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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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념 작가였으되, 경색된 이념이 인간 내면의 악마적 부분과 결합할 때 역사에 어떤 상처를 내지는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의도되지 않은 상처'를 찬찬히 묘사했다.-19쪽

거리로, 광장으로 나가는 걸 삼가고 누추한 밀실에서 역사의 진행에 곁눈질하는. 그러나 나는 내가 기여한 반 없는 민주주의의 덕을 보게 될 것이다. -45쪽

권력은 착한 사람을 악하게 만들고, 유약한 사람을 경건하게 만든다. 아니, 차라리 뻔뻔하게 만든다.-50쪽

사실 어떤 자연 언어에서든, 속담이나 관용구에는 '비윤리적 지혜가'담겨 있는 일이 흔하다. 나이나(넒은 의미의) 계급은 윤리와 무관하다. -73쪽

한 자연언어를 나무에 비유하자면 스타일리스트의 산문은 아름답게 뻗어나간 가지들이지, 그 몸통이 될 수 없다. 한 자연언어에는 스타일리스트이 개성적인 글 이전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익혀야 할 어떤 표준적 문장, 교과서적 문체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 표준적,교과서적 문장을 익히지 않은 채, 섣불리 스타일리스트의 문장만을 흉내내다가는, 겉멋만 배어 있을 뿐 문법에도 어긋나고 논리도 풀어진 나쁜 문장에 버릇 들기 십상이다.-122쪽

소설이나 시의 천재를 가지고, 쓰지 못해 발광을 할 때는 세상이란 이상스러워서, 청탁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런 재주가 고갈되고 나서야 청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깐 무릇 시인이나 소설가는 청탁이 밀물처럼 몰려올 때는 자기의 천재는 이미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세상은 참 우습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이 거룩한 속물들)-136쪽

전통 사회에서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다. 동아시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흔히 유자 또는 선비라고 불렀고, 유럽에서는 리테라티라고 불렀다.-144쪽

누구나 자기보다 나이가 아래인 사람의 좋은 책을 처음 읽을 때 기분이 묘해진다. 그 묘한 기분은 일종의 열패감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독자와 아예 세대가 다른 젊은 저자의 책을 읽을 땐, 그 책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열패감이 사라진다. 비교의 욕망, 경쟁의 욕망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격렬하게 흘러나온다.-148쪽

산다는 것은 기억을 축적하는 과정이자, 축적한 기억을 잃어버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축적의 속도가 상실의 속도보다 빠를 때 사람들은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는다.-197쪽

역사의 진척(또는 후퇴) 속에서 개인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할지는 골치 아픈 문제다. 아무튼 아버지는 집단적 정념을 두려워했다. 아마 그것이 아버지로 하여금 공산주의를 혐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221쪽

아이러니는, 기요틴의 발명과 사용이 사형수들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인도주의'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224쪽

'대중화 저자(popularizer)'라는 말은 어느 사회에서나 깊은 존경심을 달아 발설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앎의 세계에서 이들이 맡고 있는 역할은 매우 크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은 흔히 문장이 거칠고, 대중을 매혹할 만한 문장가들은 전문 지식이 모자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식의 생산자들과 소비자들을 이어주는 대중화 저자들은 전문 지식과 문장력을 겸비해야 한다.-235쪽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하여 기성체제를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서 '남용'이라는 말은 긍정적 뜻빛깔을 지닌다.-251쪽

극단의 탐미주의는 파시즘과 통한다. 하라키리는 신경질의 소산이다. -260쪽

그 사적인 미움은 개인의 행태를 통해서 역사를 주조한다.-261쪽

어제 소위 민주정의당이 창당됐다. 한국어를 위협하는 것은 한글학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외래어가 아니다. 이름과 실체가 일치하지 않을 때, 그 이름은, 곧 언어는 타락한다. -301쪽

'나무'라는 작은 출판사에서 나온 <그 여자의 재봉틀>은 소위 '문지 진영'에서나 '창비 진영'에서나 다 같이 상찬을 한 작품이다. 김수영 시들이나 조세희의 <난쏘공>을 둘러싼 현상이 이 소설을 둘러싸고도 일어난 것이다. 문지 진영에서는 <그 여자의 재봉틀>의 문체와 상상력을 상찬했다. 그리고 창비 진영에서는 이 소설이 노동계급과 연대를 꾀하고 있다고 상찬했다. 문지진영에서는 <그 여자의 재봉틀>이 모더니즘의 전범이라고 말했고, 창비진영에서는 그 문체나 수법과는 상관없이 이 작품이 마치코바 노동자들의 삶을 핍진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주장했다. -325쪽

이 손으로 다름 사람 손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 살갗과 살갗을 서로 부빌 수 있다는 것, 이런 게 다 행복해요-360쪽

서정시는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의 노래다. 거기서는 시인과 시적 화자가 온전히 겹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소설가는 자기와 무관하거나 자기에게 적대적인 인물들을 창조해, 그들이 놀 자리만 마련해주고 자기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서정시인은 그럴 수 없다. 남성 시인이 여성을 시적 화자로 삼을 때도, 노년의 시인이 어린이를 시적 화자로 삼을 때도, 시인과 시적 화자는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이 서정시가 수필과 공유하고 있는 운명이다. 서정시는 운문으로 쓴 수필이고, 수필은 산문으로 쓴 서정시다. -365쪽

시적 화자의 외침처럼 이 시들은 깊은 심리적 상처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의 시들은, 모든 진정한 예술이 그렇듯, 스스로 주변으로 밀려남으로써, 스스로 상처가 됨으로써, 시대의 야만성과 궁핍성을 증언한다. -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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