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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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도 한다. 나와 같이 얄팍한 독서 습관을 가진 독자들은 가끔 그 말을 방패 삼아 자신들의 무지와 게으름을 위안하기도 한다.

 

나이 마흔을 넘겨 <데미안>을 읽었다. 이 사실에 나의 아내는 너무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젊은 시절 <데미안>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파렴치한 범죄쯤이나 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너무 이른 나이에 <데미안>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리고 청소년 필독도서 목록에 부디 이 책을 추천하는 어리석은 전문가들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흔히 <데미안>을 성장소설로 분류하곤 한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혼돈스런 청소년기를 거쳐 자기 만의 길,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과정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실이 그러하듯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기도 하고 전혀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데미안>을 불완전한 청소년이 자아 찾기 과정으로서의 성장소설로 보는 관점은 작품 속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그토록 경계하여 마지 않았던 낡은 관습과 체제 순응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데이안>은 청소년들에게 권하기엔 상당히 부적절한 책이다. 차라리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그들에겐 더 어울리고 도움이 될 것이다. <데미안>은 심오한 종교적 주제, 다소 비의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주제를 다룬 소설이라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소설의 형태를 갖추고는 있지만 어찌 보면 작가인 헤르만 헤세의 종교적 고민을 담고 있는 자전적 에세이에 가깝다.

 

헤르만 헤세는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를 다니다 중퇴 후 열 다서의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었다 한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그 후 작가가 되고 삼십대 중반엔 인도 여행을 다녀온다. 이 짤막한 약력에서도 <데미안>을 비롯한 <수레 바퀴 아래서>는 물론 <싯다르타>와 같은 그의 대표작들의 단초를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의 전기를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는 대단히 종교적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선교사의 아들이자 신학생이었기에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과 교리에 밝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청년기를 보내야 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의 유럽의 상황과 그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해소하기에 그가 받은 기독교적 교육 내용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상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와 모순만을 가중시키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의 자살 시도와 그 실패는 유년기의 안정되어 보이고 굳건해 보였던 정통 기독교 신앙과의 결별이자, 해결하지 못한 자신과 세계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결책을 찾기 위한 종교적 회심의 계기였으리라 추측해 본다. <수레 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라트는 죽었지만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모습에 눈을 뜨게 된다. 한스 기벤라트와 에밀 싱클레어는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아와 세계, 성스러움과 속됨, 남자와 여자, 정신과 육체와 같은 분열을 극복하려 하였던 것 같다.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과 그들이 관계 맺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비의적 종교의 색채는 흡사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 유행하던 신지학회(크리슈나무르티를 새로운 구세주, 미륵불로 내세운 신비주의 종교 단체, 여성들이 지도자였다)를 연상시킨다. 비록 소설적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데미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동일 인물의 서로 다른 양상들로 볼 수도 있다.

 

싱클레어, 데미안,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은 분열된 세계 가운데 하나의 세계에만 속하는 무리들이 아닌 독창적이면서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 갈 카인의 표지를 가진 신 인류의 성장과정이자 한 인물의 내면을 관념화한 것이다.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면서, 피스토리우스이자, 에바 부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싱클레어는 데미안도 아니고, 피스토리우스도 아니고, 에바 부인도 아니다. 작품 마지막에 그가 온전히 자기 자신을 확인했을 때 그는 데미안과 완전한 일치를 느낀다. 그럼으로써 분열된 모든 것들이 통합된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는 니체를 너무 많이 읽었을지도 모른다. 과대망상가였거나 신비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데미안>과 같이 기괴하고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면서 대단히 관념적인 소설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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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2013-02-25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어려서 데미안을 읽었는데 삶의 많은 부분이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카톨릭 교의에 심취하였고 그와 결별하며 가치관의 혼동을 겪었으며
장교가 되어 어색한 나와의 만남을 가졌을 때 이 소설을 떠올리게 되었죠
그리고 아직도 분열된 자아의 통합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분명 청소년기에 자아탐구에 희망을 주기보다는 어떤 분열을 향한 길을 제시하죠.
마치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클래식처럼 가르쳐주는 것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