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 - 사람의 본성이 곧 부처라는 새로운 선언 청소년 철학창고 26
정은주 풀어 씀 / 풀빛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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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육조 혜능의 어록인 <육조단경>은 성서에 있어 <신약>에 해당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계를 지키며 선정을 닦아 지혜를 완성해야만 저 피안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혜능 이전의 수행전통이었다. 그런데 일자무식 나무꾼 출신의 혜능이 <금강경> 읊는 한 소리에 문득 자성을 깨달아 석가모니에서 달마, 5조 홍인으로 이어진 조사의 자리를 잇게 된 것이다. 그의 주된 가르침은 우리의 자성은 본래 청정하여 부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문득 성품을 바로 보아 곧바로 부처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같은 혁명적인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쇠위 도를 닦는다는 수행자들이 보여주는 온갖 행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좌선할 때 자세가 어떻고, 호흡이 어떻고, 화두를 어떻게 들고, 위빠사나가 어떻고, 기운이 어떻고, 업장 소멸을 해야 되네, 삼매를 성취해야 하네.... 끊임없이 밖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유위적 노력만 추구하고 있다. 흡사 혜능과 6대 조사의 자리를 두고 대결을 펼쳤던 북종선의 대통 신수의 자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거울에 때가 묻지 않게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는 점진적 수행론 말이다.



흔히들 선종의 가르침이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과 다르다는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선종에서 표나게 불립문자 교외별전과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탓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선종의 가르침에는 대승불교의 주된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다. 대승불교가 소승과 차별되는 지점이 어딘가하면 중생, 즉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소승의 관점은 중생은 어리석고 미혹하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번뇌가 소멸된 부처의 자리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 번뇌와 보리, 차안과 피안이 둘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금강경>, <유마경>, <법화경>, <화엄경>과 같은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지금 이대로 온전하여 아무런 모자람이 없다. 중생 그대로가 이미 부처이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자리가 불국토여서 한 걸음도 옮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육조 혜능의 가르침은 오히려 그러한 교종의 가르침을 더욱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가르친 것일 뿐이다. 이 관점의 차이가 모든 수행자들을 차별짓는 것이다.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볼 것인가, 하니면 둘 아닌 하나의 절대적 관점을 고수할 것인가? 둘로 벌어지면 곧바로 소승의 태도, 점수론으로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관점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번뇌와 고통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우리 자신이 그대로 부처란 사실을 받아들이고 확인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해 보일 것이다. 오히려 지금 이대로 아무 부족함이 없고, 번뇌의 성품 그대로가 깨달음의 성품이어서 애써 닦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허황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각종 대승경전에선 이러한 가르침을 '불가사의'하다고 말하고 소승의 아라한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리는 우리의 상식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믿음이 강해야 하고 직접 깨달아야만 알 수 있다. 그러하기에 육조 혜능의 가르침이 널리 알려진지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열심히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혜능은 말한다. 자신의 성품을 바로 보라고. 견성하면 곧 부처를 이룬다. 견성성불이다. 성품을 바로 보는 방법은 따로 없다. 길 없는 길이다. 혜능 자신은 우연히 나무 팔다가 누군가가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본성을 깨달았다. 그가 조사의 자리를 이은 후 다른 사람들의 해코지를 피해 달아나다가 자신을 잡으로 쫓아온 혜명이란 스님에겐 '선도 생각말고 악도 생각말라. 바로 이러할 때 어떤 것이 명상좌의 본래면목인가?'란 말로 그를 깨닫게 했다. 이렇게 깨달음은 쉽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불만족스런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 즉 발심을 해야 한다. 그리고 법을 아는 선지식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제자들은 깨닫는다. 석가모니는 45년간 설법해서 무수한 아라한들을 깨닫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도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폈다. 오늘날에도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선지자는 어떠한 수행방편도 거부하고, 심지어 그는 스승조차도 깨달음에 있어선 부정하는 절대적인 관점을 대중 앞에서 설파해 왔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 뿌리 깊은 어리석음, 그 무명의 실체만 바로 볼 수 있다면, 한번도 확인해 보지 않고 당연시한 우리의 존재의 비밀을 통찰한다면 그 즉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과 깨달음 따위와 같은 모든 분별과 망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혜능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친 것이다.



이 책은 청소년을 위한 철학 시리즈 중의 한 권으로 기획된 것이기에 기존의 딱딱한 한문 번역서보다는 읽기 쉽다. 그러나 청소년들에게는 권할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여전히 청소년이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내용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교와 선에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가진 이들이 <육조단경>을 읽기 전이나 읽은 후에 내용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읽어 보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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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되는 공식 - 숨은 도인 겸우선사가 전한 향상일로 6
전재근 지음 / 도피안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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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홀로 진리를 추구하며 안빈낙도의 자세로 살아가는 구도자들이 있다. 서울대 전재근 교수가 스승처럼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겸우 선사 역시 그러한 분 가운데 한 사람이다.

 

수년 전에 선사의 <반야심경> 법문을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 <보는 놈을 봐라>(초롱)란 책이고, 최근 <금강경> 법문을 중심으로 출간된 책이 <부처 되는 공식>(도피안사)이다.

 

겸우 선사(1917~2005)는 29세에 출가하여 수덕사, 해인사, 오대산 중대와 서대, 태백산 도솔암 등에서 수행정진하였고, 불교정화 이후 승적도 없이 토굴 등에서 칩거하며 정진하였다 한다.

 

<반야심경>, <금강경> 등 주요 경전의 원문이나 번역에 오류가 있다 하여 새롭게 고치기도 하고, 육조 이후 중국 조사선(간화선)이 불교를 망쳤다는 파격적인 주장도 서슴치 않는다.

 

새겨들을 만한 부분도 많이 있겠지만 세상을 등지고 홀로 자기만의 세계 속에 침잠한 사람들 특유의 외곬이 많이 엿보인다.

 

선사가 줄곧 강조하는 '본심', '일념불기처', '보는 놈'과 같은 용어는 일찍이 널리 쓰이는 말일 뿐이다. 게다가 '일념불기처'로 예를 들자면, 한 생각도 일으키기 이전의 본래 자리, 본성을 가리키는 이 말 역시 한 생각을 일으킨 다음의 말 마디일 뿐이므로 허물이 적지 않다. '일념불기처'는 이름이 '이념불기처'일 뿐 '일념불기처'는 절대 아닌 것이다.

 

선사의 살림살이가 원래 그랬는지 그것을 기록한 전재근 교수의 안목이 그래서 그런 것인지, 원효나 역대 고승들에 대한 비판, 화두에 대한 비판 역시 말 마디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선사가 지적해 보이려는 대의는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심중과 어찌 한 터럭 만큼의 차이라도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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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삶이 경전이다 - 禪으로 본 금강경
무각 지음 / 불광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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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금강경>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장 최근에 나온 <금강경> 해설서 한 권을 주문해 읽어 보았다. '선으로 본 금강경'이란 부제가 붙어 있어 더욱 관심이 있었는데, 저자인 무각 스님의 안목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다. 경문 해설 끝부분마다 <금강경오가해> 가운데 야부 도천 스님의 게송을 싣고 있어 그 부분만 재미있게 읽었다. 솔직히 스님의 해설은 학자의 부연이거나 억측이 대부분이다.

 

<금강경>의 핵심은 제1분인 법회인유분이다. 부처님이 밥 때가 되어 옷 입고 발우 들고 사위성에 들어가 차례로 밥을 빌어 원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밥 다 드시고 설거지 하고 자리 펴고 앉는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지금 이렇게 분명히 드러난 금강반야바라밀을 직접 보이셨다. 그 뒤부터는 짐짓 수보리가 일어나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부처님으로 하여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법문을 이끌어 내게 된다.

 

<금강경>은 금강 같은 반야 지혜로 열반의 저 언덕으로 이르게 하는 부처님의 법문이다. 금강반야의 지혜는 일체 중생에게 이렇게 드러나 있건만 상(相;생각,견해,분별,모양)에 머물러 집착하는 이유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금강경> 전체 내용은 금강같은 반야 지혜로 일제 중생의 모든 상(相)을 두들겨 부수는 내용이다.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다. 그 가운데 사구게만 알아차려도 나머지 경전은 읽을 필요가 없다.

 

무릇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나니

만약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바로 여래를 보리라

 

만약 모양으로서 여래를 구하거나

음성으로 여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일체의 유위법은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나니

이슬 같고 번갯불 같나니

마땅이 이와 같이 볼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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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사춘기 - 명진 스님의 수행이야기
명진 스님 지음 / 이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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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이란 스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9시 뉴스를 통해서였다. 전방위적으로 벌어진 mb정부의 반정부성향 인사 숙청 바람의 한 귀퉁이에 서울 강남 봉은사 주지인 명진 스님이 일련의 뉴스에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면서 불교계에도 제법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스님도 있구나 하고 심드렁하게 넘어 갔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가 쓴 <스님은 사춘기>란 책을 읽고 이(理)와 사(事)에 걸림없는 출격 대장부이자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을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환갑의 나이가 된 스님은 봉은사 주지도 훌훌 털고 지금 어느 산골의 암자에 기거하고 있다 한다. 이 책을 통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수행자 한 사람을 더 알게 되어 몹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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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닦는다는 것 - 중국 화산파 23대 장문인 곽종인 대사의 선도 이야기
곽종인 지음 / 정신세계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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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의 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다. 선도 수련, 화두 참선, 위빠사나, 영성 수련, 염불, 절, 기도 등등... 그 갖가지 갈래 길의 목적지는 마침내 같은 곳이라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어느 길이든 제대로 가느냐 옆길로 새느냐다. 나보다 수십 년 수행의 길을 걸어 온 선배 수행자의 이야기에 감히 이런 저런 토를 단다는 것이 주제 넘은 것을 알면서도 할 말은 해야 겠다.
  

자칭타칭 여신선이라 불린다는 중국 화산파 23대 장문인 곽종인 도사는 조용헌이란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을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오랜 세월 동안의 선도 수련을 통해 나름의 경지에 오른 그가 자신의 수행담과 수행에 관한 생각을 적은 글이 <도를 닦는다는 것>이란 책이다. 비록 선도 수련은 아니지만 마음 공부의 길을 가는 도반의 심정으로 큰 관심을 가지고 그의 책을 읽어 보았다. 그러나 불과 열 쪽을 읽기도 전에 그만 흥미를 잃고 설렁설렁 그의 무협지와 같은 수행담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책을 덮었다. 
 
긴 말 할 것도 없이 소위 선도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 가운데 하나가 미묘한 환상 경계와 초인적인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른바 산신이니 신령이니 하는 영적 존재가 보이거나 그들의 음성이 들리고, 앞 일을 예지하거나 병을 치료하는 능력 등이 생기면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도의 증표나 되는 듯 생각한다. 호흡이 깊어지고 단전에서 열이 나고 단을 형성하여 혈맥을 타고 이리저리 돌리며 미묘한 경계에 들어가면 흡사 대단한 도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선도 수련에서도 제대로 된 길을 가는 이들은 이러한 함정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저자와 저자와 같은 이들의 능력을 흠모하는 여타 수련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길이 오히려 올바른 수행의 길이라 여길 것이다.

도라고 하는 것이 수십 년 초인적인 수행과 노력을 통해 획득되는 어떤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매일 꾸준히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그리고 그렇게 획득된 경지로서 그렇지 못한 이들과 스스로를 차별짓게 된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런 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흔히 도가라 불리는 선도 수련의 목적이 연단을 통한 장생불사, 나아가 생사를 초월한 신선이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100년도 채 못 사는 일반인과 수백 년 내지 수천 년을 장수하는 신선이 뭐가 다를까? 그들 또한 필사의 존재가 아닐까? 삼천갑자 동방삭도 겨우 삼천갑자를 살았을 뿐이다. 우리 집 뒷동산도 그보다는 오래 존재했다. 수족냉증에 걸려 고생하는 이와 호흡수련으로 온몸이 기운으로 넘치는 수행자와 뭐가 다를까? 물이 얼어 얼음이 되고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된들 그저 똑같은 물일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지금 눈앞의 현실을 벗어나 험준한 산 인적드문 곳에서 도 닦는다는 사람들은 모두 현실도피자들일 뿐이다. 이 적나라한 눈앞의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고 중국 화산 같은 첩첩산중에 가야 찾을 수 있는 도라면 그런 도가 오늘날 우리 현대인에게 도가 무슨 소용인가? 지금 바로 여기서 눈을 깜짝이고 말을 주고 받고 아플 때 아파하고 기쁠 때 기뻐하는 이곳에서 참된 도를 발견하여 안심입명 하지 못한다면 그따위 도는 닦아서 무엇에 쓸 것이냔 말이다. 화산파 장문인이 어떻고 용호가 어떻고 기운이 어떻고 하는 헛소리가 아직도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사람들이란 이렇게 눈요깃거리, 호사가의 잡담거리에 혹하는 모양이다. 참으로 대도가 홍진에 가리워졌구나. 안타까울 뿐이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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