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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여름 - 류현재 장편소설
류현재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5월
평점 :
모든 여름이 그런 것은 아니다.
유난히 무화과 익어가는 향기 진동하고,
은빛 병어가 그물에 다닥다닥 꽂힌 채 입을 벙긋거리고,
백중사리 때맞춰 늦태풍이 올라온다 소식 들리면
바다와 땅, 바람과 달이 공모해
이곳 사람들을 흥분시켜 사람 하나를 잡고야 만다.
마을 사람이 죽지 않으면 파도가 죽은 이를 실어다 놓는다.
그런 책들이 있다. 독서하는 동안, 매우 다채로운 색깔의 감정을 일으키는 책들. 나에게는 [ 네 번째 여름 ] 이 그런 책이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바다와 섬에서, 만선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고전문학이었다가, 순수한 연인들의 사랑이 빛나는 로맨스 소설로 변하더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범죄 추리 스릴러라는 옷으로 갈아입는 책. 이 작은 책 한권에 한편의 대하 드라마가 녹아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성추행 가해자에게 단호한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소문난 검사, 정해심. 그런데 그런 그녀가 너무나 당황스러워할 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최근 치매 진단을 받고 요양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정만선이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되게 된 것. 사정인 즉슨, 아버지가 파킨슨 병을 앓아서 말을 못 하는 한 할머니를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해괴망측한 일을 벌였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유독 성과 관련된 사건에서만큼은 단호하게 처리해온 해심이기에, 아버지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뭔가 찜찜하게 여겨지는 구석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평소에 어머니로부터 귀에 딱지에 앉도록 들어온 말. 식물만큼, 아니 식물보다도 더 이성에게 관심이 없다는 아버지가 할머니를 대상으로 성추행이라니... 이건 앞뒤가 안 맞아도 너무 안맞는 일이다. 도대체 아버지 정만선에게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 네 번째 여름 ] 은 주인공 정해심의 아버지 정만선이 추행 사건을 벌인 현재를 기점으로 하여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건을 비춤과 동시에 그가 남해 앵강만 어장을 이끄는 동정호의 선주인 정표세의 아들로 살아가던 과거의 모습도 보여준다. 정해심은 노련한 검사답게 피해자의 주변인물을 꼼꼼하게 탐문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정황들을 파악해 나간다. 과거를 역추적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나가던 그때, 정해심은 가해자인 아버지와 피해자인 할머니가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이 책은 여러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설킨,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서, 현재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그 뿌리부터 철저하게 밝혀나가는 소설이다. 이 사건은 일제 시절, 일본인이 소유했던 남해 앵강만의 동정호 어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이 주는 순수한 선물인 어망 가득 물고기들이 있었다. 꽃섬에서는 낚시를 했고 누군가는 물질을 하며 물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한 편의 영화 같은 이 장면 속엔, 누군가의 추악하고 광적인 욕망과 집착과 또 다른 누군가의 오해와 피눈물로 이루어낸 복수도 있었다. 잔잔한 바다 속 격렬하게 몰아치는 파도같은 과거의 사건들은, 그러나, 현재의 성추행 사건의 진실을, 그 슬프고도 한 맺힌 진실을 드러낸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내 인생책 중 하나인 [ 가재가 노래하는 곳 ] 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부모의 돌봄없이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던 소녀 카야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삶이 펼쳐지던 그때, 그녀 삶의 균형을 깨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가 머물던 곳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녀가 누명을 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책인데, 잔잔하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법정 씬을 만나면서 마치 태풍처럼 몰아친다. 솔직히 그 부분이 매력적이었다.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연과 잔혹한 광기를 보여주는 사건을 다룬 책, 이 [ 네 번째 여름 ] 그런 소설인 듯 하다.
정말 몰입도가 최상인 책이고 그만큼 독서의 감동이 컸다. 과거를 하나하나 역추적하면서 진실이 조금씩 베일을 벗을 때 마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고통과 아픔을 느꼈다. 엄마 잃은 덕자가 되기도 했고 아빠 잃은 해심이 되기도 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가 슬픔이 온 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역시 ( 이렇게 말하면 안되는건지도 모르겠지만 ) 여성 작가의 섬세함이 진하게 와닿는 그런 책이다.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지금까지 그런 여름이 세 번 있었다.
첫 번째 여름에 내 아버지가 죽었고,
두 번째 여름에 그 남자의 아버지가 죽었고,
세 번째 여름에는 내 남편이 죽었고,
네 번째 여름에는 내가 죽을 것이다.
그 전에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