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날의 거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71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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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비엔나에서의 가을이었다. 유명한 배우 오이겐 비쇼프가 친구들을 자신의 저택에 초대하여 작은 음악회를 갖는다. 아내인 디나와 디나의 동생인 펠릭스, 친구인 고르스키 박사와 이 글의 화자인 요슈 남작 등은 함께 보여 각자 악기를 도맡아 클래식을 연주한다. 다소 늦게 도착한 엔지니어 졸그루프는 의도치않게 음악 연주를 방해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 친구들은 비쇼프에게 그가 연극에서 새롭게 맡은 역할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리처드 3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를 원한다. 비쇼프는 짧은 공연을 준비하러 잠시 정원으로 나가는데, 그런데 그때 정원 쪽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리고,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친구들이 정원으로 달려가지만 비쇼프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수수께끼와 같은 죽음. 그는 자살한 것인가? 아니면 졸그루프가 믿는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타살된 것인가? 마치 안개와 같은 정황 속에서 손님으로 방문했던, 이 소설의 화자인 요슈 남작이 살인자로 지목된다. 사실 그에게는 동기가 있었다. 4년 전 그는 비쇼프의 아내인 디나와 연인 사이였고 그녀를 미칠 듯이 사랑했다. 디나와 펠릭스는 오이겐 비쇼프의 죽음에 적어도 요슈 남작이 간접적으로나마 연루되었을 것이라 믿고 있지만, 졸그루프는 최근 발생한 석연치않은, 비쇼프의 죽음과 비슷한 형태의 자살 사건에 주목한다.

​4명의 남성 등장인물들이 때로는 개별적으로, 때로는 함께, 오이겐 비쇼프의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 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 미스터리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 자료가 발견된다. 그것은 [ 심판의 날의 거장 ] 이라 불리는 16세기 한 이탈리아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자료인데, 이것은 1909년 비엔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묘하고도 괴이한 사건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소설의 저자 페루츠는 아주 우아한 문제로 살인 사건이 일어난 상황과 각각의 등장인물들 그리고 사건의 예상치 못한 복선과 반전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소 옛날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기묘하고 괴이쩍은 이야기 덕분에 독자들은 일단 책을 드는 순간 빠져들어가는 몰입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굳이 어떤 장르라고 꼭 집어 표현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것이 추리인가? 아니면 스릴러인가? 둘 다 아니라면 미스터리물? 그렇게 장르를 콕 집어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이 책의 강점이기도 하다. 정통 밀실 미스터리 같기도 하고 괴물이 등장하는 호러물 같기도 해서 책을 읽는 동안, 애드거 앨런 포우나 스티븐 킹이 쓴 작품이 생각나기도 했다.

플롯이나 이야기 전개도 좋지만 인상 깊었던 캐릭터가 있었는데, 바로 이 소설의 화자인 요슈 남작이다. 그는 매우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책과 음악을 사랑하는, 매우 지적이고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하지만 그 부드러운 이미지 아래 잔혹한 면이 없지 않다. 시답잖은 이유로 결투를 벌여서 상대방을 죽음으로도 몰고 갈 수 있는?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 가해자가 곧 수사관 ” 이라는 일종의 추리소설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범죄를 저질렀을지 모르는 (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의심을 받는 ) 자가 직접 범죄를 수사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요슈 남작이 쓴 원고를 찾은 인물이 하는 말은, 이 소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미스터리나 판타지 소설로도 읽혀질 수 있다고. 이야기가 끝으로 향함에 따라,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어쩌면, 독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책이 이야기하는 듯 하다. 등장 인물들이 삶에서 마주해야 했던 공포, 그 공포에 대한 집착 속에 있을 수도 있고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경험, 그 경험에 대한 그들의 죄책감 속에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 듯한 책이다.

매우 독특한 형식의 책이었다. 단순한 추리, 스릴러가 아니라 환상적인 요소도 들어있었다. 아직 레오 페루츠가 쓴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몽환적이면서도 동시에 호러적 요소가 가득한 영화를 많이 찍었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도 페루츠 작가의 팬이었다고 하니, 페루츠의 작품이 어떤 종류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뭔가 소름끼치는 미스터리를 기대한다면, 이 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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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 다섯 작가가 풀어낸 다섯 가지 짜장면 이야기
정명섭 외 지음 / 북오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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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면발에 스민 깊은 맛, 다섯 가지 레시피로 엮은 이야기

짜장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내가 어릴 때 유달리 이사를 많이 다녔던 우리 가족. 힘겹게 이삿짐을 다 옮기고 한숨을 돌리고 나면 부모님께서 짜장면을 시켜주셨었다. 테이블도 없이, 아직 제대로 치우지도 않은 방바닥에 신문지만 깔고 앉아서 먹는지 삼키는지도 모르게 짜장면을 먹던 우리 남매들. 단짠 단짠 소스를 쫄깃한 면발에 섞고 그 위에 단무지를 얹어 먹으면 그 어떤 고급스러운 요리보다도 더 맛있는 음식이 되었다. 비록 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시진 않았지만 어머니의 음식처럼 따뜻함을 풍겼던 그 짜장면. 짜장면은 가난의 남루함에서 오는 박탈감도, 혹은 실연의 아픔에서 오는 고통도 다 치유해주는 힘을 가진 듯 하다. 그래서인지, 우리 서민 곁에서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 짜장면을 주제로 장르 소설집이 출간되었다니, 너무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집 속에는 총 5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첫번째 이야기인 [ 공화춘 살인사건 ] 과 세번째 이야기인 [ 철륭관 살인사건 ] 은 셜록 홈즈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처럼 정통 추리 소설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두번째 이야기인 [ 원투 ] 는 청소년 드리마에 가깝고, 네번째인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는 호러 판타지, 그리고 다섯번째 이야기인 [ 환상의 날 ] 은 판타지 로맨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중 나의 경우는 공화춘 살인사건, 그리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우선 다섯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정통 추리소설에 가까웠던 작품이 바로 [ 공화춘 살인 사건 ] 이 아닌가 싶다. 일본이 조선을 탄압하던 시절, 공화춘이라는 반점에서 벌어진 중국인 노동자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홍주원 변호사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동경에서 유학을 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한창 모던 보이로써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다른 일에는 큰 관심이 없는 그가 가진 유일한 취미라면 바로 공화춘 반점에서 짜장면 먹기! 살인 사건으로 인해 공화춘이 문을 닫게 되면 맛있는 짜장면을 먹는 즐거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사건 해결에 착수한 홍주원!! 이상한 것은, 문이 잠긴 방에 혼자 있던 중국인이 죽은 채로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밀실 살인 사건이다!! 홍주원 변호사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사건 해결에 돌입하는데...

" 불가능한 것을 전부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말이 되지 않더라도 진실일 수 밖에 없는 법이죠 ."

마치 셜록 홈즈가 식민지 시절 조선으로 날아온 듯한 이 대사 한 마디!! 독립 운동에 관심이 없는 약아빠진 홍주원 변호사가 갑자기 멋져보이는 순간이었다. 비록 처음에는 [ 공화춘에서 먹는 맛있는 짜장면 사수 ] 라는 미미한 동기에서 시작하였지만 결국에는 나라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게 된 홍주원 변호사... 이게 어찌된 일일까?

강지영 작가의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는 한 마디로 매혹 그 자체였다. 낮에는 한 대학교 문창과 교수 ( 내 생각에 ) 로 일하지만 밤만 되면 택시를 몰고 다니며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천도시키는 일을 하는 여주인공 수현. 그녀는 3년전 실종된 학생 다정이를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자신과 비슷하게 택시를 몰면서 영혼을 태우는 누군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어쩐지 심상치가 않다. 온 몸에 뱀문신을 한 그 남자는 고스트 스팟 등을 찾아다니며 떠도는 영혼을 모아 강령술 비슷한 의식을 하며 사람들에게 일종의 쇼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그는 어떤 사람이고 수현이 해야 할 임무는 과연 무엇일까?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란 일종의 작법을 가리킨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종결 짓기 위해 극의 절정 부분에서 신을 등장시켰는데, 이처럼 서사 구조의 논리성이나 일관성보다는 신의 출현과 같은 외부의 초월적 힘에 의존하여 이야기를 끝내는 경우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하는데, 강지영 작가의 소설의 서사구조가 약간은 이런 구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워낙 귀신이나 유령 이야기같은 신비한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간을 수호하고 사악한 영혼을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 세상도 살만하지 않은가? 싶었다. 아, 그리고 비록 딩뇨병이긴 하지만 힘든 일을 마치고 난 뒤 꿀맛같은 짜장면을 먹는 주인공 수현의 모습을 보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할 일을 마치고 따뜻한 짜장면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다.

사실 짜장면은 중국에서 왔지만 이젠 모두들 인정할 것이다, 짜장면은 한국 음식이라고. 짜장면을 주제로 하여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정말 궁금했었다. 짜장면이 음식이고 하나의 요리라는 편견 때문에 멋진 장르 소설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건 내 기우였던 것 같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짜장면처럼 정말 맛깔나고 감동적이고 신비롭고 미스터리 그 자체였던 듯 하다. 오늘은 친구와 이 책을 들고 고추 짜장면을 먹기로 했다. 이 책에 나오는 각각의 소설들처럼 다채롭고 맛있는 짜장면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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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러브 안전가옥 앤솔로지 7
표국청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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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도 빛깔이 있다면 내가 가진 사랑은 어떤 빛깔일까? 재미있는 상상과 탐구를 통해서 사랑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린 책을 만났다. 실험적인 작품을 출간하는 것으로 유명한 출판사인 안전가옥에서 나온 [ 뉴 러브 ] 라는 단편집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에는 총 5가지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모두 [ 사랑 ] 을 주제로 펼쳐지지만 이야기 하나하나가 대단히 개성있고 독창적이다. 롤 플레잉 게임 속 캐릭터나 인공 지능과 같은 혁신적인 분야에서부터, 인간의 어두운 심리까지, 매우 다채롭고 맛깔나는 음식을 담은 도시락 같다는 느낌이 드는 [ 뉴 러브 ] 속으로 들어가 본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 [ 장군님의 총애 ] 는 게임 속 등장인물들이 단지 NPC (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 ) 로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인간처럼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이 대단히 흥미롭다고 느낀 이유는, 가끔 잘 만들어진 만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다보면, 가상 공간 속 캐릭터에 불과한 등장 인물이 정말 멋있거나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런 멋진 캐릭터들이 서로에게 반한 다면? 그래서 게임 속 만들어진 규칙을 어기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창조하려 든다면? 발칙하지만 즐거운 상상으로 쓰여진 단편이라 그런지, 이 [ 장군님의 총애 ] 는 정말 흥미진진 그 자체였다.

“ 동진은 언제나 자신이 사랑하는 캐릭터들과 대화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애니메이션을 볼 때도 게임을 만들 때도, 작품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 속 존재들과 고통하는 인물로서 함께 하고 싶었다 ”


두 번째 이야기 [ 나의 새로운 바다로 ] 는 한 특별한 벨루가 [ 하얀색 돌고래 ] 이야기이다. 이름이 벨카인 그녀는 다른 벨루가와는 다르게 인간과도, 그리고 벨루가와도 소통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인간 엄마가 있어서 그녀가 벨루가 무리에게서 받은 데이터를 과학자인 엄마에게 모아서 전송을 해주기도 한다. 활발하고 개성있는 주인공 벨카에게 앵지라는 벨루가가 사랑 고백을 한다. 그러나 어느날 앵지가 불법 어업을 하던 어선의 그물에 붙들리고, 앵지를 잃을 수 없었던 벨카는 힘껏 그물을 찢다가 크게 다치고 마는데.....

​이 이야기는 비록 과학이 연루되어 있는 이야기지만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마치 눈 앞에서 돌고래 간의 사랑과 그들의 생각보다 발전된 문명을 감상한 느낌이랄까?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앞으로 과학이 더욱 더 발전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엄마에게 멋진 미소를 한 번 보여주고 바다로 향했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든 속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나의 새로운 바다로 ."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흥미로웠던 이야기가 바로 네 번째 이야기 [ 사람의 얼굴 ] 이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서희는 자칭 타칭 싸이코패스 (?) 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감정이 없고 무엇보다 표정을 짓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표정을 짓지 못하는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이의 표정에 탐닉한다. 그녀는 매우 탐욕스럽게 다른 이의 표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스물 두 가지,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는 서른 개가 넘는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된 그녀. 남에게 돌이키지 못할 상처를 주면서까지 다양하고 충격적인 표정을 이끌어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서희. 그런데 한 성형외과 의사가 된 그녀 앞에 아영이라는 한 직원이 등장하는데, 아영은 세상 모두가 매혹될만한 흔치 않은 표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서희는 아영의 표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무시무시 한 계획을 세우는데...

​자신에게 결핍된 무엇가를 향해 끊임없이 허덕이던 한 여자를 그려낸 소설 [ 사람의 얼굴 ]. 표정을 짓지 못하는 소녀 서희의 뭔가 무시무시한 무표정이 내내 연상되었고 다른 사람의 표정을 따라하기 위해서 근육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그녀의 날카로운 옆모습이 상상되는 소설이었다. 꿈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서희지만, 어쩐지 가엾게도 느껴지는 그녀... 오늘따라 내가 다양한 표정을 가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 검은 개가 컹 하고 짖었다. 서희는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디를 향해 도망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골목을 배회했다.

(...) 서희는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몹시 배가 고팠다. "

사람들은 아름답고 완벽한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 이야기에 열광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로도 드라마로도 그리고 이렇게 소설로도 다양한 사랑 이야기가 시청자와 독자들에게 계속 전달되어 오고 있는 듯 하다. 우리의 삶을 살게 하는 것도 사랑이요, 반대로 죽을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사랑인 듯 하다. 사랑이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순 없지만 흥미로운 답변을 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 뉴 러브 ] 와 같은 책이 아닌가 싶다. 오늘 색다른 사랑 이야기에 젖어들고 싶다면, 이 책으로 빠져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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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여름 - 류현재 장편소설
류현재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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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름이 그런 것은 아니다.

유난히 무화과 익어가는 향기 진동하고,

은빛 병어가 그물에 다닥다닥 꽂힌 채 입을 벙긋거리고,

백중사리 때맞춰 늦태풍이 올라온다 소식 들리면

바다와 땅, 바람과 달이 공모해

이곳 사람들을 흥분시켜 사람 하나를 잡고야 만다.

마을 사람이 죽지 않으면 파도가 죽은 이를 실어다 놓는다.

그런 책들이 있다. 독서하는 동안, 매우 다채로운 색깔의 감정을 일으키는 책들. 나에게는 [ 네 번째 여름 ] 이 그런 책이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바다와 섬에서, 만선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고전문학이었다가, 순수한 연인들의 사랑이 빛나는 로맨스 소설로 변하더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범죄 추리 스릴러라는 옷으로 갈아입는 책. 이 작은 책 한권에 한편의 대하 드라마가 녹아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성추행 가해자에게 단호한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소문난 검사, 정해심. 그런데 그런 그녀가 너무나 당황스러워할 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최근 치매 진단을 받고 요양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정만선이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되게 된 것. 사정인 즉슨, 아버지가 파킨슨 병을 앓아서 말을 못 하는 한 할머니를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해괴망측한 일을 벌였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유독 성과 관련된 사건에서만큼은 단호하게 처리해온 해심이기에, 아버지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뭔가 찜찜하게 여겨지는 구석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평소에 어머니로부터 귀에 딱지에 앉도록 들어온 말. 식물만큼, 아니 식물보다도 더 이성에게 관심이 없다는 아버지가 할머니를 대상으로 성추행이라니... 이건 앞뒤가 안 맞아도 너무 안맞는 일이다. 도대체 아버지 정만선에게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 네 번째 여름 ] 은 주인공 정해심의 아버지 정만선이 추행 사건을 벌인 현재를 기점으로 하여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건을 비춤과 동시에 그가 남해 앵강만 어장을 이끄는 동정호의 선주인 정표세의 아들로 살아가던 과거의 모습도 보여준다. 정해심은 노련한 검사답게 피해자의 주변인물을 꼼꼼하게 탐문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정황들을 파악해 나간다. 과거를 역추적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나가던 그때, 정해심은 가해자인 아버지와 피해자인 할머니가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이 책은 여러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설킨,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서, 현재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그 뿌리부터 철저하게 밝혀나가는 소설이다. 이 사건은 일제 시절, 일본인이 소유했던 남해 앵강만의 동정호 어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이 주는 순수한 선물인 어망 가득 물고기들이 있었다. 꽃섬에서는 낚시를 했고 누군가는 물질을 하며 물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한 편의 영화 같은 이 장면 속엔, 누군가의 추악하고 광적인 욕망과 집착과 또 다른 누군가의 오해와 피눈물로 이루어낸 복수도 있었다. 잔잔한 바다 속 격렬하게 몰아치는 파도같은 과거의 사건들은, 그러나, 현재의 성추행 사건의 진실을, 그 슬프고도 한 맺힌 진실을 드러낸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내 인생책 중 하나인 [ 가재가 노래하는 곳 ] 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부모의 돌봄없이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던 소녀 카야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삶이 펼쳐지던 그때, 그녀 삶의 균형을 깨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가 머물던 곳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녀가 누명을 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책인데, 잔잔하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법정 씬을 만나면서 마치 태풍처럼 몰아친다. 솔직히 그 부분이 매력적이었다.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연과 잔혹한 광기를 보여주는 사건을 다룬 책, 이 [ 네 번째 여름 ] 그런 소설인 듯 하다.

정말 몰입도가 최상인 책이고 그만큼 독서의 감동이 컸다. 과거를 하나하나 역추적하면서 진실이 조금씩 베일을 벗을 때 마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고통과 아픔을 느꼈다. 엄마 잃은 덕자가 되기도 했고 아빠 잃은 해심이 되기도 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가 슬픔이 온 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역시 ( 이렇게 말하면 안되는건지도 모르겠지만 ) 여성 작가의 섬세함이 진하게 와닿는 그런 책이다.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지금까지 그런 여름이 세 번 있었다.

첫 번째 여름에 내 아버지가 죽었고,

두 번째 여름에 그 남자의 아버지가 죽었고,

세 번째 여름에는 내 남편이 죽었고,

네 번째 여름에는 내가 죽을 것이다.

그 전에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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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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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잃을 수 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이 되기만 한다면

이 책은 한 나라의 몰락과 파멸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불운이라는 악마가 휘감아 빠른 속도로 추락하는 베네수엘라를 그려내고 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무덤에 묻힌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신의 무덤을 파헤쳐 같이 묻힌 소장품을 훔쳐가고, 정부에 반대하는 평화 시위를 벌인 자들은 지하에 있는 감옥에 끌려가서 두들겨맞거나 총구로 강간을 당하고 결국에는 사지가 절단되기도 한다. 물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하여 현금 수십 뭉치로도 약을 살 수 없어서 사람들이 죽어간다.

책을 들여다보자면, 세계에서 가장 큰 석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가 이제 지옥으로 변했고, 시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죽인다.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시민들은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여 재산을 뺏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믿는 정도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베네수엘라의 지옥과도 같은 상황은 다른 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는다. 때때로 보도되기는 하지만,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 정도로 세세하고 심각하게 보도되고 있지는 않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지옥과도 같은 상황.... 책이 현실을 얼마나 담고 있는 걸까?

사실 책이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저자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와 주인공이 정말 많이 닮아있다는 점이다. 서른대의 나이, 언론계에서 근무했다는 점, 피난을 갔다는 점 등등... 그런 것만 봐도, 한때 어깨를 감싸 안았던 이웃이 이웃을 약탈하고 공격하고 강간하는, 이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진실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주인공 아델라이다의 일인칭 관점에서 쓰여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제대로 된 병원치료도 받지 못하고, 약을 구하지도 못해 세상을 떠야만 했다. 아델라이다는 이제 어머니도 없고 연인도 없는 혈혈 단신이 되었다. 베네수엘라의 사회 불안은 점점 심해져서 이제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독자들은 그녀의 어머니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혁명의 아이들이라는 테러 집단과 정부와 손잡은 여러 무리들에 의해서 목숨을 잃는 상황을 보게 된다. 결국, 아델라이다의 아파트에 정부와 손을 잡고 사람들을 약탈하고 재산을 앗아가는 무리의 여자들이 침입하여 아델라이다는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자신의 옆집 여인인 아우로라 페랄타가 어떤 연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스페인 여권을 이용해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소설을 읽고 있자니 분노와 슬픔 그리고 아픔이 몰려온다. 우리 나라도 한때 정부와 군부의 군화발에 우리의 이웃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또다시 그러한 비극을 경험하는 나라를 지켜보자니 너무 안타까웠다. 아델라이다는 이제 베네수엘라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처럼 보인다. 살아남기 위해서 온 힘을 다 하고 있지만 사실 일단 탈출하고 난 뒤에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 계획은 없다. 사실 그녀는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삶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절실하다.

이 책은 난민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죽음과 삶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삶을 향하는 누군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면 효과적으로 그 느낌을 전달하는데는 조금 실패하지 않았나 싶다. 생과 사의 중간에서 자칫하면 어둠의 골짜기로 낙하할 수 있는 아델라이다의 절실한 모습을 독자들에게 조금 덜 전달되었지 않았나 싶다, 좀 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표현과 속도감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산티아고와 아델라이다의 만남, 여자 보안관이 이끄는 테러 집단들의 침입 그리고 옆집 여자의 죽음 등등등 몰입감이 있는 장면들이 있긴 하나 이야기가 조금 늘어지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어쨌건 지옥과도 같이 변해버린 베네수엘라의 상황이 이 책을 통해서 너무나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폭력과 만행을 자행하는 정부와 사람들을 보며 분노에 치를 떨어야 했다. 우리에게 잊지 못할 과거를 생각하게 해 준 [ 스페인 여자의 딸 ]. 희망을 잃어버린 채 탈출 준비를 하던 아델라이다는 지금 무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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