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좋아하는 한국 작가 중 한명이라 손꼽은 이승우의 단편집이다. 문학적 조예가 깊지 못해 작년에서야 그의 대표작인 '생의 이면'을 뒤늦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의 이면'을 읽고 나서 단박에 치밀하고 세밀한 문체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인간 내면 깊숙히 파고드는 그의 촉수와 같은 섬세한 텍스트는 윤대녕의 그것을 보는 듯 했다.

 

 

 

 

 

 

 총 8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은 각기 다른 내러티브 지녔지만,  "과거 기억의 집요함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 로 그 주제는 동일하다 할 수 있겠다.

<심인 광고>를 포함한 작품집 속 등장인물들은 과거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기억에서 한치도 벗어나기 못하고 그 영향 아래 살고 있다. 주인공들은 어느 과거의 기억에 볼모로 잡혀 그 당시 기억에 소환 당해 살고 있는 것이다. 치명적인 기억을 떨쳐내려 하지만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기억의 형태로 화석화되었다가 어느 순간 발굴"된다. 치명적인 기억(좋지 않은 기억은 특히 그렇다)이란 바이러스는 몸 속에 잠복해 있다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선명해지고 단단해져 간다. 일상에선 사라진 듯 보이는 이 기억은 죽음을 앞 둔 순간에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내며 주인공들을 괴롭힌다. 

과연 죽기 직전에는 후회스러운 회한의 기억만 떠오를까 하는 의문이 한편으로는 들지만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죽기 직전에도 딸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자기방어기제를 발휘하며 생을 마감하는 <심인광고> 속 주인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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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 광고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05년 1월
절판


시간의 완고함, 혹은 기억의 집요함이라고 할 만한 어떤 불편함이 소설들 위에 얹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생의 막다른 지점에 도달한 사람의 내면에서 내 소설들은 자주 죄책감을 발견해낸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기억의 집요함에 잡히고 시간의 무거움에 눌리고 회한에 빠짐으로써 사람임을 증명한다는 투의 생각이 이 소설 속에 들어 있다. 좀처럼 소설들이 명랑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기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1쪽

그가 우리의 진지한 말을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터뜨린 웃음 때문에 가볍게 받아들이지 모른다는 우려가 다시 정색을 하게 했다.-15쪽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처럼 아래로 처져 있었다.-51쪽

그녀가 완강하기 때문에 내가 물러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물러서 그녀가 완강해진 것 같기도 하다.-55쪽

어쩌면 특혜인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언제 이 세상에 떠나게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고 마지막을 맞지하지 않느냐. 감사할 일이다. 내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자면 아무래도 혼자인 게 좋을 것 같구나.-75쪽

소설 속에서 시간은 리얼리티와 개연성의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그것의 틀 안에 있어야 하고, 리얼리티의 룰을 준수한다는 걸 분명하게 증명해야 한다. 그 때문에 우연과 불합리와 부조리가 대부분인 현실 속의 사건들이 소설 속으로 들어올 때는 필연과 합리와 조리로 무장되고 재구성된다. 그 과정에서 종종 현실 속의 사건들은, 소설가들로부터, 이번 경우에서 보듯이 그 필연과 합리와 조리를 추궁당한다.-94쪽

소문 따위는, 연인 사이에 믿음이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한쪽이 믿음을 잃어 버리는 순간, 또는 사랑을 포기해 버리는 순간 사소한 얼룩도 돌이킬 수 없는 큰 허물이 되어 버린다. 그 순간, 그 사소한얼룩은 상대방을 더 크게 불신하고 사랑하기를 부담없이 중단하기 위한, 효율적인 핑계의 기능을 한다. -99쪽

과거의 시간이 그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과거가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과거는 기억의 형태로 화석화되었다가 어는 순간 발굴된다. 기억이란 단순한 과거의 집적이 아니라 편집된 과거이다. 편집한다고 하는 것은 지우거나 덮어쓰거나 도려내거나 이어 쓰거나 돌출시키는 제 과정을 포함한다. 발굴된 기억의 화석앞에서 현실은 대체로 허술해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거나 수습을 해보겠다고 끙끙거리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마음을 다잡고 감춰 두었던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그가 어느 대목에선가 어쩔 수 없이 마음의 평형을 잃고 흔들린 것이 그 본보기다.-150쪽

그녀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으려면 내 기억이 아주 많이 흐리멍텅해져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내 기억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선명해지고 단단해져 갔다. 이제 그 기억은 화석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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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박민규가 100회를 맞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작 역시 이전 소설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시선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경쟁사회에서 패배한 루저에 향해 있다. 아직 읽어 보진 못했지만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던 전작과 달리 웃음기를 쫙 뺀듯한 작품같아 더욱 더 기대된다.(물론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도 웃음기를 녹여넣는 것이 박민규의 능력아닌가) 언제나 현실세계 속 사회적, 문화적 콘텍스트와 그물망처럼 엮여 있는 그의 작품은 그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다. 그나저나 그가 새롭게 구상하고 있다는 미국의 포르노그래피와 관련된 소설은 벌써부터 기대된다.

 

 

 

 

 

 

 

한겨레(10.10.08) "34회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박민규씨"   

올해로 탄생 100돌을 맞은 작가 이상이 자신을 빼닮은 후배를 만났다. 단편 <아침의 문>으로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제34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박민규(42·사진)씨의 이야기다. ‘21세기의 이상’이라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과감한 형식 실험과 개성 넘치는 주제의식을 선보여 온 박씨는 “문학상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우리 세대의 로망이자 존경하는 작가인 이상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을 받게 된 것은 기쁘다”고 말했다. 수상을 고사할까 고민하다가 뒤늦게 나왔다는 7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였다.

2003년 장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지구영웅전설>로 한겨레문학상과 문학동네신인작가상을 동시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박씨는 2007년 이효석문학상과 지난해 황순원문학상에 이어 새해 벽두에 최고 권위의 이상문학상 역시 품에 안음으로써 21세기 한국문학의 기대주임을 입증했다.

수상작 <아침의 문>은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이들이 주인공의 자취방에서 약을 나눠 먹고 동반 자살을 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다. 다른 세 사람이 죽은 상태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약을 토하고 되살아난 주인공이 다시 목을 매 죽으려고 의자에 올랐다가,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남 몰래 낳은 아기를 죽이려는 여자를 발견하고 소리쳐 말린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사위원들(김윤식·권영민·윤후명·신경숙·권지예)은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삶의 문제성을 근원적인 생명의 가치에 대한 파괴적인 해석을 통해 새롭게 형상화하고 있”는 점을 수상 이유로 들었다.

“세상에는 모여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고 남 몰래 아기를 낳아서 제 손으로 죽이는 여자도 있더군요. 문득, 그 두 존재가 서로 맞닥뜨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서 쓴 작품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이들은 ‘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모여서 자살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는 어린 생명 역시 답이 안 나오는 탄생이라 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 힘든데도 살아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한다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박씨는 올해 ‘더블’이라는 제목의 두 권짜리 소설집을 한꺼번에 묶어 낸 뒤 역시 두 편의 장편을 동시에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이어지는 ‘80년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88 올림픽을 전후한 무렵을 배경으로 매스게임 이야기를 다룰 거구요, 또 하나는 미국을 무대로 포르노그라피의 세계를 다룰 생각입니다.” 한 달에 3주 정도는 춘천 집필실에서 책 읽고 글 쓰는 단순한 삶을 살며 1주는 집에 와서 가족들과 지낸다는 그는 “이제 등단 8년차일 뿐이기 때문에 여전히 신인이라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쓰려 한다”고 말했다.(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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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의 논리정연하며 젠체하지 않고 쉽게 쓰여진 문체를 나는 좋아하며, 그의 이러한 글쓰기 능력을 존경한다.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하진 않지만 그의 일관된 사상과 이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언행일치는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한겨레 실린 그의 칼럼 하나를 싣는다. 더불어 작년 말에 실린 그의 저작 <예수전>과 그 전에 출간된 칼럼집 또한 함께 싣는다.    

 

 

 

 
 

  


민주주의의 씨앗

민주주의의 회복’이니 ‘민주세력의 연대’니,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바야흐로 민주주의라는 말의 홍수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역시 어원 그대로 ‘인민의 자기 지배’가 가장 보편적인 정의일 것이다. 인민이,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노동자와 서민이 주인인 세상, 그게 민주주의다. 인민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건 단지 인민들이 언론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다. 실제 삶에서, 먹고사는 문제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상태를 누리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인 건 인민들이 바로 그 실제 삶에서 끝없이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 노동’은 그 가장 주요한 현실이다. 비정규 노동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한국처럼 완전하게 자본의 이해만을 구현하는 경우는 없다. 한국의 비정규노동엔 두 가지 의미만 존재한다. 총매출에서 노동자 임금의 비율을 최대한 줄여 자본의 몫을 최대화하는 것, 그리고 노동자의 단결과 조직력을 약화시켜 자본이 노동자를 멋대로 부릴 수 있도록 하는 것. 현재 비정규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58퍼센트인 880만인데, 임금은 정규노동자의 49퍼센트이며 노동조합 조직율은 고작 3퍼센트다. 여기에 청년 세대로 갈수록 비정규노동의 비율이 현격히 높아진다는 점을 보태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가 아니라 이미 파탄 난 상태라 할 수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자본의 탐욕 때문인가? 물론 자본은 탐욕스럽지만 탐욕은 자본의 본디 속성이며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한 그 탐욕은 어떤 식으로든 품고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자본의 탐욕 자체가 아니라 자본의 탐욕이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이다. 그걸 조정하고 관리하는 게 바로 국가 권력이다. 국가 권력이 자본의 편에 서면 인민들의 삶이 무너지고 적절히 제한하면 인민들의 삶이 살아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정권이란 바로 자본의 탐욕을 적절히 제한하면서 인민들의 살림을 현명하게 꾸려나가는 정권이다.
오늘 비정규 노동의 참상이 불과 10여년 동안 진행된 일이라는 사실은 국제적으로도 경이롭게 여겨지곤 한다. 그것은 한국의 국가권력이 지난 10년 동안 어지간히 열심히 자본의 편에 섰다는 뜻이다. 그 10여년 동안 세 개의 정권이 존재했다. 그 중 두 개의 정권은 민주주의의 껍질을 앞세워 자본의 편에 섰고 한 개의 정권은 그 껍질마저 팽개치고 자본의 편에 서고 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정권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 ‘차이’를 내세워 오늘 다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어떠세요. 겪어보니까 그래도 옛날이 그립지요?” 근래 그들 가운데 한 주요한 인사가 강연에서 했다는 말은 그들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파렴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듯한 행태를 지속할 수 있는 건, 그들을‘그래도 현실적인 대안’이라 인정하는 사람들 덕이다. 어떻게든 이명박의 세상에서만 빠져나가면 살 것 같은 싶은 심정이야 누가 다르랴만, 그렇다고 해서‘민주주의의 수호자를 가장한 자본의 수호자’를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인정할 순 없지 않은가?
체험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희망이 없다. 우리가 지난 10년의 체험에서 분명히 배울 때, 이명박뿐 아니라 그 파렴치한 자본의 수호자들 또한 넘어서는 걸 고민할 때, 우리가 좌절과 무력감을 뿌리치고 저 너머 세상을 함께 상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얻을 것이다. (한겨레)  

<출처> : gyuhang.net by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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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화 시키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소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읽고 난 후 엄청난 양의 사유거리를 던져주는 소설과 그렇지 못한 소설.   

이번에 읽게 된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당연 전자의 소설에 속한다. 최근에 나온 신작 '구월의 이틀'을 읽고 난 후 자꾸 장정일이란 작가의 사유세계가 나를 지배하는 것 같아 찾아 읽게 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이상의 필모그래피를 내놓지 않고 있는 감독 중 여균동 감독과 함께 가장 후속작이 기대되는 감독인, 여하튼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언뜻 본 기억이 있는 장선우 감독의 유명한 90년대 영화의 원작이다. 중학교 시절 대학생 누나가 빌려온 비디오로 몰래 한번 본 것이 전부여서, 텍스트로 접하긴 처음인 장정일의 대표 장편 소설이다.     

 

 

 

 

 

 

 

소설가 이승우가 말했듯이 모든 소설은 결국 글쓴이의 이야기이며, 어떤 식이로든 글쓴이의 자전적인 기록일 수 밖에 없다. 결국 '누군가의 사유과 관념을 훔쳐보는 은밀함'이란 매력이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소설읽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저자인 장정일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세상을 향한 자신의 주장을 쉴새없이 내뱉는다. 저자가 독자에게 배설하고자 하는 것은 90년대 초 한국이란 현실세계에서 활발히 논의되었던 사회적, 문화적 화두와 맞닿아있다. 저자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사회 안의 성과 권력 그리고 문학과 소설가의 사회적 역할 등의 수많은 화두를 스스로 던지고 스스로 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소설은 표절작가란 낙인이 찍긴 삼류 소설가 <나>와 여덟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며 은행이라는 억압된 공간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발기부전환자 <은행원>, 어린 시절 남근주의 피해자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바지입은 여자>를 큰 축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하지만 이 세명의 등장인물을 포함한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은 결국 저자의 의견을 독자들에게 피력하는 메신저에 불과한 것이다. 시인이자 희곡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이번엔 소설이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여러 사유과 관념을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문학이 사회를 변혁 혹은 변화 시킨다는 믿음에 대하여 이는 소설가들의 자아도취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여전히 문학과 소설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여전히 믿고 있다. 다만 그가 무학의 사회적 역할에 비관적으로 답하는 것은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나대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정치, 경제, 시민사회 등 다양한 분야로 흩어져 '운동권이자 인텔리'였다는 후광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는 변절자들에 대한 조롱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또한 여타 소설 속의 일관된 매개체라 할 수 있는 '성적 욕망'을 이 소설에서도 역시 화두로 던지며 세상 사람들의 위선을 조롱하고, 쾌락의 자유를 주창한다. 그에겐 섹스란 초등학생이 받아쓰기 만점을 맞으면 찍어주는 '참 잘했어요' 도장과 같으며, 삶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그 무엇이다.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사건이 뒤엉켜있고, 결말도 급진적이어서 전체적으로 다소 판타지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저자의 풍부한 사유세계와 사회문화적인 박학다식함을 엿볼 수 있는, 최근에 본 것 가운데 으뜸이 되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ps. 너무 오랜 전에, 그리고 너무 어린 나이(?)에 감상했던 영화라서, 문성근(나)과 정선경(바지입은 여자)을 제외하곤 그 외의 등장인물들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은행원>은 여균동이었나?  아님 <색안경>이 여균동이었나? 암튼 다시 한번 영화를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이젠 이런 파격적이고 의식있는 영화는 안 나올 것인가? 

ps2. 소설을 보다 보니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영화 속 이름이 선댄스다. 어라 선댄스라면 미국 최고 권위의 선댄스 영화제의 그 선댄스 아닌가? 로버트 레드포드가 후원하여 시작되었다는 그 선댄스 영화제. 그 소설 속 주인공 선댄스가 선댄스 영화제의 그 선댄스가 맞나 싶어, 박학다식하고 친절한 네이버에 물어보니 역시 맞다. 인간이란 역시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사유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한 작은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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