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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울의 물을 마르지 않게 하는 법
강호진 지음 / 영림카디널 / 2009년 3월
평점 :
선가의 화두를 연상시키는 책 제목 <한방울의 물을 마르지 않게 하는 법>은 언젠가부터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역사추리 팩션(faction)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그리고 <천사와 악마>의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대조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책은 앞서 나왔던 전범(典範)들을 '어쩔 수 없이' 답습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는 영락사라는 절에서 승려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들은 모두 200년 전에 쓰인 <영락사몰락기>라는 소설 속의 승려들과 같이 10대지옥의 형벌 대로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공교롭게도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수도원의 수사들이 연쇄적으로 죽어나가는데 그들의 죽음은 <요한계시록>의 일곱가지 예언을 연상시킨다.
또한 이 글의 주인공인 '현인호'는 미술사학자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의 전문지식, 고미술학, 특히 불교탱화에 대한 지식이나 도상학 등의 지식을 이용하는데, 이는 <다빈치 코드>의 주인공인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 교수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불교내지 승가 집단, 즉 폐쇄되어 있고 비합리적인 신비에 둘러싸여 있으며 종단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세속화되고 부조리한 모습을 보이는 종교 집단을 냉철한 이성으로 비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은 <장미의 이름>에서의 윌리엄 수사나 <천사와 악마>의 역시 로버트 랭던 교수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소설 속의 봉허 노장스님은 자신만의 독선과 아집으로 끔직한 비극을 초래했음에도 전혀 자신의 신념이나 행동을 회의하지 않는 인물로 <장미의 이름>의 눈 먼 수도원장 호르헤 신부나 <천사와 악마>의 바티칸 궁무처장 카를로 벤트레스카와 쉽게 오버랩된다.
게다가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승려 조직 속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조직 '제바계'는 <다빈치 코드>의 '시온수도회'나 <천사와 악마>의 '일루미나티' 같은 비밀결사조직과 비슷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기존의 추리소설이나 앞서 예를 든 팩션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암호 풀이 게임'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미의 이름>이나 <다빈치 코드> 그리고 <천사와 악마>에서와 같은 자연스러움이랄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발상의 환기가 주는 지적 쾌감이 다소 부족하다.
물론 이 소설이 소재와 등장인물만을 우리 고유의 것으로 살짝 바꾼 기존 서구의 팩션의 짝퉁이라고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오랫 동안 전통적인 것, 너무나 익숙해서 별달리 새로울 것이 없는 불교라는 종교 또는 그 조직을 고찰(古刹)의 오래된 먼지처럼 켜켜이 내려 앉은 미신과 비이성적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이라는 밝은 태양빛 아래 놓으려는 작가의 시도는 참신하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호사가들처럼 승려 조직의 부패나 세속성, 어느새 물질주의와 정치 논리가 횡횡하는 곳이 승가라는 음모론적 시각이 비록 한 때의 흥미와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을지는 모를지라도,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나 김성동의 <만다라>와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계몽의 빛에 속살을 드러내 보일 수 없는, 그러한 이해가 불가능한 종교성을 작가가 좀더 깊이 있게 표현해 주었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무리일까?
상구보리(上求菩提)를 위해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등한시하는 것도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하화중생만이 최선은 아닌 것이다. 종교성의 핵심은 세속과 초월, 이성과 신앙, 중생(인간)과 부처(신)와 같은 분별과 대립의 완전한 지양에 있는 것이다. 모든 시시비비, 모든 언설이 그치는 곳, 거기엔 웅장한 침묵이 있다. 그러기에 사찰 '불이문(不二門)' 주련에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 이 문으로 들어옴에 알음알이를 가져오지 말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끝으로 이 소설에서 정말 아쉬운 점 하나만 지적하겠다. 이 소설 193쪽에서 주인공이 성보박물관 학예사인 '고미연'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작가의 착각이었는지 '고미연'을 홍제스님의 속가 딸 '이영선'으로 오기한 부분이 나온다. (193쪽 맨끝에서 둘째 줄) 1차적으로 작가의 실수이고, 2차적으로는 그 실수를 바로잡지 못한 편집자의 실수이다. 그리고 그 실수를 그저 실수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나 또한 실수이다. 아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