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올곧은 빨갱이, 자신의 신념 하나만은 꼭 지키며 살아온 아버지가 아버지 다운 죽음을 맞이하며 소설은 시작한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7P
사실 첫 문장에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버지가 주인공인 이야기인 것 같았는데 시작하자마자 돌아가시다니, 실망도 잠시, 바로 뒷장을 읽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와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아버지 고상욱씨는 1948년 5.10 단선 반대 유인물을 살포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때 성기에 전선을 꽂는, 전기 고문을 당했고, 이 이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단호하고 모호한 눈빛인, 45도 오른쪽을 보는 후천적 사시를 가진 눈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이십 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향에 터를 잡았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초짜 농부가 된다.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는 <새 농민>이라는 책을 탐독했고 책으로만 짓는 농사는 당연히 매번 망하는 농사엔 젬병인 농사꾼이었다.
아버지의 주변인도 아버지만큼이나 독특했는데.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의 빨갱이 사상 때문에 자신의 집안을 망하게 했다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일 평생 아버지를 원수로 여겼고 세상사 모든 사건 사고를 엮어 아버지 탓으로 돌리는 인물이었다.
박 선생이란 사람은 아버지의 술친구이자 빨치산 형을 가진 인물로, 자신은 고등학교 시절 학도병으로 끌려가 빨갱이인 자신의 친구와 동료들에게 총을 겨눴던 어찌보면 빨치산의 적폐(?)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장례식장에 봉투를 들고 나타났는데, 조의금인 줄 알았던 봉투 속 금액이 주인공이 아버지에게 매번 붙였던 돈의 남은 금액이란 걸 알게 된다. 아버지는 보증에 사기당하면서도 사기당한 자신의 처지보다 사기 친 사람의 처지를 더 안타깝게 생각하며 자신이 기꺼이 그 빚을 감당하는 한결같은 인물이었고, 딸에게 받은 돈도 허투루 쓰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하루 사천 원만 꼬박꼬박 쓴 그의 일상에 하염없이라는 단어를 나에게도 각인시키게 했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찾는 사람의 전화를 거절하지 못하고 오죽하면 자신을 찾았냐는 한마디로 새벽부터 뛰쳐나가 일을 돕는 사람이었으며, 암내 때문에 시집을 못 가게 생긴 처자 수술을 위해 도움을 마다 하지 않는 분이었다.
절친한 동무이자 죽은 동지의 부인을 아내로 맞이한것이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이야기도 아버지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둔 십 대 여학생과 맞담배로 친분을 쌓고, 친딸인 자신보다 더 가까이 아들처럼 대했던 학수란 인물도 꽤나 두터운 인연임을 사후에 알게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모여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었다.
한 번만 와도 되는 장례식장에 아버지의 지인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했다. 아버지와 그들의 인연들은 생각보다 더 깊어 보였고, 평생을 알아온 아버지의 모습과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 속속 드러나는데 단단한 아버지의 한결같음이 오히려 인간미 넘쳐 보이게 했다. 시끌벅쩍한 3일이 지나 아버지는 재가되어 유골함에 담겨 주인공의 손에 놓인다. 실제로는 고작 4년을 빨치산으로 살아왔지만 평생 빨치산으로 불리며 살아온 삶, 신념 하나로 자신을 만들어왔던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마무리해주기 위해 원래 모시려던 산에서 과감하게 내려와 그의 흔적들을 마을 곳곳에 남기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공산주의자를 뜻하는 빨갱이, 빨갱이는 도덕적으로 파탄적인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민족을 배신한 존재로 표현되며 어떠한 비난도 감수해야 하는 사람으로 칭해졌는데, 내가 만난 주인공의 아버지는 굉장히 신념이 올곧고 나보다 남을 위해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미안함을 알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싫은 내색 한번 하지 못하고, 자신이 빨갱이라는 것에 조금도 부끄럼 없는 사람, 아버지의 장례식이 그의 마지막일지 모르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펼치면 멈출 수 없게 만든 구수한 말투들과 따뜻한 마음이 글 속에 녹아있어 죽음으로 시작된 아버지가 다시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을 책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한시대를 담아낸 한 권의 책, 꽤나 흡입력 있는 작가님의 문체에 빠져서 읽고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던 올해 첫 책이었고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