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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으로 가는 위빠사나 명상
해공 지음 / 근원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깨달음으로 가는 위빠사나 명상>의 저자 해공 선생은 우리나라 도판에서 몇 안 되는 눈 밝은 이다. 대부분의 구도자와 수행자들으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중생'에서 '부처'의 지위로,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상태로, 다시 말해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하는 관점에 서 있다. 모든 것이 둘로, 상대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그것을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하나로 통합하려고 애를 쓰는 것으로 공부를 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에서는 그것이 엄연한 현상이고 논리적으로 당연한 사실이라 믿는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현자들은 오직 절대, 하나만 있을 뿐, 둘, 셋은 없다고 가르쳤다. 기독교의 '하나님', 알파요 오메가로서의 '그리스도', 불교의 '일승법', '한 마음', '한 물건', 힌두교의 '불이일원론' 등 실재는 둘 아닌 하나일 뿐이다. 주체와 객체, 나와 세계, 육체와 영혼 등등은 모두 우리의 착각에 불과한 허상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말 그대로 그러한 착각에서 꿈에서 깨어나듯 깨어나는 것일 뿐이지 새롭게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 이대로 절대이고 진리 그 자체이다.
해공 선생은 흔히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 방편으로 알려진 위빠사나 명상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다. 위빠사나 명상은 어떠한 수행방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제대로 된 위빠사나 그대로가 바로 깨달음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다름 아니라 본래무아 본래절대라고 요약한다. 본래무아란 어디에도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는 없고 오로지 상호의존의 연기적 진실이 있을 뿐이란 말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처럼 저절로 벌어질 뿐이라 한다.
이 간단한 진실이 확인되지 않는 유일한 장애물이 바로 '나'라는 물건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위한 유일한 수행은 언제나 무슨 일이 있거나 도대체 '누가' 행위하는 자인지, '누구'에게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뿐이다.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바른 개념 정립 없이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잘못된 길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해공 선생의 <깨달음으로 가는 위빠사나 명상>은 순수한 구도의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