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얀 케르쇼트 지음, 김기협 옮김 / 꿈꾸는아침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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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동방에서? ; 서구의 네오(Neo) 아드바이타(Advaita) 물결

 로마 속담에 ‘빛은 동방에서(Lux ex oriente)'라는 말이 있다. 서양문명의 발전이 초기에 동양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쓰였던 이 말은, 근세에 와서는 현대 서양문명이 붕괴의 위기를 맞고 있으며, 그 유일한 해결책이 동양의 정신문화에 있다는, 동양 입장에서의 자화자찬적 의미로 흔히 쓰여 왔다. 실제로 60년대 이후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서구의 젊은 청년들, 흔히 히피(Hippie)라고 불리는 이들이 인도로 대표되는 동양 정신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되자 서구의 눈부신 근대물질문명에 열등감을 느껴오던 동양은 그것 보란 듯이 이 케케묵은 옛 속담을 다시 꺼내어 들고 만족스런 웃음을 짓곤 했던 것이다. 20세기 초 서구문명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동도서기(東道西器)니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외쳤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도 또한 그러한 입장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나를 포함한 많은 동양인들 역시 그러한 생각을 여전히 당연시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평소 선(禪)1) 불교라든지 아드바이타(Advaita)2) 베단타 철학에 관심이 많은 나는 얼마 전 우연히 정신과학 관련 잡지를 보다가 토니 파슨스(Tony Parsons)라는 영국인에 관한 짤막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진리를 찾는 구도 행위와 깨달음을 주제로 한 대여섯 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에서 그는 ‘깨달음은 어떠한 구도 행위를 통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또한 깨달은 사람이란 모순된 언어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분리된 개인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의 전체성일 뿐이라면 누가 있어서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라는 선과 아드바이타의 가장 핵심에 해당하는 요지의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글 맨 뒤에 소개된 저자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았다. 1933년 영국 태생으로 스무 살 무렵 공원을 산책하다가 이와 같은 관점을 얻게 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보통 서구의 명상 지도자(Meditation Teacher)나 정신적 스승(Guru, Master)들의 약력을 보면, 젊은 날 정신적인 방황 끝에 인도로 날아가서 오쇼 라즈니쉬나, 라마나 마하리쉬,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 같은 인도의 위대한 스승들 밑에서 공부하여 진리를 깨닫고 돌아와 가르침을 펼치게 되었다는 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토니 파슨스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새로운 전통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구글(Google)을 검색해 보니 이미 40여년 동안 자신의 관점을 대중들에게 가르쳐 왔고 그 가운데 몇몇은 자신처럼 대중적 모임이나 출판을 통해 가르침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었다.(물론 그 자신은 그러한 가르침도 없고, 그러한 가르침을 들을 사람도, 무엇보다도 그런 가르침을 말하는 자신도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있음(Being), 의식(Concsiosness), 생생한 삶(Aliveness, Life)- 그 이름을 뭐라고 하던 간에 -만이 존재할 뿐이고, 드러난 모든 현상이 모든 ‘그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책들이 번역되지 않았나 싶어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그와의 대화를 통해 일평생 찾아 헤맸던 구도의 의문을 해소하고 그처럼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우리식 전통에 의하면 제자에 해당하는) 얀 케르쇼트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원제는 ‘This is it')를 찾게 되었다.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1, 2부는 보통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구도와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관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에세이 식으로 서술하고 있고,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3부는 토니 파슨스를 포함하여, 서구의 여러 영적 스승들이라 불리우는 사람들과 영적 체험과 깨달음에 대한 오해와 구도자들이 영적 여정에서 빈번히 겪게 되는 혼란,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모순되는 이러한 전일(全一)적인 관점에 대해 격의 없는 대화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시종일관 어느 개인이 존재해서 그 개인의 노력과 정진을 통해 마침내 깨달음이란 영적 체험과 해탈이 주어진다는 상식적인 믿음(저자는 이러한 믿음을 ‘영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을 두들겨 깨부순다. 겉으로 보기에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와 ‘너’, ‘세상’은 모두 둘로 나눌 수 없는 전일성의 표현일 뿐이므로,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면 ‘나’와 ‘너’, ‘나’와 ‘세상’의 차별도 없고,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차별도 없고, 그리하여 모든 차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어디로 가거나 무엇을 구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흡사 인도의 신비주의자들이나 나눌 법한 이러한 내용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서구인들의 대화를 보면서 나는 기존에 내가 가졌던 서양과 동양의 이분법적 구별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개발과 발전이란 명목으로 나날이 합리적 과학적 물질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우리를 포함한 동양의 현실을 비춰보면 더욱 그러하다. 또 이 책을 읽고 관심이 있어서 해외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미국은 물론 특히나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는 이미 기존의 인도 성자들에 의해 서구인들에게 전해진 관점을 전통적 아드바이타(Traditional Advaita)라고 하는 반면, 그들의 서구인 제자들과 서구에서 자생한 스승들이 동양의 문화적 함의들을 서구인들의 문화와 생활양식에 맞게 재창조하여 전하는 이러한 새로운 관점을 네오 아드바이타(Neo Advaita)라 부르며 하나의 큰 문화적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어떠한 기존 종교교리의 틀에도 구속되지 않고, 어떠한 제의적 의식이나 수행을 요구하지도 않고, 합리적이고 동시에 직관적인 통찰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곧바로 지적하는 이러한 새로운 아드바이타 운동을 보면서, 어쩌면 가까운 장래에 물질적 풍요는 얻었지만 어느새 과거의 영적 전통을 잃어버린 수많은 동양인들이, 과거 수많은 서구인들이 영혼의 자유를 찾아 인도로 몰려갔듯이, 서구의 눈 밝은 스승들을 찾아 러쉬를 이루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지나친 망상일까?            


1) 흔히 선의 특징을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 : ‘문자를 통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한다’, 또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서 본성을 보아 부처가 되게 한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흔히 비논리적인 대화를 ‘선문답’이라 하듯 합리적 사유를 거부하고 직관적인 통찰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본성을 경험적으로 탐구하는 가장 대표적인 동양 종교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2) 영어로는 'Non-dualism', 우리말로는 ‘비이원성’, ‘불이(不二)’라고 번역되는데 인도의 베단타 철학 가운데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적 입장을 가리킨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아’뿐이라는 근대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의 입장이나 ‘의식’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일체유심조’ :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는 불교의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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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수련과 선
김경수 지음 / 가톨릭출판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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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바티칸 공의회 이후 카톨릭 내부에서는 도그마에 있어서 일대 변화가 있었다 할 수 있다. 그 흐름 속에 카톨릭의 전통적인 영신수련, 관상기도와 참선과의 대화도 있었다. 이 책은 젊은 시절 영적 체험을 카톨릭에 귀의함으로써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원종교적 배경인 불교의 참선수행으로 더욱 그 체험의 의미가 분명해진 저자의 고백이 실려 있다.

비록 논문형식의 딱딱한 학제적 글쓰기이지만 간간히 드러나는 저자 자신의 수행과정과 체험담은 카톨릭과 불교라는 종교적 차이를 뛰어넘어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수행자들에게 훌륭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특히나 너무나 선적인 문맥에서 화두와 선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에게는 색다른 형식과 관점으로 설명되는 저자의 선에 대한 안목을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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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 깨달음으로 가는 외길
대우 지음 / 현암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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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일불승을 설하시자 오백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자리를 떠났다라는 대목이 <법화경>에 나온다.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부처와 중생, 열반과 윤회가 분명히 다른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불자님, 우리는 열심히 수행정진을 통해서 아승지 겁의 세월을 보내야, 육바라밀 팔정도를 닦고 닦아야, 성불할 수 있다고 믿는 불자들의 이 책을 보면 아마 당장 책장을 덮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대우거사는 말한다.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이미 우리는 <그곳>에 와 있다고. 아니 우리는 애초부터 <그곳>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다만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발밑만을 바로 보라고 사자후를 하고 있다.

흡사 도라는 것은 닦아서 익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염되지 않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마조스님의 말씀, 지금 눈 앞에 역력히 제 작용을 다하는 무위진인을 보라는 임제스님의 말씀을 얼굴을 맞대고 직접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 이미 <그곳>에 와 있다. 그러기에 따로 <부처>라는 물건을 지어 찾아 헤맬 것이 없다. 발 밑을 보라. 분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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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공부
대혜종고선사 지음 / 여시아문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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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선생님의 <서장공부>는 그동안 몇몇 스님들의 현토번역과 일본인 학자들의 중역본만 존재했던 <서장>이란 책의 유일무이한 해설적 참고서라 할 수 있다.

김태완 선생님의 다른 저서 <조사선의 사상과 실천>(장경각)에서처럼 단지 선어록의 주석적 해설이 아니라 문자를 통해 조사스님들께서 가르치려한 문자를 넘어선 <무엇>을 다시 문자로서 친절하게 해설하여 주고 있듯, 이번 <서장공부>도 단지 문자풀이를 넘어서 실제 선 수행을 해 나가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해설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대혜종고 스님은 현재 한국불교 최대 종단 조계종에서 가장 중시하는 수행법인 간화선의 창시자이다. 화두를 통해 깨달음의 한 길을 걸어가는 선객들에게 <서장>은 일종의 교과서라 할 수 있기에 조계종 강원에서는 기본필수과정의 하나로 <서장>을 배우고 있지만 그 깊은 의미까지는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현재 간화선의 수행방법에 대한 반성과 제3수행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간화선의 수행법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간화선의 수행법에 대해 착실하게 천착하고 수행을 통해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먹구구식의 화두타파 운운하는 고답적 수행전통에서 벗어나 가장 기초적인 교과서부터 확실하게 독파해나가는 것이 작금의 간화선 논쟁에선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서장공부>가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선 공부를 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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