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여름 - 류현재 장편소설
류현재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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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름이 그런 것은 아니다.

유난히 무화과 익어가는 향기 진동하고,

은빛 병어가 그물에 다닥다닥 꽂힌 채 입을 벙긋거리고,

백중사리 때맞춰 늦태풍이 올라온다 소식 들리면

바다와 땅, 바람과 달이 공모해

이곳 사람들을 흥분시켜 사람 하나를 잡고야 만다.

마을 사람이 죽지 않으면 파도가 죽은 이를 실어다 놓는다.

그런 책들이 있다. 독서하는 동안, 매우 다채로운 색깔의 감정을 일으키는 책들. 나에게는 [ 네 번째 여름 ] 이 그런 책이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바다와 섬에서, 만선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고전문학이었다가, 순수한 연인들의 사랑이 빛나는 로맨스 소설로 변하더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범죄 추리 스릴러라는 옷으로 갈아입는 책. 이 작은 책 한권에 한편의 대하 드라마가 녹아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성추행 가해자에게 단호한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소문난 검사, 정해심. 그런데 그런 그녀가 너무나 당황스러워할 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최근 치매 진단을 받고 요양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정만선이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되게 된 것. 사정인 즉슨, 아버지가 파킨슨 병을 앓아서 말을 못 하는 한 할머니를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해괴망측한 일을 벌였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유독 성과 관련된 사건에서만큼은 단호하게 처리해온 해심이기에, 아버지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뭔가 찜찜하게 여겨지는 구석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평소에 어머니로부터 귀에 딱지에 앉도록 들어온 말. 식물만큼, 아니 식물보다도 더 이성에게 관심이 없다는 아버지가 할머니를 대상으로 성추행이라니... 이건 앞뒤가 안 맞아도 너무 안맞는 일이다. 도대체 아버지 정만선에게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 네 번째 여름 ] 은 주인공 정해심의 아버지 정만선이 추행 사건을 벌인 현재를 기점으로 하여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건을 비춤과 동시에 그가 남해 앵강만 어장을 이끄는 동정호의 선주인 정표세의 아들로 살아가던 과거의 모습도 보여준다. 정해심은 노련한 검사답게 피해자의 주변인물을 꼼꼼하게 탐문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정황들을 파악해 나간다. 과거를 역추적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나가던 그때, 정해심은 가해자인 아버지와 피해자인 할머니가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이 책은 여러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설킨,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서, 현재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그 뿌리부터 철저하게 밝혀나가는 소설이다. 이 사건은 일제 시절, 일본인이 소유했던 남해 앵강만의 동정호 어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이 주는 순수한 선물인 어망 가득 물고기들이 있었다. 꽃섬에서는 낚시를 했고 누군가는 물질을 하며 물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한 편의 영화 같은 이 장면 속엔, 누군가의 추악하고 광적인 욕망과 집착과 또 다른 누군가의 오해와 피눈물로 이루어낸 복수도 있었다. 잔잔한 바다 속 격렬하게 몰아치는 파도같은 과거의 사건들은, 그러나, 현재의 성추행 사건의 진실을, 그 슬프고도 한 맺힌 진실을 드러낸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내 인생책 중 하나인 [ 가재가 노래하는 곳 ] 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부모의 돌봄없이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던 소녀 카야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삶이 펼쳐지던 그때, 그녀 삶의 균형을 깨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가 머물던 곳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녀가 누명을 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책인데, 잔잔하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법정 씬을 만나면서 마치 태풍처럼 몰아친다. 솔직히 그 부분이 매력적이었다.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연과 잔혹한 광기를 보여주는 사건을 다룬 책, 이 [ 네 번째 여름 ] 그런 소설인 듯 하다.

정말 몰입도가 최상인 책이고 그만큼 독서의 감동이 컸다. 과거를 하나하나 역추적하면서 진실이 조금씩 베일을 벗을 때 마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고통과 아픔을 느꼈다. 엄마 잃은 덕자가 되기도 했고 아빠 잃은 해심이 되기도 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가 슬픔이 온 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역시 ( 이렇게 말하면 안되는건지도 모르겠지만 ) 여성 작가의 섬세함이 진하게 와닿는 그런 책이다.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지금까지 그런 여름이 세 번 있었다.

첫 번째 여름에 내 아버지가 죽었고,

두 번째 여름에 그 남자의 아버지가 죽었고,

세 번째 여름에는 내 남편이 죽었고,

네 번째 여름에는 내가 죽을 것이다.

그 전에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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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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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잃을 수 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이 되기만 한다면

이 책은 한 나라의 몰락과 파멸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불운이라는 악마가 휘감아 빠른 속도로 추락하는 베네수엘라를 그려내고 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무덤에 묻힌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신의 무덤을 파헤쳐 같이 묻힌 소장품을 훔쳐가고, 정부에 반대하는 평화 시위를 벌인 자들은 지하에 있는 감옥에 끌려가서 두들겨맞거나 총구로 강간을 당하고 결국에는 사지가 절단되기도 한다. 물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하여 현금 수십 뭉치로도 약을 살 수 없어서 사람들이 죽어간다.

책을 들여다보자면, 세계에서 가장 큰 석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가 이제 지옥으로 변했고, 시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죽인다.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시민들은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여 재산을 뺏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믿는 정도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베네수엘라의 지옥과도 같은 상황은 다른 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는다. 때때로 보도되기는 하지만,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 정도로 세세하고 심각하게 보도되고 있지는 않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지옥과도 같은 상황.... 책이 현실을 얼마나 담고 있는 걸까?

사실 책이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저자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와 주인공이 정말 많이 닮아있다는 점이다. 서른대의 나이, 언론계에서 근무했다는 점, 피난을 갔다는 점 등등... 그런 것만 봐도, 한때 어깨를 감싸 안았던 이웃이 이웃을 약탈하고 공격하고 강간하는, 이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진실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주인공 아델라이다의 일인칭 관점에서 쓰여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제대로 된 병원치료도 받지 못하고, 약을 구하지도 못해 세상을 떠야만 했다. 아델라이다는 이제 어머니도 없고 연인도 없는 혈혈 단신이 되었다. 베네수엘라의 사회 불안은 점점 심해져서 이제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독자들은 그녀의 어머니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혁명의 아이들이라는 테러 집단과 정부와 손잡은 여러 무리들에 의해서 목숨을 잃는 상황을 보게 된다. 결국, 아델라이다의 아파트에 정부와 손을 잡고 사람들을 약탈하고 재산을 앗아가는 무리의 여자들이 침입하여 아델라이다는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자신의 옆집 여인인 아우로라 페랄타가 어떤 연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스페인 여권을 이용해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소설을 읽고 있자니 분노와 슬픔 그리고 아픔이 몰려온다. 우리 나라도 한때 정부와 군부의 군화발에 우리의 이웃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또다시 그러한 비극을 경험하는 나라를 지켜보자니 너무 안타까웠다. 아델라이다는 이제 베네수엘라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처럼 보인다. 살아남기 위해서 온 힘을 다 하고 있지만 사실 일단 탈출하고 난 뒤에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 계획은 없다. 사실 그녀는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삶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절실하다.

이 책은 난민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죽음과 삶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삶을 향하는 누군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면 효과적으로 그 느낌을 전달하는데는 조금 실패하지 않았나 싶다. 생과 사의 중간에서 자칫하면 어둠의 골짜기로 낙하할 수 있는 아델라이다의 절실한 모습을 독자들에게 조금 덜 전달되었지 않았나 싶다, 좀 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표현과 속도감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산티아고와 아델라이다의 만남, 여자 보안관이 이끄는 테러 집단들의 침입 그리고 옆집 여자의 죽음 등등등 몰입감이 있는 장면들이 있긴 하나 이야기가 조금 늘어지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어쨌건 지옥과도 같이 변해버린 베네수엘라의 상황이 이 책을 통해서 너무나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폭력과 만행을 자행하는 정부와 사람들을 보며 분노에 치를 떨어야 했다. 우리에게 잊지 못할 과거를 생각하게 해 준 [ 스페인 여자의 딸 ]. 희망을 잃어버린 채 탈출 준비를 하던 아델라이다는 지금 무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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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트리플 4
임국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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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수진은 한 만화영화가 완결 날 때마다 말로 다 표현할 길 없이 서글펐다.

결말을 본 순간 수진은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홀로 퇴장하거나 추방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랑하던 그들은 이제 나랑은 무관한 세계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겠지 ”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 집에 돌아가면 나를 맞이하는 건 어둠이 살짝 깔린 작은 방 그리고 TV 였다. 부모님은 직장일 때문에 바쁘셨고 언니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러나 현실의 친구보다 더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TV 속 존재들이었다. 둘리와 친구들이 뭉쳐서 심술남 고길동을 괴롭힐 때 함께 웃었고 ( 어른이 되어보니 참... 어진 아저씨였다 길동님 ㅠㅠ ) 달려라 하니에서 하니가 엄마를 그리며 달리기 할 때 그녀와 함께 울었다.

그러다 만화가 끝나면? 나는 어두운 방 한 구석에서 외로움에 몸서리쳐야했다. 지독한 허무함이라고 할까? 가상 속 세계에서 항상 기쁘고 즐겁고 별 걱정없이 함께 놀아주던 친구들이 그날의 임무를 마치고 사라지면 나는 비참하고 외롭고 힘든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그래서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매일 매일 만화에 허덕였던 나는... 방구석 애니키드? ㅋㅋ 어쨌건 나를 키워준 건 적어도 7할이 만화였다. ( 이 상투적인 문구 ㅋㅋㅋ )

이 책 [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 도 만화, 게임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통해 맺어지는 관계와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외롭고 초라하고 남루하기 그지 없는 현실을 벗어나 가상의 세계로 날아가면 엄청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과 함께 매직봉을 휘두르며 불의에 맞서는 공주가 될 수도 있고 강호를 쥐락펴락하는 영웅이 될 수도 있다. 짜릿한 모험 속에서 우정과 사랑 그리고 실연과 단절을 통해 인생을 배운 그들을 만나보자.

첫번쨰 이야기 [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 속 만경은 일 때문에 아버지가 항상 집에 없어서 저녁 시간이 널널한 수진의 집에서 함께 만화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낸다. 비록 만화라는 영역에서는 확고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투명한 존재인 만경은, 인기 많고 활달한 수진을 보며 그녀를 선망한다. 어느날, 오빠에게 쥐어터진 수진을 불쌍하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얻어맞은 날도 이상야릇한 기쁨에 휩싸인 만경은.... 어쩌면 매직봉을 휘두르는 수진을 따라다니는 집사역할을 택한 건지도 모르겠다.

같은 중학교에 입학하고도 친하게 지내던 그들은, 함께 미술 동아리에 가입하게 된다. 거기서 특정 만화 속 주인공을 빼다박은 지수를 만나게 되는 만경. 그는 지수에게 한 눈에 반해버린다. 이대로 수진과 지수 그리고 만경이 만화 속 주인공들 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천년 만년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현실은 어찌 이다지도 가혹한건지. 어느날 수진과 지수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만경은 그날로 그들과 인연을 끊게 된다. 그들의 세상이 무너지고 말았고 이제 과거는 어른이 된 만경의 기억 속에서 파편화된 이미지로만 존재하게 되는데....

[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 속 3편의 작품 -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코인노래방에서, 추억은 보글보글 - 은 등장 인물들의 관계로 인해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1편에서 혹은 2편에서 조연으로만 존재하던 수진 오빠와 만경 형의 브로맨스가 3편에 등장하고 2편에는 만경과 수진의 못다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펼쳐진다. 끝이 찝찝했던 영화의 속편이 이어지면서 뭔가 완결이 난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점이 좋았던 것 같다.

작가의 필력이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레트로의 느낌을 물씬 살려줘서 그런지, 이 책의 작품들은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등등 우리가 한창 감성이 예민할 적에 느꼈던 친구들과의 우정 사랑 그리고 동성 친구들에게 품곤 했던 이상 야릇한 마음 (?) 을 너무나 잘 표현해주고 있다. 터프한 언니한테 반해서 꽃과 초콜렛을 갖다 바친 추억이 보글보글 솟아 오르고 예쁜 친구에게 한 눈에 반해, 친구 이상의 마음을 품고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 참 민망하지만 ) 떠오른다. 그때는 내가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성장통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임국영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매우 신선하고 톡톡 튀는 글솜씨를 가지고 있고 현실을 그려내는 감각이 남다른 것 같다. 그냥 나와 우리들의 학창 시절, 멋모르고 까불던 시절을 그대로 책으로 옮겨놓은 것 같아서 읽는 동안 너무 너무 즐거웠다. 이 책을 색깔로 치면 무지개색? 음악으로 친다면 옛날 노래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한 것 같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 상투적 문구 2 ) 나를 낳아준 것이 부모님이었다면 나를 키워준 건 그들이다. 브라운관 ( 지금은 패널 ) 속에 존재하는 그들 - 정의를 위해 싸우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 이 나머지를 채워줬다고 하면 너무 큰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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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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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시대, 두 인종, 두 가족

한 발의 총성으로 깨어나는 도시의 암울한 역사 "

미국이라는 다인종 국가에서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 문제는 비단 오늘 내일 문제가 아니다. TV에는 백인 경찰들이 무장하지 않은 흑인들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뉴스가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도 " Black Lives Matter, Too ( 흑인들의 삶도 소중하다 ) "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최근에는 코로나와 관련해서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거나 폭력까지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많은 듯하여 심히 우려스럽다.

그래도 현재는 인터넷과 같은 채널을 통해, 우리가 실시간으로 이런 일들을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간 사건도 허다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서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온 사건이 있었다. 바로 " LA 폭동 "인데, 백인 경찰들이 흑인인 로드니 킹을 무차별 구타하고는 아무런 법적 처벌 없이 넘어가서 거기에 분노한 흑인들이 일으킨 폭동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흑인들은 당시 LA에 살던 아시아인들을 향해 분노를 폭발했다. 그들의 가게에 침략해서 물건을 훔치고 생명을 빼앗고 건물에 불을 질렀다. 혐오가 혐오를 낳고 폭력이 폭력을 낳았던 것일까?

이 책 [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는 LA 폭동이 발생했던 시점과 현재를 오고 가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인종 간의 혐오와 갈등을 다루고 있다.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데다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어서 생생한 현장감이 전달된다. 비록 인종과 인종 사이에 발생한 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용서와 희망이라는 빛을 비추는 듯하여 좋았다. 단지 흥미 위주의 스릴러가 아닌, 진정으로 사회적 모순을 돌아보고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 간의 화합을 모색해보는 작품인 [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 속으로 들어가 본다.

주인공 숀 ( 아프리카계 미국인 ) 은 어릴 적 슈퍼를 운영하던 한 한국인 여자의 손에 누이 에이바를 잃었다. 단지 우유를 사러 들어갔을 뿐인데 그 작은 아시아계 여자는 누이가 우유를 훔치러 온 것으로 착각을 했고 거기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에이바는 한국인 여자가 기절할 수 있을 정도로 폭행을 가했다. 그녀는 가지고 있던 총으로 에이바의 뒤통수에 대고 쏘았고 에이바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다. 당시 한국인 여자는 과실치사 혐의를 받고 30년 정도 지난 현재,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숨어서 살고 지내고 있다. 부모를 잃은 채 에이바에게 의지한 채 살아가던 숀은 이제 하늘 아래 실라 이모 한 분뿐이다.

그레이스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2세이다. 그녀는 다른 한인 2세들과 달리, 엄격하고 통제가 심한 한국인 부모님의 말에도 고분고분하게 교회를 다니고 약국을 함께 운영하며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너무 성실하고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부모님이 너무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머니 이본과 큰 마찰을 겪은 후, 부모님과 말도 섞지 않는 언니 미리암 때문에라도 자신이 부모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했던 그레이스와 그레이스 가족의 삶에 엄청난 변고가 발생하고 마는데....

이 책에는 숀과 그레이스의 가족 외에도 많은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범죄를 저지르다가 교도소에 다녀온 사촌 레이, 교도소에 간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오랫동안 그의 부재를 겪어야 했던 레이의 아들,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왠지 부정하고 싶어 하는 듯한 그레이스의 언니 미리암, 그리고 백인이면서 유독 미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종에 대한 혐오와 차별 문제에 주목하는 기자... 이 책은 그들의 눈으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바라보고 있다. 어떤 문제는 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 비극을 더 발생시키지 않을 수 있는지를 그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고 해야 할까?

영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가족이 등장하고 한국인 마트와 김밥이 등장해서 꽤 친숙한 소설이었던 [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 그러나, 마냥 가볍게만 다룰 수 없는 주제인 인종에 대한 혐오와 차별 그리고 세대를 내려가면서 발생하는 비극을 다룬 책이라,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한국인들만이 형제 자매가 아니구나. 인간과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요소들 - 가족, 삶, 사랑 등등 - 을 공유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가 아닐는지.. 인종을 가르는 구호 말고, 서로에게 연민을 가지고 용서할 수 있는 한마디를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 [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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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 폴리스 - 홍준성 장편소설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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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끊임없이 흘러가고,

흩어졌던 것들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다시 끼워 맞춰지기 마련이다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는 장소와 시간 속에 위치했던 비뫼시. 이곳은 난쟁이와 꼽추 그리고 노숙자와 빈민들이 어울려사는 북쪽마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미지의 세계이다. TV가 있고 열기구가 발명된 문명 사회인데, 희한하게도 왕권통치가 등장하고 수도원의 입김이 쎄다.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라니!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문구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

" 도랑 옆에 쳐진 야영 천막들마다 너무나도 배가 고프기 때문에 돈 한 푼 안 주고 비스킷만 준다 해도 기꺼이 일할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

" 이들 대부분은 튀어나온 광대뼈와 툭 불거져나온 턱만 보일 만큼 몰골이 형편없었고, 덕분에 이들은 지적이거나 도덕적인 본성을 지닌 인간이라기보다는 상당히 발전한 동물에 가까워 보였다 "

존 스타인 벡의 " 분노의 포도 " 와 피터 스털리브레스의 " 그로테스트와 시민의 형성 " 에 나오는 문구인데 이런 식으로 낯익은 문구들이 이야기와 절묘하게 결합된 채 내내 등장한다. 실험정신이라고 해야할까? 이 책은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고전과 명저에 등장하는 문구들을 이야기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 카르마 폴리스는 전혀 다른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읽은 듯한 낯익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토리에 상관없이 이 책에 흠뻑 젖어들 듯 하다.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앞서 이야기했던 빈민촌에 살고 있는 유리 부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오랫동안 청소 용역직에 몸담아왔던 터라 고질병인 관절염을 앓고 있는데 박쥐 끓인 물이 질환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겨움을 참고 박쥐탕을 마신다. 그 이후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임신이 된 그녀. 한편 당시 비뫼시를 다스리던 가시 여왕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부실 시공으로 건설된 댐이 폭우이후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대홍수가 발생하여 도시가 물에 잠기는데, 특히 실패자들이 살아가던 북쪽 마을은 거의 수몰지구처럼 되면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다.

( 선진국 때문에 발생하는 오염이 일으킨 자연 재해가 개발 도상국에 해를 입히는 요즘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한 대목 ) 유리부인과 남편도 목숨을 결국 잃게 되지만 유리 부인 뱃속에 있던 아이는 살아남아 후에 수도원에서 꾸리는 고아원에서 42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한편, 북쪽 마을의 반대편에 도시의 지배층이 살고 있는데 이들 중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가시여왕이 있다. 한때 그녀는 마약에 찌든 선왕의 광기 때문에 아들처럼 살아야 했던 비극적 과거사를 가지고 있다. 그로 인해, 여동생을 잃고 자신도 괴로움에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러던 찰나, 한 초월적 존재를 만나고 나서 그녀의 마음 속에서 뭐라고 할까? 아주 순수한 악의 결정체? 같은 것이 탄생한다. 감정에 휘둘리던 약하디 약한 인간에서 이제는 차가운 이성의 지배를 받는,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응징을 가하는 신인류가 되었다고 할까? 물론 나쁜 의미에서 말이다. 그녀는 초월적 존재를 만나고 난 후 ( 기이하게도 박쥐처럼 생긴 존재 ) 그녀도 임신을 하게 되는데, 이후 태어난 왕자는 42번과 묘한 연관관계를 갖게되는데....

[ 카르마 폴리스 ] 는 질병이 창궐하고 유령이 노래하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던, 인류의 역사 중에도 광기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그냥 역사를 풀어내었다기 보다는 현대의 인류가 겪고 있는 여러 모순들 ( 환경오염, 권력자들의 부패 등등 ) 도 함께 담아내고 있다. 비뫼시라는 상상의 공간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의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볼 수 있겠다. 굳이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시대의 뒷골목을 날아가지 않아도 되고 미국 대공황 시대를 날아가지 않아도 된다. 이 책에 모든 것이 녹아 있는 듯 하다.

이 책은 전혀 에상치 못했던 재미를 전달해주었다. 비뫼시라는, 현대도 아닌 중세도 아닌 그 중간 어디에 속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인간의 나약함과 걷잡을 수 없는 광기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런데 그 광기에 불을 지르는 것은 누구? 인간은 스스로가 저지르는 것이라 볼 수 있겠지만 글쎄...... 감당할 수 없는 광기와 충동에 불을 지르고는 뒤에서 웃고 있는 존재가 있다. 인간 중심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힘이 이 비뫼시라는 곳을 내내 강타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신이 인간에게 던지는 매우 잔인하고 허무하고 냉소적이고 파괴적인 농담이 이야기 내내 흐르고 있는 듯 하다. 결국 우리는 " 모략 " 을 통해서 살아가고 " 도덕과 이성 " 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우리는 " 파괴 " 하고 " 혼란 " 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걸... 마지막에 날아가는 한 동물의 뒷모습이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실험 정신과 상상력에 감탄할 뿐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비뫼시의 42번이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독서에 열중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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