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중들에 의해 자유주의자라 불리우는, 혹은 스스로 자유주의자연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정확히 10년 전만 해도 고종석은 강준만씨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 자유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한 마디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십대 초반 여느 대학생이 그렇듯) 굶주린 늑대마냥 제 입맛에 맞는 이데올로기 혹은 정념의 고기 덩어리를 찾아 이리 저리 방황 하던 나 또한 그의 명성을 듣고 <서얼 단상>, <코드 훔치기>등의 저서를 찾아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20대의 젊음은 경사 15도의 완만한 개혁이 담긴 철학에는 만족하지 못했고 경사 90도 이상의 급진적이고 자극적인 그런 이념들을 설파하는 지식인에 더 끌렸다. 그렇게 내 기억속엔 "바른 말을 하는 언어학자 출신 고종석"은 한켠으로 퇴장하고 말았다.  

그렇게 근 10년이 흘렀고, 나는 그 누구 못지 않게 10도 이하의 지극히 평범한 이념적 각도, 그 언저리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10년 전 그대로) 여전히 경사 15도의 완만한 개혁적 철학을 지닌 고종석의 소설을 손에 들었다. 

나의 이념적 각도는 급격하게 하강했고,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딱 그 자리에 존재했다. 나는 변해있었고, 그는 한결 같았다.  

그의 한결 같음에 나는 부끄러운 동시에 반가워 어쩔 줄 몰라했다. 여전히 그는 박학다식했으며, 한국에서 자연언어를 가장 잘 쓴다는 문장가라는 상찬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문체는 담박하고 유려하다.  

소설 <독고준>은 기자 출신이자 언어학 박사인 고종석의 역사에 대한 비평(혹은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팜플렛이라고 할수도 있겠다)이자, 책에 대한 서평인 동시에,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그의 이러한 견해를 표현하긴 위한 형식에 불과하다. 소설 속 독고준의 딸인 "원"도 사실은 독고준(혹은 저자인 고종석)의 글들은 갈무리하고 보충해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에서 눈에 띄는 건 시대적 사건(역사)대한 저자의 정치적 견해와 수많은 문학 작품(특히 시가 많다)에 대한 서평들이다. 이 둘이 고종석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두 가지 키워드라 할 수 있겠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고종석은 그 어떤 지식인보다 정치적이지 않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을 억압하고, 집단적 정념과 사상을 강요하는 지리멸렬한 시대가 그의 정치적 견해를 발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일반적으로 문예학 사전에서 '소설'을 "산문 형식으로 쓴 긴 분량의 허구적인 이야기"라고 정의한 그 '소설'과는 어느 정도 구분되어 진다. 

또 다른 정체성인 <언어학자>로서의 고종석의 모습은 시, 소설, 철학에 조예가 깊은 소설가 <독고준>으로서 발현된다. 김수영, 한택수부터 로맹가리, 사르트르 심지어 유시민, 진중권까지. 그의 독서 편력은 글로 표현되는 모든 장르에 관심의 안테나를 드리운다. 그리고 서평을 통해 전달되는 깊이있는 통찰력까지. 문학가로서의 고종석의 장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이번 소설은 단지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아깝다. 한때 유행했던 단어인 종합 예술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해 보인다. 오랜만에 맞딱드린 고종석은 변함이 없었고, 여전히 그의 문체는 간결했고 핍진성이 뛰어났다. 

p.s : 궁금한 점 혹은 흥미로운 점은 소설 속의 대부분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반면, 강준만 선생은 왜 현우림이란 가명으로, 그리고 오규원 시인은 오서경이란 이름으로 등장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들과 친분이 있는 작가의 언어유희일까? 뭘까? 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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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어요 반갑네요 ㅋ

서재를 둘러보니까 저랑 비슷한 시기에 알라딘을 시작했군요

묘한 친밀감이..... 아무튼 이 리뷰 보니까 저는 이렇게 촘촘하고 좋은 감상문

쓸 자신이 없어지네요 ㅎㅎㅎ

에로틱번뇌보이 2010-12-1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매버릭꾸랑님~ '독고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리뷰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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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념 작가였으되, 경색된 이념이 인간 내면의 악마적 부분과 결합할 때 역사에 어떤 상처를 내지는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의도되지 않은 상처'를 찬찬히 묘사했다.-19쪽

거리로, 광장으로 나가는 걸 삼가고 누추한 밀실에서 역사의 진행에 곁눈질하는. 그러나 나는 내가 기여한 반 없는 민주주의의 덕을 보게 될 것이다. -45쪽

권력은 착한 사람을 악하게 만들고, 유약한 사람을 경건하게 만든다. 아니, 차라리 뻔뻔하게 만든다.-50쪽

사실 어떤 자연 언어에서든, 속담이나 관용구에는 '비윤리적 지혜가'담겨 있는 일이 흔하다. 나이나(넒은 의미의) 계급은 윤리와 무관하다. -73쪽

한 자연언어를 나무에 비유하자면 스타일리스트의 산문은 아름답게 뻗어나간 가지들이지, 그 몸통이 될 수 없다. 한 자연언어에는 스타일리스트이 개성적인 글 이전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익혀야 할 어떤 표준적 문장, 교과서적 문체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 표준적,교과서적 문장을 익히지 않은 채, 섣불리 스타일리스트의 문장만을 흉내내다가는, 겉멋만 배어 있을 뿐 문법에도 어긋나고 논리도 풀어진 나쁜 문장에 버릇 들기 십상이다.-122쪽

소설이나 시의 천재를 가지고, 쓰지 못해 발광을 할 때는 세상이란 이상스러워서, 청탁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런 재주가 고갈되고 나서야 청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깐 무릇 시인이나 소설가는 청탁이 밀물처럼 몰려올 때는 자기의 천재는 이미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세상은 참 우습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이 거룩한 속물들)-136쪽

전통 사회에서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다. 동아시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흔히 유자 또는 선비라고 불렀고, 유럽에서는 리테라티라고 불렀다.-144쪽

누구나 자기보다 나이가 아래인 사람의 좋은 책을 처음 읽을 때 기분이 묘해진다. 그 묘한 기분은 일종의 열패감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독자와 아예 세대가 다른 젊은 저자의 책을 읽을 땐, 그 책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열패감이 사라진다. 비교의 욕망, 경쟁의 욕망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격렬하게 흘러나온다.-148쪽

산다는 것은 기억을 축적하는 과정이자, 축적한 기억을 잃어버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축적의 속도가 상실의 속도보다 빠를 때 사람들은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는다.-197쪽

역사의 진척(또는 후퇴) 속에서 개인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할지는 골치 아픈 문제다. 아무튼 아버지는 집단적 정념을 두려워했다. 아마 그것이 아버지로 하여금 공산주의를 혐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221쪽

아이러니는, 기요틴의 발명과 사용이 사형수들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인도주의'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224쪽

'대중화 저자(popularizer)'라는 말은 어느 사회에서나 깊은 존경심을 달아 발설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앎의 세계에서 이들이 맡고 있는 역할은 매우 크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은 흔히 문장이 거칠고, 대중을 매혹할 만한 문장가들은 전문 지식이 모자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식의 생산자들과 소비자들을 이어주는 대중화 저자들은 전문 지식과 문장력을 겸비해야 한다.-235쪽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하여 기성체제를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서 '남용'이라는 말은 긍정적 뜻빛깔을 지닌다.-251쪽

극단의 탐미주의는 파시즘과 통한다. 하라키리는 신경질의 소산이다. -260쪽

그 사적인 미움은 개인의 행태를 통해서 역사를 주조한다.-261쪽

어제 소위 민주정의당이 창당됐다. 한국어를 위협하는 것은 한글학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외래어가 아니다. 이름과 실체가 일치하지 않을 때, 그 이름은, 곧 언어는 타락한다. -301쪽

'나무'라는 작은 출판사에서 나온 <그 여자의 재봉틀>은 소위 '문지 진영'에서나 '창비 진영'에서나 다 같이 상찬을 한 작품이다. 김수영 시들이나 조세희의 <난쏘공>을 둘러싼 현상이 이 소설을 둘러싸고도 일어난 것이다. 문지 진영에서는 <그 여자의 재봉틀>의 문체와 상상력을 상찬했다. 그리고 창비 진영에서는 이 소설이 노동계급과 연대를 꾀하고 있다고 상찬했다. 문지진영에서는 <그 여자의 재봉틀>이 모더니즘의 전범이라고 말했고, 창비진영에서는 그 문체나 수법과는 상관없이 이 작품이 마치코바 노동자들의 삶을 핍진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주장했다. -325쪽

이 손으로 다름 사람 손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 살갗과 살갗을 서로 부빌 수 있다는 것, 이런 게 다 행복해요-360쪽

서정시는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의 노래다. 거기서는 시인과 시적 화자가 온전히 겹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소설가는 자기와 무관하거나 자기에게 적대적인 인물들을 창조해, 그들이 놀 자리만 마련해주고 자기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서정시인은 그럴 수 없다. 남성 시인이 여성을 시적 화자로 삼을 때도, 노년의 시인이 어린이를 시적 화자로 삼을 때도, 시인과 시적 화자는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이 서정시가 수필과 공유하고 있는 운명이다. 서정시는 운문으로 쓴 수필이고, 수필은 산문으로 쓴 서정시다. -365쪽

시적 화자의 외침처럼 이 시들은 깊은 심리적 상처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의 시들은, 모든 진정한 예술이 그렇듯, 스스로 주변으로 밀려남으로써, 스스로 상처가 됨으로써, 시대의 야만성과 궁핍성을 증언한다. -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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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김 없이 가을이 온 줄 알았더니 스산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고 나이는 또 한살 먹는다. 오늘따라 인생이 허기지는구나. 

1. 한국 독립 다큐의 대부 김동원 전/강성률, 맹수진 외 지음/서해문학  

 

 

 

 

 

 

  

 

 2. 술꾼의 품격/ 임범 지음/네 21북스 

 

 

 

 

 

 

  

  

3.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윤대녕 지음/ 푸르메 

  

 

 

 

 

 

   

 

4. 인생히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한창훈 지음/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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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3대 세습. 이에 대한 진보 내의 3대 체제 비판, 이에 대한 재반박.  황장엽씨의 죽음과 현충원 안장 논란.  일련의 북한 관련 논란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한겨레 칼럼(http://hook.hani.co.kr/blog/archives/13785)이 인상적이어서 옮겨본다.  어라 근데 칼럼니스트의 나이가 83년생. 제법 어리다. 오우~

황장엽과 리콴유, 어떤 반민주주의자들의 판타지
 

공교롭게도 황장엽은 노동당 창건 65주년 되는 날에 세상을 떠났다. 적국으로 망명 온 (전향도 하지 않은) ‘주체사상의 창시자’의 죽음은 한반도 이북에 있는 권력집단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조선노동당은 황장엽과 함께 욕실에서 사망했고, 저 텔레비전 화면 속의 열병식의 주최자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체계화에 기여를 했지만, 조선노동당이 ‘맑스-레닌’을 벗어던지고 ‘김일성의 당’임을 선포하게 되는 시대 변화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어찌됐건 황장엽의 망명은 북한 체제가 그들이 말하는 ‘우리식 공산주의’에서도 이탈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장례는 ‘통일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있고, 정부는 그를 대한민국을 위해 몸바쳐 싸운 이들이 묻혀 있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고 싶어 한다. 남한 망명 후 여생을 암살의 위협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인간적 정리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황장엽이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공헌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황장엽은 수십 년의 생애를 대한민국을 절멸하려는 욕망을 가진 저 북쪽 ‘공화국’의 ‘리론가’로써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그가 망명 후 북 권력집단의 추악한 실체를 폭로한 ‘공로’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 것은 아니다.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이 만든 주체사상은 문제가 없는 아름다운 사상이었는데, 김일성이 이것을 개인적인 우상숭배에 활용하면서 북한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해왔다. 안기부는 황장엽이 망명한 직후 ‘황장엽의 주체사상’에 대해 설명하는 해설서까지 내주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황장엽에 대한 한국의 자칭 ‘보수 우파’들의 반응은 그들의 머릿속에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곧잘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자’라고 칭하지만, 이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북한 체제를 부정한다는 차원에서의 ‘자유민주주의’다. 그들은 대체로 ‘밥 먹이는 독재자’를 찬양의 대상으로 삼고, ‘밥 굶기는 독재자’를 경멸하려 든다. 이것이 그들이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김정일을 변별하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황장엽이 북쪽에서 가지고 내려온 ‘주체사상’이 지도층에 대한 인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이념이란 것은 이들에게 큰 문제는 아니다. 이들에게 문제는 김정일이 밥을 굶기고 있다는 것이고, 밥을 굶기지 않으려면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민들이 사유재산을 늘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동하면서 북한 김정일 체제를 규탄하는 정부의 입장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주체사상 이념의 정권”이 한국 사회의 ‘보수 우파’들의 바라는 사회상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들에게 반대하는 소위 민주화 세력,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사회는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 황장엽이 사망하던 날의 열병식과 함께 공식화된 북한 체제의 ‘3대 세습’ 문제는 이미 그 이전부터 남한 ‘진보 세력’의 화두가 되어 있었다. 북한 체제에 대한 내정간섭이 부당하다는 민주노동당의 논평에 대한 경향신문 사설의 비판이 있었고, 이에 맞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국가보안법의 논리’로 사태를 재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몇몇 지식인들이 갑론을박했지만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프레시안에 실린 역사학자 김기협씨의 글이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 현실에 맞는 ‘진보’를 추구했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노무현이 보수면 뭐 어떠냐?’라는 앞뒤가 안 맞는 질문으로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좌파’들을 질타했던 이 노무현 지지자는, 싱가포르 리콴유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습은 절대악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의 권력세습 문제를 우리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김기협의 주장은 좌파나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김대중·노무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김기협의 발언은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리콴유의 권력세습’으로 ‘인민을 굶기는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옹호할 수는 없다는 기본적인 오류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소위 ‘민주화 세력’이 한국 보수 우파들이 독재자를 변별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가 의문시 되는 것이다. 대체로 리콴유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박정희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다. 박정희의 ‘위인전’을 완성한 월간조선 전 편집장 조갑제씨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리콴유와 박정희는 ‘지도자’를 좋아하는 아시아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위대한 지도자’들이다. 우익들이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김정일을 변별하는 방식이 ‘밥’이라면, 김기협에겐 무엇이 있는가?

 

차라리 김기협이 아예 박정희까지 긍정해 버린다면 그의 발언을 ‘소신있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하되 그의 방식이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사회에선 통용될 수는 없고 이제 우리에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기협은 <뉴라이트 비판>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긍정 평가하는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을 매섭게 쏘아붙인 사람이다. 뉴라이트를 비판한다고 박정희를 전면 부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김기협의 저술에서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하는 구절을 찾지는 못하였다. 더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리콴유의 ‘세습’을 옹호하는 것은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옹호하는 것보다도 훨씬 독재자에게 친화적이다. 언론자유를 부정하고 도시의 청결함에 과잉집착하는 그의 통치행위는 전두환의 3S정책보다도 더 이전에, 장발족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박정희 시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발전된 자본주의와 결합한 박정희식 ‘한국적 민주주의’의 체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적어도 한국 사회는 3S 시대를 넘어 문화산업 정책을 펼쳐낸 지난 ‘잃어버린 10년’ 동안 싱가포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생적인 대중문화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이 대중문화의 자본친화성에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대중문화가 김기협이 그렇게 신봉하는 ‘삶의 질’을 높여주는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김대중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적 특수성’을 주장한 리콴유에 맞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반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더랬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느 노무현 지지자의 리콴유 찬양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어떠한 지반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를만큼 몰역사적인 거다.

 

이 두 개의 반민주주의적 판타지의 실상을 들춰보니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주체사상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대립, 한반도의 1970년대를 남북으로 가르던 그 대립이 한반도 남부를 동과 서로 가르며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웃긴 것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들이 ‘주사파’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믿는 그 집단인 것이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독재자의 딸’에 이를 벅벅가는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김기협의 논리는 김대중·노무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논리가 아니고, 김대중·노무현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라도 박정희를, 리콴유를, 그리고 박근혜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김기협이 가지고 있는 1970년대의 환상은 우리가 말했던 ‘민주화’가 민주주의 이론을 제대로 체현한 것이 아니라, 독재자들의 ‘무능함’을 민주화 세력이 대체할 수 있다는 차원의 논리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리콴유를 규탄할 때라도, 김대중과 노무현을 예찬할 때 우리는 은연 중에 그런 관점을 가지고 그들을 과거의 독재자들과 비교한다. 그리고 두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들이 독재자들보다 ‘유능’했던 점은 역시 ‘시장자유’를 더 제대로 인정했다는 점에 있는 바, 우리의 민주화는 곧바로 ‘신자유주의’를 향해 돌진하게 되는 것이다. 김기협의 ‘오버’는 그가 속한 집단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지 못하지만, 어째서 민주화 세력의 지지자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지지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외설적인 대상이다.

 

그리하여, 2002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은 2007년엔 이명박을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고, 오늘날엔 다시금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명박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 한윤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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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트위터에서 '이마트 피자' 관련 멘션이 자주 보이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이마트 내 피자 판매에 대한 네티즌의 비판에 대해 정용진이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냐?" 라며 조소에 가까운 답변이 논란이 된 거였다. 조국 교수의 말대로 국가와 시민이 답할 차례지만 현재 정부하는 꼬라지를 보면 국가에는 당분간 이런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고, 시민이 답하고 행동할 차례다. 금일 조국 교수의 한겨레 칼럼을 옮겨본다.

 < “이념적 소비?” 국가와 시민이 정용진에게 답하라>_조국 칼럼

‘파워 트위테리안’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개인적 관심이나 회사경영 전략 등을 수시로 트위터에 올리며 수많은 ‘팔로워’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필자는 젊은 CEO의 이러한 ‘소통경영’의 모습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최근 트위터상 ‘이마트 피자’를 둘러싼 정 부회장을 발언을 두고 논쟁이 벌여져 화제를 모았다.

‘이마트 피자’ 설전

이마트가 시중의 피자보다 크기는 크면서 가격은 저렴한 즉석 피자를 판매하여 폭발적 매출을 올리는데 대하여, 네티즌들이 이러한 행위는 중소 피자가게의 몰락을 초래한다고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에게 비판을 제기하자 이 ‘시장 강자’는 냉정하게 반박했다. 즉,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나? 많은 분들이 재래시장 이용하면 그 문제는 쉽게 해결되고 어차피 고객의 선택이다.” “님이 걱정하는 만큼 재래시장은 님을 걱정할까요?”라는 조소와 함께.

이마트는 롯데슈퍼나 홈플러스처럼 기업형 슈퍼마켓(SSM) 사업을 직접 벌이지는 않고 있다. 대신 이마트는 동네상점에 물품을 공급하는 도매유통업에 진출하고, 이마트 내에서 판매 품목을 확장하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사회적 쟁점이 된 SSM 문제에 직접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실속은 SSM 진출 대기업과 똑같이 챙기는 영리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정 부회장의 트위터 답변은 대기업과 중소상인과의 관계에 대한 대표적 대기업 CEO의 직설적 반응이었기에 대응이 필요하다.

먼저 중소상인의 생태계를 살리는 윤리경영을 하라는 호소는 정 부회장에게 먹히지 않을 것 같다. 미국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나온 정 부회장이 ‘대기업 프렌드리’가 제도적으로 고착화된 현재의 경제 질서 속에서는 대기업과 중소상인 사이에 공정경쟁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이 때 소비자의 선택은 사실상 시장 강자에 의해 조종된다는 점을 모를 리 없다. 그가 현행법상 허용되는 이윤추구를 그만 둘리도 없다. 이제 공은 국가와 시민에게 와있다.

 “사자와 소를 위한 하나의 법은 억압이다”

정 부회장이 ‘이념’을 말하니 헌법의 경제이념부터 보자. 헌법 제119조는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한다. 헌법은 자유경쟁의 이름 아래 시장 약자를 몰락시키는 경제질서를 상정하지 않는다. 일찍이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사자와 소를 위한 하나의 법은 억압이다”라고 갈파하였다. 사자와 소를 한 울타리에 넣어 놓고 자유롭게 경쟁하라고 하는 것은 사자보고 소를 잡아먹으라는 얘기와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칸막이를 만드는 국가의 역할이 긴요하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칸막이를 만드는 시늉만 하고 있다. 예컨대, 기업형 슈퍼마켓(SSM)은 전국적으로 급증하고 있지만, 중소기업청을 통한 사업조정권고는 1년에 5건 정도만 이루어지고 있다. 6.2 지방선거를 앞 둔 지난 4월, 재래시장의 경계로부터 500m 이내는 SSM 입점을 제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과, 대기업 직영 SSM과 프랜차이즈형 체인점포를 사업조정대상에 포함시키는 대중소기업상생촉진법 개정안이 국회 지식경제위원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선거 후 한나라당은 입장을 바꾸어 대중소기업상생촉진법 개정안 처리에 반대하고 있다. 당내에서 SSM 규제시 WTO 제소가 우려된다 또는 FTA 체결에 지장을 준다 등의 주장이 나온다. 도대체 어떠한 법적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미 OECD 다수 국가는 지자체 조례를 통하여 중소상인의 매출영향 평가, 지역 주민의 동의를 대형 상가점포 신설의 조건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생각건대, 헌법 경제조항의 이념이 구현되려면, OECD 나라의 예를 참조하여 SSM 규제 법률 제개정 등 중소상인의 ‘생태계’를 보호하는 제도를 마련할 것을 정부와 의회에 요구하고, 이러한 제도개선을 반대하는 정치인 낙선 운동을 벌이는 등 주권자 시민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념적 소비’, ‘착한 소비’를 하자
  

한편 시민은 정 부회장이 비웃는 ‘이념적 소비’를 보란 듯이 실천해야 한다. 가격과 편리함만을 기준으로 구매를 판단하는 소비행태에서 한 걸음을 벗어나 보자. 시민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 대기업이 ‘문어발’을 뻗으면 화를 내면서, 다른 분야에 진출한 대기업의 상품과 서비스는 “싸고 질 좋다”며 애용하는 모순을 종종 드러낸다. 사실 이러한 즉자적 선택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리고 중소상인들도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자구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이 재래시장, 동네 상점, 동네 카페, 지역생산자조합이 만든 ‘로컬 푸드’ 등을 외면하고 대기업 백화점, SSM, 대기업 소유 프랜차이즈 카페, 대기업 생산 음식 등을 향해서만 달려갈 경우 그 결과는 무엇일까(참조로 신세계는 스타벅스 코리아 지분의 50%를 갖고 있다). 대기업은 영역확장을 위한 ‘무한도전’을 계속할 것이고, 자본력과 유통망에서 비교할 수 없는 중소상인과 생산자조합은 계속 몰락할 것이다. 시민 사이의 ‘연대’는 붕괴하고 시장 강자에 대한 자발적 복종만이 남을 것이다. ‘소비자 주권’은 사라지고 시장 강자의 군림만이 남을 것이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한 구조조정의 여파로 2010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전체 인구 대비 자영업자의 비율은 25%를 넘는다. 이 수치는 다른 OECD 나라의 약 10%에 비하여 매우 높다. 주변을 둘러보면 저금과 퇴직금을 가지고 자영업에 나섰다가 다 날리고 가족 전체가 무너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민은 눈물을 머금고 가게 문 닫는 이웃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미래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 첨단 기술제품도 아닌 피자, 어묵, 떡볶이, 순대, 튀김까지 대기업의 것을 소비할 필요성이 어디 있는가. 정 부회장은 조소했지만, 시민은 위세부리는 이익과 힘의 논리 앞에서 서로를 걱정하고 배려해야 한다. 정 부회장의 말대로 재래시장이 소비자를 걱정하지는 않을 지 모르지만, 이마트처럼 위세를 부리지는 않는다. 가격과 편리함을 유일 잣대로 사용하지 않는 ‘착한 소비’, 공정과 연대의 가치, 인간의 체온이 스며든 소비가 필요한 시간이다. 게다가 정 부회장도 당당히 재래시장을 이용하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 하자. 보란 듯이! 당장 모든 소비를 ‘착한 소비’로 할 수 없더라도 좋다. 지금 보다 조금씩 한걸음씩 ‘착한 소비’ 쪽으로 움직여보자.

“문둥이 콧구멍의 마늘 빼먹을 놈아!”

오래 전 돌아가신 할머니는 야박하게 이익을 챙기고 돈을 밝히는 사람을 보시면 경상도 사투리로, “에라이, 문둥이 콧구멍의 마늘 빼먹을 놈아!”이라고 쏘아주셨다. 자본은 그 본성상, 한센병 환자가 치료를 소망하며 콧구멍에 넣어 놓은 마늘까지 빼먹는다. 국가의 개입과 시민의 각성이 없을 때 자본은 고삐풀린 이윤극대화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시민이 주권자로서 헌법의 경제이념을 구현하는 법규 제정을 국가에 요구하고 동시에 ‘이념적 소비’를 실천할 때 정용진은 피자팔기를 그만둘 것이다.
 

- 한겨레 신문, 201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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