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인 광고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05년 1월
절판


시간의 완고함, 혹은 기억의 집요함이라고 할 만한 어떤 불편함이 소설들 위에 얹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생의 막다른 지점에 도달한 사람의 내면에서 내 소설들은 자주 죄책감을 발견해낸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기억의 집요함에 잡히고 시간의 무거움에 눌리고 회한에 빠짐으로써 사람임을 증명한다는 투의 생각이 이 소설 속에 들어 있다. 좀처럼 소설들이 명랑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기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1쪽

그가 우리의 진지한 말을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터뜨린 웃음 때문에 가볍게 받아들이지 모른다는 우려가 다시 정색을 하게 했다.-15쪽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처럼 아래로 처져 있었다.-51쪽

그녀가 완강하기 때문에 내가 물러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물러서 그녀가 완강해진 것 같기도 하다.-55쪽

어쩌면 특혜인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언제 이 세상에 떠나게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고 마지막을 맞지하지 않느냐. 감사할 일이다. 내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자면 아무래도 혼자인 게 좋을 것 같구나.-75쪽

소설 속에서 시간은 리얼리티와 개연성의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그것의 틀 안에 있어야 하고, 리얼리티의 룰을 준수한다는 걸 분명하게 증명해야 한다. 그 때문에 우연과 불합리와 부조리가 대부분인 현실 속의 사건들이 소설 속으로 들어올 때는 필연과 합리와 조리로 무장되고 재구성된다. 그 과정에서 종종 현실 속의 사건들은, 소설가들로부터, 이번 경우에서 보듯이 그 필연과 합리와 조리를 추궁당한다.-94쪽

소문 따위는, 연인 사이에 믿음이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한쪽이 믿음을 잃어 버리는 순간, 또는 사랑을 포기해 버리는 순간 사소한 얼룩도 돌이킬 수 없는 큰 허물이 되어 버린다. 그 순간, 그 사소한얼룩은 상대방을 더 크게 불신하고 사랑하기를 부담없이 중단하기 위한, 효율적인 핑계의 기능을 한다. -99쪽

과거의 시간이 그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과거가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과거는 기억의 형태로 화석화되었다가 어는 순간 발굴된다. 기억이란 단순한 과거의 집적이 아니라 편집된 과거이다. 편집한다고 하는 것은 지우거나 덮어쓰거나 도려내거나 이어 쓰거나 돌출시키는 제 과정을 포함한다. 발굴된 기억의 화석앞에서 현실은 대체로 허술해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거나 수습을 해보겠다고 끙끙거리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마음을 다잡고 감춰 두었던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그가 어느 대목에선가 어쩔 수 없이 마음의 평형을 잃고 흔들린 것이 그 본보기다.-150쪽

그녀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으려면 내 기억이 아주 많이 흐리멍텅해져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내 기억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선명해지고 단단해져 갔다. 이제 그 기억은 화석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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