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들
최유수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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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시작과 동시에 영원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가벼워진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눈에 띄지 않는 모호한 미소.

너의 그 미소.

나는 평소에는 구조가 좀 뚜렷한 글을 즐겨 읽는다. 말하자면 서론, 본론, 결론이 뚜렷하고, 특히 광기 어린 반전(?)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추리 소설이나 범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성향 때문인 것 같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문제가 발생하고 주인공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쏘다니는 그런 글. 가독성도 높고 치열하게 읽을 수 있는 글.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책 [환상들]은 전혀 다른 글이다. 생각의 조각, 즉 편린들을 잠은 글이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 즉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쓴 글이라는 느낌이다.

이런 글을 "시적 산문"이라고 해야 하나? 작가가 살면서 깨우친 진리나 자유로운 상상 등을 담고 있는 글이라 문장 하나하나가 대단히 아름답고 밀도가 높다. 뚜렷한 주제의식이 있기보다는 내면의 소리를 담은 이야기 같기도 하다. 저자는 세상과 삶을 관조하는 듯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사실 삶을 경쟁적으로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외부로 눈을 돌린다. 그들은 현상에 관심이 더 많고 추상적인 관념이나 개념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저자는 그들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인 듯하다. 자신 안의 빛을 발견하려는 사람이다.

글의 소재들은 다양하다. 혼자만의 사색, 미술관에서의 체험, 노랫말이 있는 음악을 잘 듣지 않게 된 이유 등등등.... 어떻게 보면 사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이런 소재들이다. 아주 감각적이고 환상적인 작가의 시각을 담고 있는 글인데,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서인지 굉장히 공감이 가는 대목들이 많았다. 요즘은 잔잔한 피아노 음악 아니 클래식에 이끌리는 편인데, 작가님도 그러신 듯. 32쪽 "노랫말이 없는 음악은 어떤 시간 속에 고정된 감정들이 내가 있는 공간을 배회하면서 가만히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다. 강렬한 뒤흔듦보다는 수평선의 고요가 좋아진다. (..) 어떤 말도 필요 없을 만큼 한없이 고요해지고 싶다."

32쪽에 나온 문장 말고도 공감이 가는 대목이 많았다. 42쪽에 등장하는, 홀연히 사라지는 인물이 되는 상상.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심지어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모르고 있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뿐, (...) 연락이 닿는 모든 수단을 닫아두고 깨끗이 고립되는, 그래서 지금껏 '나'로서 존재해온 나 자신의 초기화하는 시간." 나도 완전히 혼자인 여행을 상상해 보는데 말이다. 작가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건 바로 직전의 과거를 받아 적기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뭔가 알듯 말듯 아리송한 문장이지만 공감이 갔다. 언어란 형식일 뿐... 기억도 일종의 각본일 뿐... 작가는 진정한 감각을 위해서 껍데기를 버리려는 것 같다. "나는 일기를 쓰는 대신에 들판에 모닥불을 피운다. 들개 몇 마리가 불 곁으로 둘러 모인다. 우리는 함께 셀프 카메라를 찍는다. 그 사이 늦서리가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 책에는 아주 추상적인 개념들이 많이 등장한다. 기억, 꿈, 사랑... 이 중에서 "기억"이라는 주제에 대한 글이 많은 편이다. 102쪽 "기억의 또 다른 이름은 무덤이다. 그것이 어디론가 파묻히고 안치되기 때문에. 그러니 잘만 묻어둔다면, 다시 파내고 끄집어내지 않는다면, 그곳에 영원히 고요한 안식이 있으리라. 186쪽 "다 타서 재가 된 시간들이 벚꽃잎처럼 흩날린다. 되감기와 되풀이. 맨 앞에 선 '나'는 백 년 무패의 영웅처럼 돌아선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것들 중 "기억"이라는 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이미 흩어져 버렸지만 어떤 기억들은 정말 뚜렷하게 남아서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행복하게 한다. 작가님이 그런 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나 싶었다.

작가님과 함께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음악을 들으면서 삶을 생각하고, 멀어진 인연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기분이다. 철학적이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감각적이라고 느껴졌던 책 [환상들]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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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팅 데이
이현진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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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여도 되는 날, 내가 다시 착한 아이가 되었다고 믿는 엄마를 속이고,

하루쯤은 평범하지 않아도 용서가 되는 날이었다.

예전에 아주 흥미로운 미드를 본 적이 있다. 아들, 남편 할 것 없이 자기 가족에게 야금야금 상처를 입히고 결국은 돈 때문에 그들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던 한 사이코패스 여자. 그러나 딸의 이 무시무시한 계획을 눈치챈 엄마가 선수를 쳐서 자신의 손으로 딸을 처단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손자의 안전을 위해... 당시 딸의 숨통을 조르던 엄마의 표정이 기억난다. 아무런 감흥이 없던 그 표정.. 어쩌면 사이코패스 딸의 유전자는 엄마로부터 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 책 [치팅 데이]는 굉장히 가독성 높고 흡인력이 대단하다. 특히 평소에 진상들을 많이 대하는 서비스 직종의 독자들이나 한 번쯤 민폐적 캐릭터를 만나본 사람들이라면 주인공 희태에게 굉장히 공감할 것이라 나는 장담한다. 누구에게든 살의를 한 번이라도 느껴본 독자들은 손!

주인공 희태는 술만 마시면 자신과 엄마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어린 희태는 옥상에서 어머니에게 난동을 부리는 아버지를 밀어서 추락시킨다. 그렇게 문제 아버지가 사라져서 속 시원했던 희태와 달리 엄마는 가끔 그런 희태를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곤 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희태의 반사회적 성향은 멈추지 않는다. 평소에는 초등학교 교사로 멀쩡하게 살아가는 희태는 마치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의 심정으로, 한 달에 딱 한 번 자신의 기준에 악인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을 처단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띠지에 악인만 죽이는 사이코패스 한국판 덱스터의 탄생이라는 소개 문장이 있는데, 오... 전적으로 동의한다. 주인공 희태는 비록 살인자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에게 "죽음의 천사" 혹은 "악인 전문 처리사" 와 같은 휘황찬란한 타이틀을 붙여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소중한 것은 지킬 줄 아는 자이기에 학창 시절 자신에게 유일하게 잘해준 친구 유원과 유원의 가족에게는 아주아주 잘한다. 그리고 그는 살인에 대한 끓어오르는 욕망을 자제할 줄 알고, 특히 세상에 존재해 봤자 똥만 싸댈 악인을 처리한다는 점에서 악인 중에서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 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서 고양이랑 놀다가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하는 듯한 아동을 발견하는 희태. 아동의 어머니는, 과연 그가 생각했던 대로 학대 부모가 틀림없을 듯한 혐오스러운 말과 행동을 가진 여자였다. 마침 4월이 끝나가고 5월이 시작되는 밤, 희태는 학대 부모인 수진을 사냥하기 위해서 그녀의 동선 근처에서 기다린다. 그런데 갑자기 불쑥 어딘가에서 나타나 수진에게 망치를 휘두르는 검은 후드티의 남자...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한 달에 한 번 있는 치팅 데이를 방해받은 희태의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살면 살수록 인간의 본성은 잔인하다는 것을 믿게 된다. 문명으로 인해 그러한 본성이 억압되어 있을 뿐.. 특히 희태를 비롯하여 이 책에 등장하는 악인들은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에 대해서 거침이 없다. 하지만 희태가 신중하게 악인만 골라서 사냥하는 타입이라면, 그냥 닥치는 대로 걸리면 죽인다는 진짜 사악한 놈도 등장한다. 요즘 들어서 사적 제재가 많아지고 이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의 갑론을박이 많은데, 우리나라의 경우 법의 철퇴가 생각보다 상당히 약하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사적 제재가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고, 쓰레기 같은 인간을 처리할 수 있다면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라는 위험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악인이긴 하지만 희태에게 공감이 가능하고 ( 나만 그런 것 아니겠지..) 정말 가독성 높고 흡인력이 뛰어나서 독서 시간 순삭인 소설 [치팅 데이]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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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박람회장 1 : GA 가을 위의 산책 - 유준상의 첫 판타지 동화
유준상 지음, 이엄지 그림 / ㈜소미미디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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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지키기 위해선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단다."

주인공 쥬네스의 직업은 배우다. 그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지만 인생이란 게 뭔지,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항상 고민이 많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자주 갈 수 있지는 않다. 고민이 생길 때마다 테니스장을 찾는 쥬네스는 그날도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그때 만난 한 할아버지가 그에게 함께 테니스를 치자고 부탁을 하고 약 30분 정도 기쁜 마음으로 할아버지와 테니스를 치게 되는 쥬네스. 그런데 그가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마치 그를 처음 본 표정을 띤 할아버지가 다시 테니스를 치자고 부탁하고, 그 부탁은 몇 번 넘게 이어지게 되는데.......

유준상 배우, 엄청난 동안에 노래, 연기 할 것 없이 다재다능한 배우라고 알고 있던 분. 그의 이력을 살펴봤는데 이번에 읽게 된 판타지 동화 [당신이 몰랐던 박람회장]외에도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프로 작가셨다. 30년 넘게 꾸준히 일기와 그림, 글을 쓰며 내면을 연마해오셨다고 하니, 그의 내공은 어제오늘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 [당신이 몰랐던 박람회장]은 테니스 코트에서 우연히 표정이 매우 풍부한 한 할아버지를 만나 반복적으로 테니스를 함께 쳐 준 주인공 쥬네스가 그의 안내로 독특한 박람회장을 방문한다는 이야기이다.

박람회장에 들어선 쥬네스는 벽돌에 그려진 다채로운 색깔의 솜사탕을 발견하게 되는데, 갑자기 그 솜사탕이 바람개비 돌 듯 돌기 시작한다. 돌아가는 솜사탕의 구심력에 의해서 마치 4차원 세계로 빨려 들어가듯이 텅 빈 어두운 터널을 날게 되는데 쥬네스, 그리고 곧 그의 기억은 사라지게 되는데....

판타지 동화책답게 이 책 [당신이 몰랐던 박람회장]의 주인공 쥬네스는 매우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박람회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고 다양한 물건들로 가득한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태초의 자연이 펼쳐진 광활한 공간이었다. 쥬네스는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여행을 하며 비를 만들어내는 "비술 아저씨" , 사다리를 움직여서 수많은 별을 조정하는 "별 양치기" 그리고 구름처럼 생긴 비행기를 조종하는 "구름 맨" 등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이 중에서 눈을 만들어내는 "스노우 브라더"는 유일하게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썬 시스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 그에게서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쥬네스.

"의미가 이곳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의미에 집착하면 내가 찾고자 하는 진짜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유준상 배우가 캐나다와 쿠바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영감을 받은 자연물과 풍경, 사람과의 관계를 모색하며 차근차근 써온 창작물이라고 한다. 매우 신비롭고 광활한 자연이라는 존재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 듯한 책 [당신이 몰랐던 박람회장]에는 이야기마다 아름다운 삽화가 그려져있는데, 마치 날아다니며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을 느끼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표현되어 있다. 꿈속에서는 내가 마음을 먹기만 해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처럼, 주인공 쥬네스 눈앞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대자연과 그의 흥미진진한 모험이 매우 다채롭게 표현된다. 도시가 뿜어내는 회색빛에 젖어 우울한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힐링 판타지 동화 [당신이 몰랐던 박람회장]

오늘 아침에 혹등고래가 친구들을 위해서 범고래와 맞서 싸우는 영상을 보며 천사 같은 이 동물에 감동을 받았었는데, 이 책에도 엄청난 크기의 혹등고래 삽화가 그려져 있어서 왠지 작가와 통한 이 느낌......... 자연은 그 자체로 신비롭고 아름답다. 서재에 가만히 앉아서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 판타지 동화책 [당신이 몰랐던 박람회장]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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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5
황모과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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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니어처 지구에 갇힌 게 분명해

여기는 이미 움츠러든 세계야

생존이라는 말을 바꿔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

소설 [언더 더 독]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패배자"의 삶 혹은 인간 존엄성이 상당히 무너진 상황을 다루고 있다. 기계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공지능이 우리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감도는 지금,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전쟁이 소중한 인간의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앗아가고 있는 지금, "인간"이라는 두 글자의 가벼움은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지경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때 이 소설

[언더 더 독]이 제시하는 메시지가 굉장히 마음을 울린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인간성을 보여주는 한 사람의 이야기 [언더 더 독]

태아 유전자 편집 기술을 적용할 돈이 없었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정민은 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개 식용을 위해 설치된 사육장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원인 듯한 젊은이가 와서는 정민에게 유전자 시술을 받지 않은 자의 피부를 구한다는 말을 하며 연구에 참여할 것을 권유한다. 스스로를 쓰레기라 여기던 정민은 자신이 어딘가에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기꺼이 연구에 참여하게 된다.

다른 이들의 부러움도 받는 등 인생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느낀 정민은 아쉬움 없이 자살을 시도하지만 연구원 노아가 다시 찾아와 그의 인생을 사겠다고 한다. 타인의 관심을 받아본 지 오래된 정민은 울컥함을 느끼며 신체를 기증하기로 약속하는데...

황모과 작가의 소설 [언더 더 독]은 유전자 편집 기술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좀 더 완벽한 인간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발전된 사회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기술은 역시 돈과 권력이라는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자들의 것. 그 반대편에 있는 주인공 정민의 삶을 초라하다 못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가지지 않은 자였던 부모는 동반자살했고 부모가 남겨준 가상화폐는 그야말로 쓸데 없는 가상 자산일 뿐이다.

일찍이 스스로 인간 이하라고 규정해 버린 그는 뇌로서만 존재했다가, 기계가 되어 다른 존재들을 파괴했다가 가상현실 속에서 그동안 누리지 못한 행복을 누리기도 한다. 기술 문명이 원하는 대로 신체적 에너지, 심리적 에너지 모두를 갖다 바쳤던 정민은 온갖 더럽고 야비한 일을 겪고 겪은 끝에 원래 있었던 공간인 사육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고는 한때 기계의 모습으로 살았을 시절에 소통했던 많은 기계들이 분해되고 버려진 채 폐기장에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참배하는 마음으로 꽃을 바치게 되는데....

소설 [언더 더 독]을 읽으면서 분노했다가 절망했다가 하는 마음의 요동을 많이 느꼈다. 굉장히 잘 쓰인 SF 소설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실제로 앞으로의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이라면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싶기도 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인간이나 인간성의 입지가 좁아진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기계가 대량으로 자살을 끝에 만들어진 기계의 무덤 앞에 시든 꽃을 바치는 주인공을 보며 그래도 앞으로 살아나갈 그의 인생을 조용히 응원하게 되었다. 받아 적고 싶은 글귀가 많았던, 상당히 흥미진진했던 SF 소설 [언더 더 독]

"한숨 잔 다음에도 기어이 깨어나 다시 생의 텁텁한 순간을 맛보게 된다면 그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눈을 뜨게 된다면 그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충분할 터다. 내게 남은 시간은 구차한 목숨만큼이나 끈질기고 지난할 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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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선사의 전심법요·완릉록 해설
황벽 지음, 나영석 해설 / 하움출판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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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뚜렷하게 특정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루하루 생활을 잘 하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잘 지켜나가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산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힘들 때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면서 마음을 달랬고, 성당에 나가서 울면서 천지를 다스리는 그분께 기도를 올렸었다. 유독 힘들 때만 종교를 찾았었다니 나도 참 간사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 불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일종의 철학이자 수행이라는 생각을 좀 했었는데, 이 책 [황벽선사의 전심법요 완릉록 해설]에서 그런 부분을 말해주는 것 같다. 부처님의 상을 모셔놓고 숭배하는게 불교가 아니라 내가 부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게 요점인 듯.

이 글을 쓰신 저자 나영석님은 대학 시절부터 줄곧 깨달음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가정을 이끌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재가 수행자로서의 역할을 꾸준히 해오신 것으로 보인다. 퇴직 이후 본격적으로 독서와 명상을 통한 자기 수양을 통해 제2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왜 유독 황벽선사의 책들을 해설하겠다는 마음을 품은 걸까? 서문에 그런 내용이 실려있다. [의식혁명]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영성가인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쓴 책에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영성가들의 책이 소개되었는데, 의식 수준이 가장 높은 단계에 속한 인물들 중에 황벽선사의 책이 있었다는 것. 그 전의 번역본이 다소 아쉬운 점이 있어서 이번에 본격적으로 해설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전심법요와 완릉록에 나오는 내용이 우선적으로 실려있고 그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덧붙여져 있는 형식이다. 솔직히 말해서 불교에 대한 지식이 전무할 정도인 나로서는 다소 난해한 내용이긴 하지만 우선 [전심법요]에 실린 핵심을 이야기하자면, 여기서는 "한마음"과 "상" 그리고 "경계"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한마음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마음, 즉 개인의 "나"라는 마음인 "에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아우르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한마음"이란 "개인적인 마음과 일반적인 마음의 근원인 동시에 그것들을 자신안에 내포한 것으로서 전지,

전능, 보편하여 절대적 진리에 부합하는 무한차원의 절대인 절대의식, 혹은 순수의식"이라고 한다.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라는 성철 스님이 남기신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161쪽 완릉록 해설 부분에서 "마음이 곧 부처이고, 무심이 곧 도이다"라는 문장을 읽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부처님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마음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생각을 움직이고 감각을 사용하여 분별심을 내는 것, 즉 상대와 나 주관과 객관 등을 구분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마음 자세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중생인 내가 이 책에 담긴 넓고 깊은 지혜를 제대로 알기만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 휩쓸리며 살다보면 이것 저것 부딪치고 성난 마음이 일어나곤 하는데, 그렇게 일어나는 분노나 어리석음을 조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예전에 신실한 불교 신자였던 친언니의 소개로 단기 수행자로 절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삶을 나누기도 하고 본인이 느끼는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감정의 찌꺼기를 덜어내는 시간을 가졌었다. 당시에는 내가 너무 어렸던 탓에 나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함께 수행을 했던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어두웠던 마음을 다 털어내고 밝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셨던 기억이 난다. 그분들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라는 것과 "에고가 사라진 참 마음"을 조금이라고 느끼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지금 문득 든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들 -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 나의 그림자일 뿐이다, 무심이란 에고의 마음이 없는 것, 성불이란 육체를 가진 나를 없애고 절대의식으로 머무는 것-은 실제로 깨달음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명상 등을 통해 수행에 전념하는 분들에게 주어지는 보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에게는 다소 어렵지만 지혜로 가는 길목에 조금 들어서는 느낌을 안겨준 책 [황벽선사의 전심법요 / 완릉록 해설]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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