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문이 잔뜩이었던 <환상의 빛>을 읽었을때는 사랑하기 전이었고, 미야모토 테루의 다른 작품 <금수>를 읽고 있는 지금은 사랑하고 있다.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조곤조곤 가만가만 진행되는 이야기는 <환상의 빛>과 비슷한 느낌이긴한데,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적셔지듯 와닿는다.

 

지체장애아인 별을 보기를 좋아하는 아들을 데리고 케이블카를 탄 여자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 십년만에 전남편을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편지를 쓴다.

 

자오의 달리아 화원에서 돗코누마로 오르는 케이블카 리프트 안에서 설마 당신과 재회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라는 첫문장으로 시작한다.

 

우연히 케이블카에서 마주치고, 승강장에 도착해 인사하고 헤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넋을 놓고 전남편을 떠올린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 중에는 올라갈때와는 다른 소회이다.

 

이번에 케이블카에는 우리 모자뿐이었는데, 저는 다시 거기서 절정인 단풍을 보았습니다.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든 것이 아니라 상록수나 갈색 잎, 은행잎 비슷한 금색 잎에 섞여 새빨갛게 우거진숲이 단속적으로 케이블카 양옆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붉은 잎은 한층 더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수만 종이나 되는 색채의 틈으로 커다란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생각에 휩싸여 저는 소리도 내지 않고 넋이 나간 채 그저 울창한 수목의 배색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득 뭔가 무서운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다양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로 하면 아마 몇 시간이나 걸릴 것을, 단풍이 하나하나 눈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 짧은 순간에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하면 과장된 것일까요?

 

편지글에서 십년전에 그들이 헤어지게 되었던 사건이 이야기된다. 어느 새벽 경찰로 부터 받은 전화. 남편이 호스티스와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하였고, 여자는 거의 즉사, 남편은 위독하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 십년 전 스물 다섯으로 어렸던 여자, 스물 일곱으로 역시 어렸던 남자. 대학시절부터 연애를 했고, 결혼한지 이제 2년에 서로 사랑하고 아무 문제없다고 믿었던 일상을 깨버린 남자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여자는 십년전에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뒤늦게, 아주 늦게 편지를 통해 꺼낸다. 호스티스와 바람난 줄 알았던 때와 그녀와 남편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이라는 걸 알고난 후, 그리고 남편이 그 사실을 끝까지 숨긴 것에 대해 죽고 없는 그녀에 대한 강렬한 질투심을 느끼게 되는 과정, 헤어지고 난 후 재혼하여 지체아인 아들을 가지게 되어 그 또한 전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쌓아가다가 아이를 돌보게 되며 묻어가는 과정들이 섬세하게 마음을 후빈다.

 

지금 저는 몇 가지 불만은 있지만 그럭저럭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이혼해서 불행해졌다는 생각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치 뭔가에 대한 오기처럼 계속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불행해지기를 결코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불행해지기를 결코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것 역시 오기처럼 마음속으로 늘 빌었습니다.

 

 

여자가 부리는 그 오기들, 사랑하고, 헤어진 여자가 부리는 오기들이 남의 것 같지 않다.

 

이제 남자의 편지를 읽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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