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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왕국 ㅣ 유산 시리즈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0월
평점 :
"나는 더 이상 내가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해 내려 노력해야 한다."
N.K.제미신은 몇 년 전 부서진 대지 시리즈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작가이다. 땅을 뒤흔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들인 "오로진" 그들은 차별과 억압을 피해 조용히 살다가 갑자기 닥친 불행한 사건을 계기로 내면의 힘에 눈뜨게 된다. SF 소설이라 미래를 배경으로 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인류의 과거와 기원을 다루는 느낌이 들어서 오래된 미래가 떠올랐던 소설이었다.
이번에는 그 천재적인 작가의 데뷔작인 유산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 [ 십만 왕국]을 읽게 되었다. 이책도 부서진 대지 시리즈 못지않게 대단히 독특하다. 우선 신과 인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뒤섞여 살 뿐 만 아니라, 신들이 노예처럼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회가 그려진다. 강력한 권위를 바탕으로 거대한 대륙을 통치하는 아라메리 가문의 사람들은 신이 가진 힘을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 질서, 등을 상징하는 신 이템파스를 모시는 아라메리 가문은 이교도 행위 등 어긋한 짓을 하는 자에겐 가차 없이 죽음을 안기는 다소 잔혹한 사람들이다.
주인공 예이네는 후진 국가인 다르의 지도자였다. 그녀는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외할아버지가 통치자로 있는 세늠 대륙의 중심지인 하늘궁으로 소환된다. 외할아버지인 데카르타는 후계자가 2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낯선 자나 다름없는 아예네를 후계자로 지명하지만, 그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다. 낮은 지위의 남자와 결혼한 죄로 쫓겨났던 어머니 키네스,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이 데카르타와 관련이 있다는 의혹마저 예이네에게 있는데, 자신을 후계자로 임명한 데카르타의 의도는 뭘까?
어쨌든 후계자로 임명된 예이네가 할 일은 정치적 암투에서 살아남는 일. 특히 그녀의 이모에 해당되는 데카르타의 딸 시미나의 공격은 노골적이다. 그녀는 밤의 신인 나하도스의 능력을 이용하여 예이네의 목숨을 노리게 되는데....
제미신 작가의 작품이 으레 그러왔듯, 이 작품도 굉장히 복잡하고 광범위한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거기에 신과 인간이 뒤섞이고, 다양한 인종과 계급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순혈과 반혈, 즉 어떤 피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고, 이마에 새겨진, 계급을 의미하는 인장을 가지고 있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이 책이 특이한 이유는, 신과 인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신은 낮에는 인간으로 살다가 밤이 되면 초월적으로 변하고 굉장히 위험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차피 아라메리 가문의 발아래에 묶여있는 노예 신세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분노에 찬, 불순한 눈빛으로 호시탐탐 쿠데타를 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예이네가 하늘궁으로 오게 된 순간, 그녀는 굶주린 야수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이야기의 전부일까? 냉혹하고 잔인한 아라메리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자신만의 미션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게 이 소설의 핵심이다.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 정치적 암투와 이해관계를 파악해가면서, 어머니에 대한 비밀, 그리고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비밀의 열쇠를 찾아가는 예이네.. 처음에는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하느라 다소 힘들었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세계관이 뚜렷해지면서 이야기가 점점 재미있어진다. 특히 집요하게 주인공을 유혹하는 위험한 남자이자 밤의 신인 나하도스라는 캐릭터가 두드러진다.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목숨까지 내줘야 할 듯한 야수 같은 신 나하도스.. 과연 예이네의 운명은????
풋내기에 불과했던 인물이 점점 내면의 힘에 눈을 뜨게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는 영웅 서사시인데, 아마도 뒤로 갈수록 치명적인 로맨스 (나하도스와)가 그려질 듯. 그러나 뭔가 그와의 관계에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 같기도... 출생의 비밀? 굉장히 신선하고 독특한 판타지이다. 새로운 판타지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하고픈 소설인 [십만왕국]
"신과 인간의 운명을 둘러싼 압도적 스케일의 대서사시,
21세기 판타지 소설의 지표 N.K. 기념비적 데뷔작"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