역되고 부커상 후보에도 올랐던 덕인지 이번 책은 아예 해외 출간을 염두하고 주제나 문장을 고심한 티가 났다. 별 상관도 없어 보이는 단편들을 모아놓고 연작이라 우기는 소설이 적지 않은 요즘, 작가가 A의 눈으로 B를 보고 B의 눈으로 A를 보는 연작소설만의 재미를 제대로 살린 점도 좋았다. 박상영 작가의 모든 작품이 그랬듯, 이번 소설도 가장 매력적인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다. 친구 말처럼 여성 등장인물을 가장 기깔나게 그려내는 남성 작가. 다음 작품은 아예 여성이 주인공이어도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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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별한 당신 - 오랫동안 자기답게 살아온 사람들
김종철 지음 / 사이드웨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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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종철 선배의 인터뷰가 제일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3, 한창 한겨레21창간특집 인터뷰를 준비할 때였다. 그간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혹은 과제를 위한 인터뷰는 여러 번 해봤어도 이런 공식적이고도 중요한 지면에 글을 싣는 건 처음이었다. 준비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무엇보다 어찌어찌 인터뷰를 마친들 이걸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 너무나 막막했다. 혼자 속만 끓이느니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는 게 좋겠다싶어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담당자, 구둘래 기자님께 카톡을 보냈다. 언제나처럼 짧고 굵게, 딱 한 줄로 답장이 왔다. “김종철 선배의 인터뷰를 참고하라는 것이었다.

 

지난달을 끝으로 한겨레를 정년퇴임한 김종철의 인터뷰는 따뜻하고 웅숭깊은 내용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고 변희수 하사나 독립연구자 정태인 인터뷰는 SNS에서 많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런 김종철의 인터뷰를 배운다고 따라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뭐라도 붙잡고 싶은 절박함에 정태인 인터뷰를 한글파일로 인쇄해 밑줄까지 쳐가며 공부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의 강명관 인터뷰는 인터뷰어의 에고가 덕지덕지 묻어난, ‘인터뷰라기보다는 비평에 가까운 글이 되어버렸다.

 

이번에 나온 김종철의 인터뷰 모음집 각별한 당신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종철의 인터뷰는 결코 모범이 될 수 없다. 그를 제외하곤 누구도 이런 인터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종철은 스스로를 완전히 내려놓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독특한,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방식으로 타인을 읽어낸다. 아니, 어쩌면 읽어낸다는 표현조차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김종철의 인터뷰는 읽음보다는 받아들임의 과정이며, 그렇기에 결코 읽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경이감과 복잡함을 동시에 안긴다.

 

(야매) 글쟁이로서 내가 가진 강점은 소위 야마를 잘 잡는다는 것이다. 글이든 사람이든 가만히 읽거나 듣다보면 이게 어떤 이야긴지 대충 감이 온다. 이렇게 잡은 야마를 얼개로 본문을 해체-재구성해 날렵하고 요령 있게 정리하는 것. 문장이 유려하지도, 어휘가 풍부하지도, 사유가 단단하지도 않은 내가 연재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많은 분들의 호의와 배려 덕분이겠지만) 바로 이 야마 잡는 능력 덕분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야마를 잡는게 아니라 야마에 잡힐때 일어난다. 미리 구상해둔 얼개에서 벗어나는 사실이나 발언이 튀어나오면 억지로 욱여넣으려 들거나, 아예 모른 척 넘어가버리기도 한다. 내가 잡은 야마에 내가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지난 번 강명관 인터뷰를 공유하며 딱딱 떨어지는 명쾌함보다는 복잡함과 머뭇거림을 더 많이 담고 싶었노라 적었지만, 이 복잡함과 머뭇거림조차 잘 짜인 기획의 산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던 건 그래서다. 기획된 애매함이라니, 그건 그냥 형용모순이 아닐까.

 

반면 김종철의 인터뷰엔 야마란 게 없다. 그는 그저 가만히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끔씩 정말로 궁금해 보이는 점만을 질문할 뿐이다. 인터뷰 어디에도 김종철의 에고가 드러난 대목은 찾을 수 없다. 기자 생활 34년에 한겨레에서 정치부장에 선임기자, 신문부문장까지 지낸 김종철이 야마를 잡을 줄 몰라서 안 잡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저 참은 것이다.

 

김종철이 야마를 못 잡은 게 아니라 안 잡았다는 건 그의 촘촘한 취재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겨레21전 편집장이자 현 콘텐츠총괄인 정은주에 따르면, 김종철은 역사학과 출신답게 (이 얘길 들었을 때 역사학도로서 정말 찔렸다!) 인터뷰를 준비할 때 인터뷰이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꼼꼼히 읽고 정리한다고 한다. 실제로 김종철은 56년 만에 부당한 판결의 재심을 신청한 최말자를 인터뷰하며 사건 발생 24년 뒤인 1988, 최말자와 같은 죄목으로 기소된 여성이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찾아낼 정도로 취재에 열심이다.

 

보통 이 정도로 촘촘하게 취재를 하면 인물에 대한 어떤 상()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연히 여기에 맞춰 인물을 그려내고픈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올 법도 한데, 김종철은 그러지 않는다. 대신 그는 묵묵히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듣는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김종철과 마주앉은 사람들은 모두 말이 많아진다.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애초에 수다스런 사람만 인터뷰어로 점찍었나 싶을 정도다. 물론 이는 되게 깊이 묻네요. 이렇게까지 심층적인 인터뷰는 처음 해봤어요.”(p.219.)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자세한 김종철의 질문 덕분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김종철은 꼼꼼히 읽고, 가만히 듣고, 깊이 물음으로써 한 인물을 통째로, 오롯이 전해준다. 그의 인터뷰를 읽다보면 정현종의 시 <방문객>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온다는 일의 어마어마함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인터뷰이도, 그리고 어쩌면 인터뷰어도 의도하지 않았을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고 변희수, 신순애, 이준원, 임현정, 강수돌, 최말자, 달시 파켓, 김수억, 이동현, 김정남, 정재민, 김선희, 김덕수, 심재명·이은, 조영학, 윤선애, 이병곤, 송경동, 홍순관, 정태인.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인생도 다 다르지만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기다움을 지켜온 스무 사람의 인터뷰가 각별하게 읽히는 건 그래서다.

 

누군가를 잘 읽어주고 싶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내가 가진 무수한 욕심들 중 그나마 덜 숭하고, 어쩌면 조금은 이로울 수도 있는 바람이다. 그런 내게 각별한 당신은 어쩌면 지금껏 야마를 이야기로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부끄러움을 안긴다. 다시 정현종의 시를 빌리자면, 환대란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을 바람처럼 더듬어보는 일이다. 그러한 환대로서의 인터뷰를 너무나 따뜻하게 보여준 이 책 앞에서 나는 과연 야마 없이 누군가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사람이 온다는 어마어마한 일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되물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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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논문을 대중서로 - 친절한 글쓰기를 위한 꿀팁 18가지
손영옥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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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그래서 박논은 언제 책으로 내시나요??”

 

좋아하는 선생님들을 뵐 때마다 이렇게 여쭙곤 한다. 훌륭한 연구들을 빨리 책으로 읽어보고 싶어서다. 물론 박논을 인쇄해 스프링제본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소위 읽는 맛이 살지 않는다. 그렇게 뽑아만 놓고 사물함에 쌓아둔 박논이 한 트럭이다. 게다가 박논은 역사책 달리기에 써먹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거칠고 딱딱한 논문이 아닌, 전문적인 편집을 거친 유려한 책을 원한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 제가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요...” 박사까지 따셨는데 공부가 부족하다면 대체 얼마나 더 공부해야 책을 낼 수 있는 것일까? 5? 10? 일단 책을 내셔야 연재에 써먹는데, 나는 10년 뒤에도 역사책 달리기를 연재할 수 있을까? 아니, 다 떠나서 과연 10년 뒤에 책이란 게 남아있을까? 연구자가 아닌 독자인지라 이런 속도 모르는 얘기를 꺼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결국 세상에 널리 읽히고 도움이 되라고 하는 연구일진대, 쉽게내주시면 안 될까?


손영옥의 내 논문을 대중서로는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다. 지은이는 문화전문기자이자 미술평론가로, 박사논문인 한국 근대 미술시장 형성사 연구(2015, 서울대)를 다듬어 미술시장의 탄생(2020, 푸른역사)을 퍼냈다. 기사와 논문, 평론은 물론 한 폭의 한국사(2012, 창비)처럼 청소년을 위한 교양서까지 쓴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책이 나온 푸른역사는 대중학술서란 말이 등장하기도 전에 이를 교양 독자에게 선보이며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역사출판계의 명가. 지은이의 패기와 출판사의 안목이 다시없을 책을 만들었다.

 

지은이는 미술시장의 탄생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려는 마음이 책을 쓴 동기가 되었노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이 책은 지은이가 박사논문을 대중학술서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뼈대로 삼고 있는 만큼, 읽다보면 감질나서라도 미술시장의 탄생을 한 권 사보고 싶어진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내 논문을 대중서로가 단순히 미술시장의 탄생의 홍보책자나 미끼상품만은 아니다. 전방위 글쟁이 손영옥이 아니라면 결코 들을 수 없었을, 유용하고 구체적인 꿀팁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은 시대다. 이들 예비 작가를 위한 글쓰기 교본은 이미 쌔고 쌨다. 비단 글 잘 쓰는 법이 아니라 서평, 동화,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형식과 내용에 맞는 교본을 골라잡을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시장은 포화 상태다. 그렇기에 이런 유의 책은 소위 예제풀이과정이 얼마나 상세한가에 성패가 판가름된다. 잘 팔리는 수학문제집도 다들 개념설명보다는 풍부한 문제와 자세한 해답을 기대하며 사보는 게 아니겠는가.

 

내 논문을 대중서로는 이 점에서 아주 독보적이다. 솔직히 손영옥이 제시하는 꿀팁은 그렇게까지 새롭지는 않다. 쉽게 쓰고, 스토리텔링으로 흥미를 돋우고, 편집자를 믿으면 된다. 대신 지은이는 풍부한 예제와 풀이를 통해 이 뻔한 과정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냈다. 앞서 이야기했듯 지은이가 박사논문을 대중학술서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이 이 책의 뼈대지만, 당연하게도 지은이는 자신의 책과 논문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최효찬의 일상의 공간과 미디어(연세대학교출판부, 2007)나 이성낙의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눌와, 2018), 송은영의 서울 탄생기(푸른역사, 2018)처럼 박사논문을 토대로 만든 다른 교양서도 적극 참고했다.

 

단순히 이런 책도 있다며 슬쩍 언급하고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다. 지은이는 자신의 책을 비롯해 참고자료로 사용한 모든 책들을 꼼꼼하게 해부한다. 목차를 비교하고, ‘꿀팁이 어떻게 반영됐는지 일일이 찾아 대조하는 등 박사논문과 교양서를 부지런히 오간다. 얼핏 봐도 품이 꽤 많이 들었을 것 같은 작업이다. 여기에 더해 문화전문기자로 일하며 겪거나 들은 수많은 에피소드가 군데군데 감초처럼 들어가 있다. 심지어 마지막엔 (이 역시 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겠지만) 한겨레이유진 기자와 이데일리오현주 기자의 『미술시장의 탄생서평까지 실었다. 논문, 학술서, 교양서, 기획서, 서평을 넘나드는 종합선물세트인 셈이다.

 

이러한 충실함은 책을 지은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방향으로도 읽게 해준다. ‘논문을 대중서로바꾸려는 연구자뿐 아니라 대중서를 논문으로바꾸려는 기자나 칼럼니스트에게도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단 한 번도 논문을 써본 적이 없는 내가 책을 읽으며 마음에 새긴 대목도 (지은이가 그런 얘기를 쓰진 않았지만) 칼럼이나 서평 쓰듯 논문을 쓰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흠모하는 고태우나 정일영처럼 유려하고 문학적인 논문을 쓰는 연구자도 있으나, 최소한 학술적인 글에 걸맞은 문장과 구성, 전개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꼭 글을 쓰려는 사람들뿐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단언컨대 읽기에 대한 가장 쉽고 훌륭한 교양서라 할 수 있는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서 김성우와 엄기호는 탑 쌓기가 아닌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를 이야기한다. 다양한 매체의 성격과 특징을 이해하고 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잘 읽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주로 영상과 활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다양한 활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이라고 다 같은 글이 아니다. 어떤 내용을,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구성과 전개는 물론, 문체와 예시까지 달라진다.

 

내 논문을 대중서로는 글이 가진 그러한 결을 이해하는 최고의 안내서다. 마치 빛을 분산시켜 여러 색으로 펼쳐내는 프리즘처럼, 이 책은 하나의 이야기가 장르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친절하고 자세하게 보여준다. 장르에 따른 글의 특성을 파악하고, 여기에 맞춤한 읽기를 연마해간다면 논문을 대중서로대중서를 논문으로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잘 쓰는 법에서 시작해 결국 잘 읽는 법으로 되돌아오며, 다시 잘 오가는 법으로 나아간다. 연구자와 작가, 독자와 편집자에 이르기까지, 글의 바다를 여행하는 모든 히치하이커를 위한 발랄한 가이드북이 지금 막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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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 - 지양으로서의 조선, 지향으로서의 동양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6
정준영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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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矛盾)이란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를 함께 팔 수 없듯이, 동시에 참이거나 거짓인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추상적인 논리학이 아닌 현실의 영역에선 창과 방패가 서로를 완전히 뚫거나 막지 못하고 어정쩡히 엉겨버린 경우도 왕왕 존재한다.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그런 관계였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가 아닌 내지의 연장이라 공언했으면서도, 제국이 패망할 때까지 조선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동화되어야 하지만 영원히 자신과는 같아질 수 없는 타자, 일본에게 조선은 그런 존재였다. 그 점에서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는 모순이라기보다 아포리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정준영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는 제국 일본이 조선이라는 아포리아를 어떻게 돌파해내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 야심찬 도전이 어떻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파고드는 역작이다. 역사사회학과 지식사회학을 연구하는 지은이의 관심사는 경성제대의 니혼징들이 착수한 조선 연구. 조선의 혼과 얼을 짓밟은, 소위 식민사학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지은이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꽤나 엄밀하고 실증적으로 조선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나름의 선의 역시 갖고 있었다고 선뜻 인정한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이들의 조선 연구는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식민의 복잡한 뒤엉킴, 그 속에서 조선학이 맞닥뜨린 난관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통사 쓰기

 

1915,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통사를 쓰겠다는 목표아래 의욕적으로 조선반도사편찬사업에 착수한다. 이들이 보기에 조선의 문제는 역사의 결여가 아니라 과잉에 있었다. 기록이랄 게 거의 없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와 달리 조선은 독서와 문장이 문명인에 뒤지지 않으며 고래의 사서와 신서도 많지만 그 중 태반이 망설이요, 낭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과잉의 민족인 조선을 다스리기 위해선 진짜와 가짜를 엄밀히 따져가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통사를 쓸 필요가 있다는 게 총독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야심차게 출발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으니, 무엇보다 통사라는 형식이 갖는 불온함때문이었다. 통사란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도도하게 이어져온 주체(그것이 민족이든 국가든)를 상정한 내러티브다. 식민지의 역사를 잘게 조각냄으로써 언제까지고 타자의 자리에 묶어두려는 제국의 기획과는 근본적으로 상충한다. 지은이가 지적하듯 식민지 독자들이 억압받고 저항하는 민족의 이야기로 통사를 오독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통사 편찬을 포기하자니, 조선인에게 조선의 역사를 완전히 넘겨버리는 꼴이었다.

 

이처럼 오도가도 못하던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의 구원투수로 나선 게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였다. 오다는 1908년 대한제국 학부 서기관을 시작으로 1924년 경성제대 교수에 임명되기 전까진 조선총독부에서 쭉 편집과장을 맡아왔던, 교과서 편찬에 잔뼈가 굵은 테크노크라트이자 학자와 관료의 경계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오다가 1910년대 후반부터 겸직의 형태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을 담당하게 되며,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통사라는 계륵을 포기하는 대신 사료 색인집 편찬이나 훈련받은 인재 양성, 학술지 창간 등 제도화를 위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1922년 오다의 주도로 결성한 조선사학회와 학회가 발행한 조선사강좌는 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통사 편찬에서 제도화로의 방향전환, 그러나 한계가 뚜렷한 것이었다. 일단 조선사학회에 실린 글들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데다, 그마저도 집필을 맡을 강사를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독점한다는 원대한 목표와는 달리, 학회가 발행한 글들은 보통문관시험을 준비하는 본토의 일본인들이 수험용으로 많이 찾았다. 애당초 본토 학계의 정비가 이미 완료되어 식민지 학계를 이끌어준 게 아니라, 본토 학계와 식민지 학계가 함께 제도화되는 과정에 있었던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결국 식민지에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동시에, 통사 얘기가 쏙 들어갈 정도로 획기적인 조선사 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매개로서의 조선

 

1926, 저명한 동양학자인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 1867~1939)가 경성제국대학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다. 실제로 재임한 기간보다도 내정자로 있었던 기간이 더 길었던 그가 조선총독부와의 갈등마저 불사하며 지켜내고자 했던 기치는 식민지 최초의 제국대학이 동양 문화의 권위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동양학계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10년대 고등교육기관이 활발하게 설립되는 가운데서도 동양학 관련 학과는 설치되지 않아 졸업생들이 마땅히 생계를 이어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1920년대 초반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기점으로 일본 학계의 서구 쏠림이 가속화돼 동양학과의 인기는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관심을 불러일으킬 새로운 자료가 좀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동양학의 침체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설립되는 새로운 제국대학은 일본 동양학계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갈 곳 없는 수많은 고학력 백수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조선을 자료의 보고로 이용할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손가락만 빨고 있는 후배와 제자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핫토리로서는 경성제대의 성공에 남은 인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핫토리는 신생 제국대학을 철저히 식민통치의 싱크탱크로만 여기던 조선총독부, 그리고 재정 축소의 압박과 싸워가며 경성제대를 본토의 여느 제국대학 못지않게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비록 1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핫토리는 총장으로 재임하며 강좌 수를 확보하고 똘똘한 후배와 제자들을 교수로 데려오는 등 자신의 의도를 거의 관철해냈다.

 

핫토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불러 모은 경성제대 교수진의 면면은 실로 화려했다. 일본 대외관계사 전공자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1897~1945)나 수·당대 불교사 전공의 오타니 가쓰마(大谷勝眞, 1885~1941), 발해사와 금사 전공자인 도리야마 기이치(島山喜一, 1887~1959) 등 일국사가 아닌 전 동양을 아우르는 관계사나 분야사 연구자들이 각 강좌에 포진했다.

 

백미는 핫토리의 본령인 지나(중국)철학 강좌였다. 지나철학 강좌의 초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논어연구에서 시작해 청대 고증학의 일본 수용에 관심을 둔 인물로,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한중 지식인의 문예교류에 주목했다. 자신의 연구대상이자 선배이기도 한 청과 조선의 고증학자들을 연상케 하는 고된 작업을 거쳐, 그는 일본 본토 동양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보적인 연구 분야를 개척했다. 홍대용에서 시작해 박제가를 거쳐 김정희에서 정점을 찍는 한중 문예교류의 계보는, 후지쓰카에게 자부심과 부러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특히 김정희는 그가 발굴해낸 자랑스런 연구 성과이자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선배이기도 했다. 청조 고증학의 중심에 우뚝 선 조선인을 재조명한 일본인 연구자. 조선을 매개로 중국과 일본이 이어지는, 실로 모범적인 동양학 연구였다.

 

후지쓰카의 뒤를 이어 1941년 지나철학 강좌를 계승한 아베 요시오(阿部吉雄, 1905~1978)도 전임자와 같은 길을 걸었다. 그는 일본의 정주학자 야마자키 안사이의 뿌리로서 조선의 퇴계 이황에 주목했다. 퇴계로부터 시작된 도학의 흐름을 야마자키 안사이가 계승했고, 이는 막말기 요코이 쇼난과 모토다 나가자네를 거쳐 마침내 천황이 발포한 교육칙어로 완결되었다는 것이다. 주자-퇴계-안사이-황도철학으로 뻗어나가는 계보를 설정함으로써 아베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했고, 그 가운데 조선을 위치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후지쓰카와 아베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였다. 조선이라는 매개는 자주 흔들렸고, ‘국사동양사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붕 떠있을 때가 많았다. 실제로 1930년대에 이르면 조선사편수회-청구학회-경성제대사학회를 꼭짓점 삼는 식민사학의 트라이앵글이 안착하며 조선학 연구가 만개했지만, 제국 전체를 놓고 보면 조선학의 비중은 결코 높지 않았다. 조선사가 국사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도, 동양사로 완전히 넘어가버리는 것도 원치 않았던 일본 본토 학계가 조선사를 방기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본토의 냉대에 경성제대의 조선사 연구자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930년대 중반 경성제대 제4대 총장 야마다 사부로(山田三郎, 1869~1965)는 조선총독부에 역사교과서 조사위원회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했다. 경성제대의 조선사 연구 성과를 조선, 나아가 일본 본토의 교과서에도 반영하고자 했던 야심만만한 시도였다. 일부 국사학자와 조선사학자들은 조선사를 제국 일본의 지방사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자기이자 타자인 조선의 애매모호함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가보려고도 했다. 물론 본토 학계는 식민지로부터의 목소리에 철저히 무시로 일관했다. 그 점에서 1930년대 이후 조선 연구에서 식민지가 본토를 압도하게 된 것은, 오히려 조선사가 철저히 식민지용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줄 따름이었다.

 

조선을 지우거나, 자신을 지우거나

 

비록 실패했지만, 후지쓰카나 아베는 그래도 조선에 매개라는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에선 나름의 의의가 있었다. 조선을 아예 지워버리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제대 조선사학 제1강좌의 초대 교수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가 그랬다. 앞서 살펴본 조선사학 제2강좌의 오다 쇼고가 학자-관료의 길을 걸어온 테크노크라트였다면, 이마니시는 평생 아카데미즘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았던 천생 학자였다. 또한 그는 경성제대에 부임한 이후에야 조선사로 눈을 돌린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일찍이 이를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일본 관학 아카데미즘 최초의 조선사가이기도 했다. 요컨대, 이마니시야말로 오다가 제도화한 조선사학의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줄 적임자였던 것이다.

 

그런 이마니시가 평생에 걸쳐 천착한 주제가 바로 조선 고대사였다. 특히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평양 일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참여하며 본래 신라사에 머물러있던 그의 관심사는 한사군과 고구려, 부여 등 고대사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방대한 한대(漢代) 유물들은 양과 질에서 중국 본토보다 오히려 앞서 있었는데, 이는 일본 역사학계로 하여금 국사와 동양사, 조선사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길을 열어주었다. 중국보다도 중국 문화를 잘 보전한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일본은 낙랑군을 통해 조선이라는 매개자를 거치지 않고 선진문물을 직수입해올 수 있다. 나아가 현재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므로 조선 속 지나인 낙랑군을 연결고리삼아 중국사를 넓은 의미의 국사로 간주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일본과 중국이 직통되며 동양사를 국사의 확장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서술에서 조선사는 자연히 조선인이라는 민족의 역사가 아닌, 조선반도라는 공간의 역사로 전락했다. 실제로 이마니시는 조선인이 전체 반도에 걸쳐 홀로 존재한 것겨우 500년 남짓 되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적으로 조선반도에는 오늘날 조선 민족의 본간을 이루는 한종족(韓種族)뿐 아니라 예맥족, 일본족, 그리고 중국 민족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마니시는 예맥족을 한종족과 구분함으로써 부여와 고구려를 조선사로부터 구출해냈다. 시대를 앞서간(?) 조선사의 트랜스내셔널한 재구성이었다.

 

나아가 이마니시는 중국과 고구려라는 양대 제국의 패권주의에 신음하던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일본의 도움 덕분이었다며 자신이 구축한 트랜스내셔널 고대사로부터 호혜와 연대의 가능성을 이끌어낸다. 특히 백제가 무너질 당시 일본이 명백한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원군을 파견했던 사건은 패도(霸道)’가 만연한 20세기엔 찾아볼 수 없는 왕도(王道)’의 실현이었다. 식민사학자라는 오명과 달리, 이마니시는 자신의 조국이 과거를 등불삼아 정의로운 제국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물론 아무리 선의에서 우러나왔을지언정 왕도의 체현자는 일본이요, 조선은 이를 투사하는 무대에 불과했다. 일본이 바란 건 어디까지나 조선인들 없는 조선이었다는 윤치호의 이죽거림처럼, 이마니시도 조선사에서 조선을 지워버린 것이다.

 

이마니시가 염원했던, ‘왕도의 체현자로서 제국 일본이 불가능한 기획이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 식민정책학자 이즈미 아키라(泉哲, 1873~1943). 그는 이 책에서 소개한 조선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여러모로 튀는인물이었다. 국제법이라는 독특한 전공도 그렇거니와, 도쿄제대 경성출장소나 다름없던 경성제대에서 삿포로농학교 출신에 미국 유학파인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메사추세츠 농과대학을 모델로 설립된 삿포로농학교는 리버럴한 학풍과 기독교적 분위기로 유명한, 관립이지만 반쯤은 사립 취급받던 학교였다. 그나마도 이즈미는 삿포로농학교에서 배움을 마치지 못한 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즈미가 유학하던 당시 미국에선 폴 라인쉬(Paul Reinsch, 1869~1923)가 주창한, ‘국민제국주의(national imperialism)’가 국제정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영토 확장보다는 경제적 팽창을, 주권절대론과 무력충돌보다는 다자주의와 국제협조를 중시한 라인쉬의 주장은 일본에서도 거의 즉각적으로 소개되었으며, 큰 호응을 얻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얻게 된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삼국간섭으로 빼앗긴 아픈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협조의 쓴맛을 본 일본으로선 자국의 제국질서와 세계적 추세인 국제질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이 질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한 이가 이즈미였다.

 

이즈미는 빈 땅에 사람을 심어국내의 일부로 편입하는, 문자 그대로의 식민(植民)만을 인정하던 삿포로농학교 1세대 선배들과 달리 주권을 보유한 외국을 식민지로 삼는 주권식민지에 주목했다. 식민정책학의 지평을 농정학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지평 위에서 이즈미는 일본의 식민통치방침인 동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식민통치란 통치의 대상으로서 이질적인 타자를 전제하는 만큼 언제나 비동화주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비동화주의에 입각한 식민통치의 끝은 영연방처럼 의회를 통해 스스로 법률을 제정하는 자치식민지가 될 터였다. 동화주의와 비동화주의의 이항대립을 넘어 식민통치의 필연적 귀결을 전망했다는 점에서, 그는 비동화주의자라기보다는 포스트 동화주의자에 가까웠다.

 

영연방을 모델로 한 자치식민지야말로 문명화, 민주주의, 민족자결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한다고 여겼던 이즈미의 주장은 당시로선 매우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3.1운동의 원인이 4000년 이상 특수한 문화를 일궈온 인구 1,500만의 민족을 단숨에 동화시키려던 일본의 무모함에 있다며 일본의 식민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문제는 그의 주장이 매우 이상적이었던 만큼 일반론이나 당위론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반면, 정작 현실권력은 이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일 여지가 컸다는 점이었다.

 

충돌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부임한지 1년이 지난 1928, 이즈미는 조선인 본위의 자치식민지 건설이 필요하다는 글을 외교시보에 두 차례에 걸쳐 실었다. 알맹이 없는 원론적인 글이었지만, 조선총독부의 대응은 즉각적이고 단호했다. 이즈미의 글을 실은 외교시보의 발행 금지 처분을 내리고, 그의 사상이 불온하다며 경성제대 측에 교수 해임을 강하게 요구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당시 경성제대 총장 마쓰우라 시게지로(松浦鎮次郎, 1872~1945)의 비호로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이후 이즈미는 철저한 침묵의 길을 택했다. 이마니시가 조선을 지웠다면, 이즈미는 자신을 지워버린 것이다.

 

다시, 조선/한국학을 묻다

 

이즈미의 침묵은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앞날을 예고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20년대 잠시나마 열렸던 자율의 공간은, 1930년대로 접어들며 급속히 닫혀갔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조선은 지나와 분리된 대륙’, 만몽(滿蒙)’ 진출의 교두보로 새로이 각광받았고, 그런 만큼 중국과 일본을 이어 동양을 만드는 매개로서의 역할은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 경성제대 역시 동양 문화의 권위보다는 만몽 개발을 위한 국책연구기관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만몽문화연구회와 대륙문화연구회 등 초학제적 산학협력단은 만몽 문화, 대륙 문화를 개발하는 도구로 조선 연구를 규정하고 동원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식민지란 공간에서 국책과 학리(學理), 군기(軍旗)와 과학의 깃발은 구별되지 않았다.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비극적인 말로를 보노라면, 역시 식민사학은 나쁜 것이라는 안전한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지은이가 근대와 식민을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다는 암시를 곳곳에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가령 정준영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노장 학자들만 다뤘다는 점을 이 책의 한계라 자인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다분히 의도된 선택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식민사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순수한형태의 조선 연구를 통해 근대와 식민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867년생인 핫토리 우노키치, 1871년생인 오다 쇼고, 1873년생인 이즈미 아키라, 1875년생인 이마니시 류와 1879년생인 후지쓰카 지카시에게 경성제대란 연구인생의 출발점이라기보다는 도달점이나 전환점에 가까웠다. 그런 만큼 오히려 아랫세대 연구자들보다 권력의 눈치를 덜 보고 원숙기에 접어든 자신의 학문세계를 자유로이 펼쳐 보일 수 있었다. 그랬던 이들조차 조선 연구라는 아포리아를 돌파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식민사학의 문제라기보다는 근대 역사학, 구체적으로 조선/한국학이라는 범주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던진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사의 연구동향에 밝은 독자라면 이들의 연구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마니시 류의 트랜스내셔널고대사는 민족주의로부터 한국 고대사를 구출하려는 최근의 여러 시도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론 중국과의 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관계를 가지고 여러 방면에서 폭넓게 조선을 연구해서 동양 문화의 권위가 되는 것이 본학(本學)의 사명이라역설하던 핫토리 우노치키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한국을 두고 보면, 중일 간의 비교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깨닫는 일이 종종 있다고 이야기하는 미야지마 히로시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다.(미야지마 히로시, 한중일 비교 통사, 너머북스, 2020, p.6.) 민족주의를 극복한다더니, 결국 돌고 돌아 식민사학인 것일까.

 

이런 섣부른 결론은 아마도 미야지마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박훈의 말마따나 그는 사실과 논리를 넘는 어떤 정념(情念)이 선행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국에 비판적인 역사가이니 말이다. (박훈, 진짜 동아시아사가 나왔다,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부 서울리뷰오북스 5, 서울리뷰오북스, 2022, p.124.) 그보다는 핫토리 역시 미야지마만큼이나 선의를 갖고, 조선을 매개로 동양이라는 보편을 창출하고자 노력했다고 보는 쪽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기에 핫토리의 실패는 단순히 식민사학의 실패가 아닌, 동양/동아시아를 통해 민족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조선/한국을 새로이 긍정하려는 시도의 실패를 의미한다.

 

가령 한국 전통사회의 특질을 중국과 일본의 중간형으로 정의한 미야지마에 대해 일본적 특질과 중국적 특질을 아무런 논리적 매개도 없이 편의적인 설명으로 절충하였을 뿐이라고(이영훈, 한국사회의 역사적 특질, 이영훈 편, 한국형 시장경제체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p.375.) 일갈한 이영훈의 비판은 한국에게 부여된 매개라는 지위가 지극히 사후적임을 드러낸다. 한국이 있어 중국과 일본이 연결되는 게 아니라, 먼저 중국과 일본을 양 끝에 놓은 뒤에 한국을 그 가운데에 놓음으로써 매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사후적으로 부여된 매개라는 지위는 지극히 불안하기까지 한데, 18세기 고증학의 유행이나(후마 스스무, 연행사와 통신사, 신서원, 2008.) 16세기 은의 유통에서(조영헌, 「『동아시아사교과서의 은 유통과 교역망, 동북아역사논총39, 2013.) 조선만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적시각이 오히려 조선/한국의 낙후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조선/한국과 동양/동아시아는 서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조선/한국학은 결국 20세기의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일까? 확실히 민족주의 역사학은 힘이 세다. 비단 고대와 근세뿐 아니라 고려시대를 몽골제국사로, 근대를 일본제국사로, 현대를 냉전사로 트랜스내셔널하게 바라보려는 게 최근 한국사학계의 최신 트렌드라 할 수 있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아직까진 민족주의 역사학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돌아가기엔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도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점에서 국사와 동양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경성제대의 조선학 연구자들은 오늘날의 한국학 연구자들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국사만 일본사에서 한국사로 교체했을 뿐, 조선/한국학이라는 아포리아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준영이 겨냥하는 지점이 정확히 이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성제대의 조선학 연구자들과 오늘날의 한국학 연구자들 모두 학문적 사명감과 순수한 열정, 엄정한 실증적 태도로 작업에 임했음에도 어째서 조선/한국학이라는 아포리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것은 근대 역사학 일반의 문제인가, 아니면 조선/한국학만의 문제인가?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조선/한국학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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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제1405호, 제1406호 : 2022.03.28~04.04 - 21 WRITERS ②, 합본호
한겨레21 편집부 지음 / 한겨레신문사(잡지) / 2022년 3월
평점 :
품절


김혜리

"내가 이 영화를 보고 판단한 미적 판단을 씁니다. 다만 저널리스트가 일반 관객과 다른 점이라면 소통 가능한 언어를 써서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보편성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미적 판단이란 의미는 아니에요. 그래도 나만의 것으로 남아서는 곤란합니다."


 


신형철

"제가 비평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은데 제일 멋없는 답은 이런 거예요. 제 삶에는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타인의 삶에서 그걸 찾아낼 만큼 관심의 에너지도 없고요. 그러니 이와는 다른 자극이 주어져야만 하고 그게 작품이겠죠."


 


이라영

"산발적으로 적어둔 메모 속에서 어떤 흐름을 찾을 때가 있어요. 그럼 도서관에 가서 관련된 것을 막 찾고 열심히 구글링도 해요. 그러다보면 연결고리가 없을 것 같던 메모들 사이에서 써야 할 글의 구조가 나오기 시작해요. 그다음부터는 충실하게 쓰면 되는데, 거기까지 가는 게 힘들죠."


 


정여울

"제가 사랑하는 에세이의 잡스러움이 그 일에 적격이라고 생각해요. 소재가 무엇이든 특별한 문학적 장치 없이도 곧바로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바로 에세이의 잡스러움, 하이브리드적 에너지거든요."


 


김원영

"나라는 사람을 가운데 놓고 내가 연결된 전체 세상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맵(지도)을 그려보는 거예요. 아주 작은 나로부터 시작해 지구 전체로 확대해보는 거죠. 그 과정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나올 수 있습니다."


 


은유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해요. 판단이 강할 수록 사람과 사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못 보잖아요. 전달자로 온전한 역할을 하려면 판단하지 말고 의심해야 해요. 소설가가 자기가 구축한 세계에서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논픽션 작가는 가장 아래서 세상을 보고 기록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정은정

"저는 단행본보다 오히려 집요하게 논문을 봐요. 유통, 산업 관련 보고서 등도. 한 주제를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이, 웬만한 단행본보다 글쓰기에 훨씬 도움이 돼요. 그리고 인터뷰할 때도, 작가로서는 좌충우돌하며 부딪혀도 원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끌어내려 하잖아요? 사회학과 대학원에서는 멈춰야 할 땐 멈춰야 한다고 가르쳐요. 연구 윤리의 문제죠. 저는 작가로서의 자존심보다, 인터뷰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주신 분들께 예의를 다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해요."


 


최현숙

"저는 누군가가 각별한 인생, 상처, 장애가 있다고 관심을 갖지는 않아요. 아무나 붙잡고라도 그의 생애 이야기를 통해 계층과 성별과 문화와 심리를 드러낼 수 있어요. 그렇게 이 사람을 사회 속에 위치하도록 끌어내는 게 제 구술 작업의 핵심이거든요. 그가 사회의 어느 위치에 있었고, 누구와 같은 처지에 있었고, 누구에게 차별받았고, 이런 사회적 존재로서 한 사람을 끌어내는 거죠."


 


희정

"전 기록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세계가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시선이 가닿는 데까지가 자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세계를 어떻게 넓혀갈 수 있는지가 기록자 또는 비문학 작가의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해요."


 


강원국

"예를 들어 <강원국의 글쓰기>는 네이버 블로그에 2년 반 동안 쌓아놓은 1700개의 메모로 쓴 거예요. 필리핀 세부에 강의하러 갈 일이 있었어요. 그때 강의 외에 이 메모를 다 출력해 가져가서 분류 작업을 해야겠다고 목표를 세웠어요. 그래서 1700개 메모를 50개 덩어리로 분류했아요. 이 50개 덩어리를 가지고 책을 한 권 쓴 거죠."


 


김진해

"이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수 있다는 강한 간절함으로 써야 합니다. 쓰고자 하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하고요.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나 고민된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타인을 가늠해보면 됩니다. 이걸 드러내면 타인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생각하는 거죠."


 


김하나

"읽고 쓰기가 듣고 말하기보다 먼저 오는 것은 읽고 쓰기의 호흡이 느리기 때문이에요. 천천히 받아들이고, 느리게 사유하고, 꼼꼼히 정리하고 나서 듣고 말하기에 나서죠. 듣고 말하기는 아무리 천천히 해도 즉시적이어서 실수하거나 무례를 범하기 쉬우니까요."


 


김혼비

"왜 일상을 살아가다가 아주 짧게나마 자신을 멈칫하게 하는 순간을 딱 붙잡고 왜 멈칫했지, 뭐가 나를 멈칫하게 했지를 계속 고민하는 게 영감을 길어 올리는 가장 확률 높은 방법인 것 같아요. 떠돌던 영감을 이렇게 붙여보고 저렇게 연결해보고 순서도 바꿔보고 완성된 형태로 만드는 게 진짜 중요해요."


 


이슬아

“이제까지랑 다른 인터뷰를 제가 같이 만들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연재 중이고 새로운 시리즈를 뜨겁게 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겹치지 않는 얘기를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편하게 하세요, 기자님.”


 


채사장

"누군가를 만나 대화하는 게 유일한 재미였는데 항상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친구를 만나도 계속 겉도는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우리가 최소한 공통의 뭔가를 공유한가면 그것을 기반으로 다음 얘기를 해나갈 텐데, 누구나 최소한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강명관

"그러니까 과거의 맥락에서 과거를 파악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탐구하고 싶다는 거죠. 문제는 이때까지 과거의 문학과 역사를 항상 근대와 민족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니까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연구 주제, 리얼리티를 다 숨겨버리고 마는 거죠. 은폐한 거죠. 과거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김상욱

"어쩌면 제가 물리학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쉽게 설명할 수 있는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죠. 과학자는 빈틈없이 완벽하게 설명하려는 태도에 익숙한데, 일반인에게는 정확한 설명보다 적절한 비유가 더 좋아요."


 


박주영

"좋든 싫든 써야 하고 글로써 밥벌이한다는 점에서 판사도 일종의 전업작가라 할 수 있겠네요. 선고도 일종의 마감이다보니 가능한 한 마감에 쫓기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최대한 틀리지 않으니까요."


 


박찬일

"글쟁이는 최소한 설득은 못하더라도, 동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글쟁이의 본능이랄까. 설득하려고 적절한 윤색도 하고 초도 치고 가미하고 미원도 치는 건데, 진짜로 눈물나는 건 사실이다."


 


유현준

"건축은 제약이 많다. 여러 사람과 흥정해야 하고, 예산 제한이 있고, 건축주의 취향이 있다. 그래서 원래 의도의 반이나 실현하면 다행이다. 그러나 글안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컨트롤한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자유를 느낀다. 스트레스도 해소된다. 건축은 하나를 현실화하기도 어렵지만, 글로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최재천

"문학적 글쓰기와 과학적 글쓰기는 각자 특성이 분명하기에, 상호 전환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글은 양쪽의 특성이 모두 묻어난다고 해요. 즉, 기승전결의 내러티브를 중요시하는 문학적 글쓰기와 결론-이유-근거로 구성되는 테크니컬 라이팅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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