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현재의 탄생 -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 1년의 기록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 지음, 김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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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대계 스웨덴인인 저널리스트의 논픽션. 마치 세계를 훑을 것만 같은 제목과는 달리, 책에서 다루는 현재란 어디까지나 서구세계의 오늘에 불과하다. 물론 이슬람세계가 비중 있게 다뤄지긴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는 더 큰 문제의 일부로서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 외에는 인도와 동서 파키스탄의 분단이 곁다리로 등장하는 정도.

19471월에서 12월까지, ‘세계각지의 국가와 도시를 훑으며 현재를 만든 중요한 사건들을 훑는 저자의 시야에 서울과 평양, 도쿄와 베이징, 하노이와 자카르타는 들어와 있지 않다. 과연 병들어 죽어가는 조지 오웰이나 미국인 작가와 사랑에 빠진 시몬 드 보부아르, 새로운 패션을 창조한 크리스티앙 디오르보다 이들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이 덜 중요한가 싶지만, 비서구를 일종의 악세사리로 다루느니 깔끔하게 들어내기로 한 저자의 판단은 퍽 현명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꿀꿀함은 남는다. 어째서 서구, 구체적으로는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문제만을 천착한 이 책은 별다른 수식어 없이 현재라는 이름을 버젓이 달고 나올 수 있었을까. 만일 배경이 동아시아였고, 사건이 한반도의 분단이었다면 저토록 당당하게 현재를 선언할 수 있었을까. 서구는 자신을 구태여 보편이라 천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반면 비서구는 자기네 특수성을 이야기할 때조차도 서구를 의식해야만 한다. 차크라바티의 말마따나, 유럽의 지방화가 절실하다.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스웨덴어로 쓴 글의 영어 번역판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중역본임에도, 문장은 유려하고 우아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와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동아시아나 한반도의 현재를 만든 인물과 사건들을 엮어 이런 책을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잠겼다가, 너무나 자연스레 서구 명저동아시아/한국판을 상상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역시 비서구는 결코 서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사족이지만, 유대인 문제에 올인한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전후 나치의 재편을 도모한 스웨덴인 페르 엥달이라는 점은 퍽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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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길그레이트북스 1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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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상징되는 20세기 전반기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인물평전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아렌트는 20세기 전반을 어두운 시대로 정의한다. 공적인 삶을 상징하는 밝음의 대척점에 있는 어둠은, 모두가 사적인 것에 매몰된 상황에 대한 은유다. 역자 홍원표에 따르면 아렌트에게 어둠이란 가치판단이 배제된 중립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공적인 삶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던 고대 그리스로부터 지대한 영감을 받은 아렌트가 과연 어둠에 대해 일말의 부정적인 평가도 남기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특히나 그가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범죄를 마주했고, 전후에는 뉴요커기자로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취재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어두운 시대에 아렌트가 집중한 건, 다름 아닌 사람이다. 사람이 백만 명 단위로 죽어나가던 시대에 사람이라니, 지나치게 한가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렌트가 조명한 사람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온 세상이 사적인 것에 얼굴을 박고 있던 때, 이들은 용감하게 공적인 것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가톨릭의 개혁을 추구한 보수적인 리버럴 발데마르 구리안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좌파 시인 그룹을 이끌었던 위스턴 휴 오든까지, 사상도 행적도 가지각색인 아렌트의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가뜩이나 어려운 내용에 역자의 섬세하지 못한 번역까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어가는 과정은 고난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쓴 약을 먹어가듯 두꺼운 책을 꾸역꾸역 읽어가며, 어둠으로 가득 찬 20세기를 비추었던 등불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많이 위로받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20세기 전반 유럽의 이야기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으며, 난 엉뚱하게도 20세기 후반 한국을 떠올렸다. 최인훈이 광장에서 이명훈의 입을 빌려 이야기했듯, 허울뿐인 민주공화국의 간판을 내건 신생국 대한민국 역시 광장()은 없고 밀실()만 빼곡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전반의 유럽과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의 한국에도 밀실을 젖히고 나와 기꺼이 광장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학인 최인훈과 김수영, 종교인 함석헌과 문익환, 정치인 장준하와 김대중, 언론인 한창기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의 어두운 시대를 밝혀간 이들의 역사 역시, 누군가가 써주었으면 싶었던 건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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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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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등학생 시절, 18세기 조선사를 공부할 때면 언제나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박지원과 박제가를 위시한 북학파. 교과서의 설명대로라면 조선의 발전을 대표해야 마땅할 이들 북학파, 정작 발전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교통이 시망이라 국토가 쬐깐한데도 물자가 널리 유통되지 못한다거나, 청은 변방의 어염집도 이리 삐까번쩍한데 조선은 수도인 한성조차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를 접하다보면 교과서의 설명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북학파가 열렬히 사모해 마지않았던 청은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끝물을 지나며 서서히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결국 1840년 한 줌의 영국 함대에 무력하게 패배했다. 그러니깐 교과서는 조선의 낙후성을 극딜했을 뿐 아니라, 기껏해야 느그 청이나 보며 감탄했던 북학파발전의 상징으로 자랑스레 추켜세웠던 것이다. 물론 교과서도 바보는 아닌지라, ‘북학파의 현실비판은 조선의 개혁을 위해 일부러 말을 쎄게 한 것이라고 애써 변명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중학생일지라도 그런 궤변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어수룩하진 않았다.

고작 청나라나 부러워해야 했던 18세기 조선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단 한국사 공부는 답이 아니다. 한반도 역사만 들입다 파봤자 우리의 잘나고 멋진 모습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건 이렇게나 멋진 한국을 세계는 왜 알아주지 않느냐는, ‘국뽕이 가미된 열등감과 자기연민뿐이다.

한반도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오직 자기밖에 모르던 어린이는 유치원이라는 보다 넒은 세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역사도 다른 지역·국가와의 비교를 통해서만 보다 차분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신상목의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는 미우나 고우나 한국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다름 아닌 에도시대(1603~1867)의 일본이다.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농경사회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일본은 일견 이웃나라 조선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비록 나라의 빗장은 닫아걸었을지언정, 일본의 에도시대는 결코 침체와 퇴보로 점철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도시대는 일본이 근대로 나아가는 포텐을 착실히 쌓아가던, ‘축적의 시간이었다. 전근대엔 한반도나 일본이나 도긴개긴이었으리라는 (어디까지나 한국인의) ‘통념, 이 책 앞에서 와장창 부서지고 만다.

 

이 책의 백미는, 단연 저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에도의 소바집을 취재한 가상 르포가 실린 1장이다. 현대 한국인에겐 지극히 평범한 대도시에서의 길거리 외식이, 실은 고도의 문명적 행위임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단 대규모의 수요를 창출한 대도시가 존재해야 하며, 물자를 원활히 조달받을 수 있는 도로와 수도시설 등의 인프라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 도시민들 사이에서 쌀이나 면포가 아니라 작고 가벼운 화폐가 널리 유통되어야 한다. , 손님을 끌어오기 위한 마케팅 기법도 빠질 수 없다.

놀랍게도, 에도시대의 일본은 이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보기 드문 비서구 국가였다. 드넓은 뻘밭이었던 간토는 대규모 치수사업을 통해 풍요로운 옥토로 거듭났고, 막부의 거점인 에도는 인구 100만의 초거대 소비도시로 등극했다. 각 번()의 다이묘는 막부에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천하보청(天下普請)’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공공사업에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참근교대(参勤交代)라 하여 격년으로 에도와 영지를 오가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인프라가 정비되고 낙수효과가 발생하며 일본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막부와 다이묘라는 관()이 깔아준 에서 마음껏 기량을 발휘한 건, 다름 아닌 상인과 서민이라는 민()이었다. 포르노와 광고 전단지를 시작으로 온갖 종류의 인쇄물이 거리에 휘날렸고, 하다못해 목욕용 수건에도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졌다. 민간의 여행이 활성화되어 변방인 도호쿠(東北)의 평범한 백성일지라도 정기 여객선과 잘 정비된 도로를 통해 전국의 명승지를 얼마든 둘러볼 수 있었다. 조선에 비유하자면, 함경도 경성(鏡城)의 호농이 여객선을 타고 원산까지 내려온 뒤, 거기서 다시 임진강과 연결된 운하를 통해 한성, 개성, 평양을 유람하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던 셈이다. 이 어찌 대단하다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저자가 풀어놓는 일본 이야기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랍고, 또 흥미진진하다. 물론 누군가는 근대에 집착하는 저자의 관점이 지나치게 편협할뿐더러 이미 그 수명을 다했다고 태클을 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책 곳곳에서 이건 좀 아니다싶은 설명이 등장하곤 하는데, 에도시대의 고문학자 오규 소라이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저자는 소라이를 탈주자학의 기수이자 근대정신의 발현으로 여기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해석을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소라이학이 탈주자학이라기보다 주자학의 일본적 변용에 가까웠고, 그의 개혁안 역시 지극히 복고적이었으며, 그의 문파는 아카데믹한 문헌학에 치중함으로써 현실정치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해석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하긴 일본에 주자학이 들어온 게 빨라야 17세기고, 소라이가 활동한 건 18세기 초반이다. 한 사상의 전파와 수용, 극복이 일어나기에 100년이란 시간은 너무나 짧지 않은가!

(소라이학이 과연 얼마만큼 탈주자학인지에 관심이 있다면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상사를 참고하라. 부끄럽지만 나 역시 이에 대해 짧은 글을 썼다. 소라이학은 과연 탈주자학인가?https://brunch.co.kr/@msg2012/8)

비단 소라이학에 대한 해석만이 아니다. 에도 시장의 등장을 중세 유럽의 자유도시와 곧바로 연결시키는 서술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고, 르네상스를 서구 근대 문명의 원점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이젠 너무 낡았다고 느껴진다. 요컨대, 저자의 관점은 지극히 클래식하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클래식함이야말로 이 책이 갖는 최고의 장점이라 확신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근대가 뭔지, 이로 인해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이 주어졌고 또 박탈되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제1세계의 말석에나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한국인은 근대 서구가 이룩한 성과를 아주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다. 한술 더 떠 이제 곧 동아시아가 서구에게 빼앗긴 세계의 패권을 되찾으리라는 주장은 한국에선 아예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정작 그 근거란 굉장히 빈약한데, 역사적으로 동아시아는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후반까지의 찰나를 제외하고는 항상 서구보다 앞서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꼭 중세유럽의 파리와 런던이 인구 몇 만을 겨우 헤아릴 때, 북송의 카이펑(開封)은 백만을 바라보는 대도시였다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하지만 인구가 특정 도시, 나아가 문명의 발전수준을 가늠하는 유일한 지표라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지역은 인도와 방글라데시여야 한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그 어떤 동아시아예찬론자라도 잘 알고 계시리라.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건 인구와 같은 단순한 수치라기보다는, 서구문명의 정신과 가치, 제도다. 세속주의, 개인주의, 합리주의, 모험심과 도전정신, 이윤추구 등 서구문명을 구성하는 가치들은 진지한 고민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가 소중한 이유는 그래서다. 저자는 서구, 정확히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일본사를 서술해간다. 욕망을 컨트롤하는 우아하고 세련된 관행의 발전,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사회, 자유로운 탐구정신의 고양을 문명화의 척도로 여기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대다수 한국 독자에게 어색하고 거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낯설음이야말로 우리가 근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닐까? ‘근대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과연 이를 제대로 비판이나 할 수 있을까?

 

“B급 좌파를 읽느니 A급 우파를 읽게

 

대학 새내기 시절 들었던 <서양사개론> 수업에서 교수님이 건네신 이야기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포스트모던 역사가였던 교수님은, 비록 동의는 되지 않을지라도 A급 우파의 관점이나 논리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분명 도움이 될 거라며 무려 이영훈의 책을 추천하셨다. 식민지근대화론의 거두이자 위안부를 부정하는 이영훈을 읽으라고?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훗날 이영훈의 한국경제사를 접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교수님께서 왜 그리 말씀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영훈이 학자로서의 자아와 계몽가로서의 자아를 쪼개 각기 다른 얘기를 하는 모습은 여전히 아쉽다.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의 태도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내가 일말의 죄책감을 느낄지언정 여전히 이영훈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로부터 근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통찰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야 역시 넓어졌고 말이다.

신상목 역시 이영훈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A급 우파. 사실 요즘 나는 과연 서구의 역사조차 근대성이 발현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조금 의문스럽긴 하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저자와 마찬가지로 서구, 정확히는 영미(英美) 근대성의 가치를 긍정한다. 설령 그것이 18세기 이후의 영국과 미국이라는, 지극히 특수한 시공간에서만 나타난 성격이라 할지언정 일종의 모델혹은 이상으로서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책의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저자는 한반도에 대해선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미 근대성,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본 일본사는 그 자체로 동시기 조선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참조점이 된다. 18세기 조선은 분명 발전했다. 인구는 1200만에서 1800만으로 50% 가까이 늘었고, 25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수도 한성은 제법 도회지 분위기를 풍겼다. 구리 동전인 상평통보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쓰였으며, 바야흐로 전국시장이라는 게 막 생길락 말락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의 발전을 일본과 비교한다면 어떨까? 나아가, 같은 시기 서구와 비교한다면? ‘(영미) 근대성이 전 인류가 추구해야 마땅할 필연이자 보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장 폐기처분해버릴 만큼 무가치하지도 않다. 사실 영미 근대성이 좋다 나쁘다 왈가왈부하기 전에, 일단은 그게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친애하는 우리의 적, 일본이 묻는다. ‘근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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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아빠 2019-06-30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읽게 잘 읽었습니다. 어설픈 좌파보다는 세련된 우파를 더 읽어 보겠습니다 ^^

유찬근 2019-12-13 18:13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김종학 지음 / 일조각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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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중 무역 분쟁, 북핵문제, 지구온난화 등으로 안 그래도 바람 잘 날 없는 지구에 느닷없이 한 무리의 불청객이 찾아온다. 거대한 은빛 우주선을 탄 이들의 정체는 바로 은하계 저편 시리우스별의 외계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한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과학기술과 지구의 천연자원을 교환하자는 등, 일견 온화하고 합리적인 제스쳐를 취한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흉측한 파충류로, 지구의 모든 물을 뺏고 지구인들을 하림 냉동 치킨너겟으로 만들어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너무나 빤해서 외려 놀라울 정도의 시나리오인 만큼, 앞으로의 전개 역시 쉬이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 외계인에 맞서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 짠하고 나타나줘야 한다. 하지만 감독이 헤까닥한건지 아님 제작사의 외압이 있었던건지는 몰라도, 갑자기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고 치자. 주인공은 지구가 진정으로 독립적이려면 외계인의 과학기술이 필요하다고 판단, 외계인과 손잡고 지구의 권력을 장악하기로 맘먹는다. 지구인의 독립을 위해 외계인과 손잡는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발상인가!

리얼급의 망작이 아닌 이상, 이렇게 막나가는 시나리오를 가져다쓰는 영화는 단언컨대 없다. ‘외세를 이용한 독립이라는 이 아이러니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쪽은, 놀랍게도 영화계가 아니라 학계다. 그 누구보다 엄밀하고 논리적이어야 마땅할 학자들이 그랬다고?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외교사 연구자인 김종학은 적어도 19세기 말 조선에서 벌어진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저런 형용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져 왔다고 지적한다. 그 사건, 다들 눈치 챘겠지만 바로 갑신정변이다. 그의 책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는 갑신정변을 둘러싼 아이러니를 철저히 파헤친다.

 

김종학은 갑신정변의 주역이 박지원과 그의 손자 박규수로 이어지는 북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교과서적 설명부터 와장창 깨트린다. 1881년을 전후해 일본 언론과 외무당국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개화당이라 불린 이 불온한 무리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의역중인(醫譯中人)과 비주류 양반이었다. 철저한 아웃사이더에 머물러있었던 이들 개화당이 원했던 것은 조선의 독립이나 근대화(서구화)’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외세의 힘을 빌려 조선의 썩어빠진 신분제를 완전히 갈아엎는 것이었다.

갑신정변이 불온한 아웃사이더들의 은밀한 혁명모의로 재구성됨에 따라,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역시 마치 잘 쓰인 추리소설과도 같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43회 월봉저작상을 받은 전문연구서란 사실조차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책이 갖는 흡인력은 굉장하다. 특히 1장과 2장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짜릿함과 긴장감을 선사하는데, 두 장의 주인공인 역관 오경석과 승려 이동인이 꾸미는 음모의 스케일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장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관 서기관 윌리엄 F. 메이어스의 회고는 그 자체로 독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긴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어스의 회고에 등장하는 조선인 역관은 무려 영국이 군함을 동원해 조선을 침략해주기를 여러 번 간청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문제의 역관이 바로 오경석이라는 사실이다. 오경석이 누구인가, 박규수, 유대치와 더불어 개화파를 길러낸 인큐베이터라고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달달 외웠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 오경석이 왜 메이어스에게 조선을 침략해달라는 매국적인부탁을 했을까?

오경석에게 조선이란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에 갇혀 산 채로 익어가면서도,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알지 못하는 가련한 개구리였다. 지배계급인 양반은 밖으로는 나라의 빗장을 닫아걸고, 안으로는 공고한 카스트를 구축함으로써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여기에 신분의 한계로 자신 같은 인재가 평생토록 통역에나 종사해야 한다는 개인적 울분까지 겹쳐, 오경석은 조선을 뒤엎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치 않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설령 그 일이 영국이란 외세의 침략이라 할지라도.

2장의 주인공인 승려 이동인 역시 조선에 대한 불만이라면 오경석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일본 밀파라는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건 순전히 비천한 승려인 자신을 허물없이 대해준 김옥균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동인이 양반 이너서클로부터 받아온 멸시와 차별이 컸다는 방증이리라.

요컨대, 개화당의 초창기 멤버들은 빼어난 능력과 탁 트인 국제적 감각을 갖추었음에도 양반네가 구축한 공고한 카르텔에 가로막혀 산 채로 썩어가던 비운의 아웃사이더였다. 따라서 이들 개화당은 박규수와 같은 온건개화파와 결코 함께 묶일 수 없다. 똑같이 조선의 문호개방을 외쳤다한들 전자의 목표가 혁명에 준하는 철저한 개혁이었던 반면, 후자의 그것은 보수적인 개량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최근 저스툰에서 인기리에 연재중인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 박규수와 오경석은 꽤 죽이 잘 맞는 콤비로 등장하는데, 사실 오경석은 마음속으로 박규수를 그 누구보다 미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1장과 2장에서 저자가 제시한 개화당의 재해석은 굉장히 파격적일뿐 아니라, 상당한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화당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어 가면 갈수록, 현실정치에 목소리를 내면 낼수록 저자의 파격은 힘을 잃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경석과 이동인이 리타이어하고 결국 김옥균과 박영효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경석은 1877년에 사망하고, 이동인은 1881년 일본에서 실종된다. 그리고 이들 중인 아웃사이더 1세대를 이어갈 2세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말마따나 중인계급은 자기들끼리 폐쇄적인 혼인관계를 형성하고 또 요샛말로 하면 서로 자제들의 과외교습을 해주면서 기술직을 독점적으로 세습했다. 따라서 이들은 양반을 능가하는 강력한 동류의식이 있었을 터이지만, 이 책 어디에도 중인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였다는 언급은 없다. 중인계급이 정말 개화당의 중심이었다면, 프랑스의 제3신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황국협회를 결성해 만민공동회를 때려 부순 보부상만큼의 집단적 활약상은 보여줬어야 했다.

열심히 불씨를 피워놓고 정작 중요한 때 사라져버린 중인의 빈자리를 메우는 건 비주류 양반들이다. 그나마도 이들은 아웃사이더 정서를 공유하는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김옥균이나 박영효 같은 몇몇 인물, 아니 사실상 김옥균 한 명의 얼굴을 빌려 등장할 뿐이다. 그래, 김옥균은 확실히 평등사상의 소유자였다고 치자. 하지만 당장 갑신정변의 또 다른 주역인 박영효조차 끝내 철종의 부마라는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했다고 저자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갑신정변이 몇몇 양반네들의 쿠데타였고 그나마도 서로 간에 일치된 의견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를 정말 사민평등을 향한 혁명모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저자는 갑신정변으로부터 자주독립근대화란 선입견을 벗겨내는데 성공했지만, ‘사민평등이란 새로운 정의를 덧씌우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갑신정변은 그저 양반 엘리트 사이의 권력쟁탈전, 노골적으로 말하면 밥그릇 싸움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가 갖는 한계는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파충류 외계인의 비유를 들어 갑신정변에 대한 기존 이해를 비판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이 비유는 저자 본인이 쓴 서문을 거의 그대로 옮겨온 것인데, 여기서 저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첫째, 지구는 하나가 아니다. 지구는 200개가 넘는 나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연히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존재한다. 둘째, 독립은 언제나 무엇으로부터의독립이다. independence 뒤에는 꼭 from이 붙는다.

, 이제 두 사실을 합쳐보자. 지구 어딘가에 있는 작은 나라는 강대한 이웃나라의 간섭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때 고도의 과학기술을 가진 외계인들이 지구에 들이닥친다면, 작은 나라가 이들의 힘을 빌려 이웃나라의 입김에서 벗어나려 하는 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요컨대, 정말 독야청청 개썅마이웨이가 아닌 이상 외세를 이용한 독립은 결코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화당이 추구한 독립역시 청으로부터의 독립이었기에, 일본이라는 외세의 힘을 빌리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아가, 과연 저자의 말마따나 독립이라는 대외적 목표와 신분제 타파라는 국내적 목표가 철저히 구분되는지도 의문스럽다. 이 점에서 20185월에 열린 제20회 아산서평모임에서 경제사학자 이영훈이 이 책에 덧붙인 코멘트는 굉장히 시사적이다.

 

정치외교사나 국사학계의 통념에서 나오는 언술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 체계가 외세 체계를 내면화해 구조화한 체계이다. 즉 외세와 내세를 구분해 말하기 힘들다.”

 

중화질서는 세계를 천자와 제후, 오랑캐로 나누었고, 가장 모범적인 제후국인 조선은 이를 군주와 신하, 상민, 그리고 노비라는 신분질서로 일국 단위에서 똑같이 재현했다. 조선의 신분제와 중화질서 사이의 연속성은 조선이 대중국외교와 자국의 제도, 과거, 학교업무를 예조(禮曹)라는 하나의 부서에서 관장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조선의 신분제 철폐는 곧 중국을 정점으로 한 위계적인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조선이 더 이상 중국의 신하되기를 거부한다면 자국의 군신관계 역시 새롭게 재편해야만 했다. 지금도 그렇듯이 외교와 내치는 떨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학계의 김옥균이 되려고 하느냐!”

 

이 책의 모태가 된 박사논문을 준비할 당시 저자가 주변 연구자들로부터 숱하게 들었다던 이야기다. 확실히 갑신정변에 대한 그간의 통념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는 저자의 모습은 김옥균에 비견될 정도로 신선하고 파격적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고작 왕을 사로잡음으로써 조선을 뒤엎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김옥균만큼이나 저자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의 가치는 주제의 파격성이나 설득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의 진가 역시 줄기가 아닌 곁가지에서 드러난다.

다소 나이브하고 덤벙대는 김옥균과 달리, 김종학은 치밀한 사료분석을 바탕으로 책 곳곳에 생각해봄직한 질문들을 숨겨놓았다. 고작 임오군란 한 번으로 소진될 만큼 빈약한 조선의 재정, 무려 고종에게 반성문을 강요할 정도로 막강했던 양반계급의 위세, 일체의 중간단체가 부재한 가운데 정치적 권위를 담보해줄 유일한 상징으로서의 국왕, 도덕률마저 초월한 리바이어던의 화신 흥선대원군 등, 각각의 질문들이 논문 한 편 급의 깊이와 밀도를 자랑한다.

나는 종종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평가가 세대별로 극명히 갈린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젊은 세대에게 김옥균은 빼도 박도 못할 친일파, 갑신정변 역시 경솔하게 외세를 끌어들인 치기어린 쿠데타에 불과했다. 반면 나이든 세대는 대놓고 드러내지 않을 뿐 김옥균에겐 연민을, 갑신정변엔 아쉬움을 느끼는 듯했다. 이러한 세대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민족주의 교육의 세례,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선진국 국민이라는 지위가 젊은 세대에게서 어떠한 감각을 앗아간 건 아닐까?

젊은 세대는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곳곳에 저자가 배치한 질문들을 따라가며 이 감각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허구한 날 서양열강에 쥐어터지며 밥 먹듯이 배상금을 뱉어내고도 끝내 망하지 않았던 청과 달리, 왜 조선은 구식 군대의 반란 하나 진압하고는 폭삭 주저앉아 버렸을까? 김옥균이 조선을 뒤엎기 위해 채택한 방법이 겨우 왕을 사로잡는 것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김옥균을 대하는 나이든 세대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한 뒤에야, 우리는 갑신정변이 과연 사민평등의 혁명인지 아니면 양반네의 밥그릇 싸움인지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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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페미니즘 My Little Library 8
박준우 지음 / 한길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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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2016730, 미래라이프대학 신설을 반대하며 들고 일어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은 총장의 요청으로 투입된 1600명의 경찰과 팽팽히 대치중이었다. 머지않아 진압될 게 불 보듯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 학생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다름 아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다. 이날의 시위를 계기로 <다시 만난 세계>는 여성들의 연대와 우애를 상징하는 노래로 거듭났다. 뿐만 아니라 2016년 촛불항쟁과 2017년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서도 울려 퍼지는 등, ‘21세기 민중가요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노래는 힘이 세다. 시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는 사람들을 울고, 웃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특히 약자와 소수자의 감수성이 노래에 실렸을 때, 그 파괴력은 종종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기도 한다. <다시 만난 세계> 역시 진취적이고 동지의식 충만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냈기에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시청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물론 한국에서 이는 매우 특수하고 예외적인 사례다. 소수자, 그 중에서도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시도는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하지만 팝음악도, 페미니즘도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긴 역사를 갖는 미국에서라면 어떨까? 오랜 세월만큼이나 지난하고 힘겨웠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감동적인 팝음악과 페미니즘의 연대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박준우의 노래하는 페미니즘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저자는 조곤조곤 담담하게, 하지만 필요할 때는 확실히 감정을 실어가며 페미니즘이 팝음악을 통해 미국에서 목소리를 키워간 역사를 이야기한다.

 

명실상부 자유와 민권운동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예컨대 대중음악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재즈는 1920년대를 풍미했지만, 이 시기 여성 연주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하지만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여성 음악인은 꾸준히 등장했는데, ‘페미니스트 임프로바이징 그룹(Feminist Improvising Group, FIG)’이 대표적이다.

팝 음악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1950년대를 지나 비틀즈가 전 세계를 뒤흔든 1960년대에 이르면 레슬리 고어와 퀸시 존스, 나나 시몬 등이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과, 그럼에도 여전히 빛나는 자신의 주체성을 노래하며 작품성과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그리고 1980년대,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등장으로 마침내 팝 페미니즘은 미국사회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로 떠오른다.

두 영웅 이후의 역사는 인물도, 사건도, 지향점도 너무나 각양각색이지만, 노래하는 페미니즘은 이 다양한 목소리를 가감 없이 최대한 오롯하게 담아낸다. 물론 누군가는 책이 페미니즘의 정의를 지나치게 느슨하게 잡는 건 아닌지 의문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저자는 비단 여성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프랭크 오션처럼 흑인/남성/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음악인도 팝 페미니즘의 계보에 포함시킨다. 뿐만 아니라 비욘세처럼 기껏해야 남성과의 관계에서 조금 더 적극적인 여성을 노래한 음악인 역시 한 꼭지로 중요하게 다룬다.

 

자칫 나이브함으로 비칠 우려가 있는 이러한 서술은, 그러나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시사점을 갖는다. 첫째, 페미니즘이야말로 휴머니즘이다. 이는 페미니즘 말고 휴머니즘을 외치는 멍청이들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휴머니즘 없는 페미니즘에 열광하는 일부 레디컬 페미니스트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최근 게이를 똥꼬충으로, 난민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매도하며 적과 동지를 선명히 나누려는 움직임이 인터넷 공간에서 적잖은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는 없을지언정, 페미니즘은 성소수자나 유색인종과 같은 소수자와 연대해야만 한다. 다양한 차별과 억압의 경험을 나눔으로써 페미니즘은 오히려 더욱 풍요로워지고, 가부장제에 대항할 힘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프랭크 오션과 같은 음악인은 팝 페미니즘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둘째,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생각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몇몇 불철저함과 실수, 경솔한 행동을 근거로 페미니즘의 모순자기기만을 보란 듯이 떠들어대는 작자들이 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도 사람인데 누군들 실수가 없고, 숨겨둔 욕망이 없겠는가? 유독 페미니즘에 대해서만 강박적으로 무오류성을 요구하는 건 너무나도 치사하고 쫀쫀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 페미니즘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를 깐깐하게 따지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수많은 주의주장을 끌어안되, 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일이다. 실제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던 비욘세는 이후 성녀/창녀/팝스타/아내/어머니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갖고 가면서도 흑인 페미니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이 모든 정체성은 모순 없이 자연스럽게 비욘세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팝 페미니즘의 풍요로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과 달리, 케이팝은 이제 막 페미니즘을 만난 상태다. 아니, 오히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봤을 때 케이팝은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스에이 출신의 수지는 피팅모델 양예원이 당한 불법 누드촬영을 고발하는 국민청원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온갖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레드벨벳의 아이린 역시 페미니즘 소설인 82년생 김지영을 지나가듯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성들의 강렬한 분노를 샀다. 가장 최근의 버닝썬 게이트는 남성 아이돌의 저열하고 징그러운 성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지만, 수사는 답보 상태에 머물러있다.

이처럼 케이팝 페미니즘이 처한 상황은 결코 밝지 않지만, 긍정적인 변화 역시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걸그룹 레드벨벳과 블랙핑크는 청순하고 가련한 여동생이 아니라 쿨하고 멋진 언니이미지를 내세움으로써 여덕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게이와 이민자 자녀, 유색인종을 비롯한 소수자의 감성을 자극했기에 세계적인 팝스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말이다.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울 때라는 말이 있듯, ‘케이팝 페미니즘역시 화려한 비상을 위한 마지막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저자가 케이팝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이런 근사한 책을 써내는 그날까지, 한국어로 노래하는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 음악인은 세상의 편견과 억압을 다음과 같이 되돌려주자!

 

이렇게 부르면 기분이 조크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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