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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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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마르케즈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책이 번역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며, "어이쿠, 그 양반, 결국 쓰기는 썼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라는 중편을 읽은 감동에, 언젠가 그와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언급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전까지는 정말 "거들떠보지도 않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고리짝 시절 작가의 소설을 난생 처음 읽어보게 만든 원인이 바로 가르시아-마르케즈의 에세이 <잠자는 미녀의 비행기>였기 때문이다. 송병선 번역으로 나온 그의 작품 선집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꿈을 빌려드립니다>(두 권 모두 같은 책인데, 뒤엣 것은 몇 편이 추가되어 증보판으로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에 수록된 이 에세이를 읽고서 나는 그제서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라는 중편을 찾아 읽어 볼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물론 가르시아-마르케즈는 "언론인" 출신이라는 이력과는 달리 은근히 애매하거나 오류인 대목을 버젓이 서술하고 있는데, 혹시나 번역이 이상한 까닭인지 모르지만 방금 언급한 에세이에서도 몇 가지 오류가 눈에 뜨었다. 가령 가와바타가 "다자이 오사무와 마찬가지로 (...) 일본도로 할복했다"고 묘사한 부분이나, [실제로는 가스를 마시고 자살] 가와바타보다 미시마 유키오가 나중에 자살했다고 [실제로는 미시마가 가와바타보다 몇 년 일찍 자살했다] 서술한 부분은 명백한 오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작품은 1960년대에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여섯 권짜리 <川端康成全集>에만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읽은 것은 언젠가 장정일이 그랬다는 것처럼 헌책방에 가는 꿈을 꾸고 나서 묘한 기분에 비번인 토요일에 회사에 출근하기 앞서 근처 헌책방에 들렀다가, 정말 운 좋게도 전집을 구입하게 된 다음이었다. 가르시아-마르케즈가 너무나도 유쾌한 에세이를 쓴 까닭이었을까, 가와바타의 <잠자는 미녀>는 무척이나 서글프기 짝이 없는 작품이었다. 나이 67세의 노인 에구치는 친구의 소개로 이른바 "잠자는 미녀"를 서비스한다는 수상쩍은 유곽에 찾아간다. 그곳에서는 젊은 아가씨에게 수면제를 먹여 잠자는 채로 성기능이 이미 퇴화된 노인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소설은 에구치 노인이 뭔가 찜찜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따뜻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쌕쌕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처녀들의 옆에서, 자기가 젊은 시절 만난 여러 여인들을 하릴없이 회상한다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줄거리만 보면 마치 동양권에서도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못지 않은 변태 할아범의 이야기가 나왔구나 하는 감탄과 비난이 빗발칠 것 같지만, 솔직히 막상 책을 읽어보면 에로틱한 기분보다는 서글픈 기분이 앞서게 마련이다. 왜, 이제 남은 것은 죽음밖에는 없는 무기력한 노인과, 그야말로 눈부시게 팽팽한 육체를 가진 무방비의 처녀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대상의 만남이 비록 겉으로는 에로티시즘을 깔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쓴웃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진수성찬과 산해진미를 코앞에 두고도 치아가 없어 차마 먹을 수 없는 난처함과도 비슷한 (돌 던지려면 던지든가!) 상황이 아닌가! 변태라고 욕하면 욕하고, 여성의 비하라면 비하라고 비난해도 그만이다. 적어도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가와바타의 작품은 소재 자체로도 무척이나 독특하고, 또 기이한 작품이었다. 물론 내 기억에 더 생생하게 남은 것은 "터널을 지나고 나니 설국이었다"라는 <설국>의 도입부와 "뇌수가 모두 눈물로 빠져나갈 때까지 엉엉 울었다"는 <이즈의 무희>의 마지막 문장이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알기로, 가르시아-마르케즈는 가와바타의 <잠자는 미녀>를 읽고 나서, 프랑스 파리에서 뉴욕을 거쳐 남미로 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어느 미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에세이 한 편과 소설 한 편을 썼다. 정확한 출간 연도를 알 수 없어 (번역본의 문제점) 어떤 것이 먼저인지는 결정할 수 없지만, 에세이는 위에 언급했던 송병선 번역의 두 가지 작품 선집에 수록되었고, 소설은 <이방의 순례자들>(한나래)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되었다. 소재가 같은 만큼,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파리에서 탄 비행기에서 우연히 "기막히게 매력적인" 어느 젊은 여성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녀는 애석하게도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8시간 내내 "쌕쌕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만 자더라는 것이다. 매력적이지만, 차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 미녀의 잠자는 모습을 한참 동안 관찰한 저자는 문득 가와바타의 <잠자는 미녀>에 나온 에구치 노인의 입장과 자신의 입장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뉴욕에 거의 다 온 상황에서 저자가 그 여인을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여인은 거짓말처럼 혼자 잠에서 깨어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화장을 고치고 나서, 저자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비행기에서 내려 버린다. 여기서 에세이와 소설은 약간 차이가 있는데, 가와바타에 대해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토로하는 에세이와는 달리,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자인 가르시아-마르케즈의 목소리만이 나타나 있다. 또한 에세이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그 여인을 잃어버린 묘한 상실감에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입국서류에 자기 나이와 직업을 "92세, 일본 작가"라고 적는 데 반해, 소설은 그 여인이 뉴욕에서 내린 것으로 끝나버리고 있다. 하여간 동일한 소재를 가지고 에세이와 단편 두 가지로 빚어냈다는 것만 보아도, 저자가 가와바타의 작품에 보통 이상으로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나이 어린 소녀가 몸을 파는 것"에 대한 저자의 매혹은 단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그의 대표작인 <백년의 고독>을 보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젊은 시절 만난 어느 창녀의 이야기가 잠깐 등장한다. 얼떨결에 돈을 내고 그녀가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간 아우렐리아노는 그녀가 "잠결에 할머니의 집을 태운 까닭에 그 배상을 위해 창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아무 짓도 못하고 그대로 천막을 나온 뒤 밤새 고민한 끝에 그녀를 아내로 맞기 위해 다음날 아침 일찍 천막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곳을 떠난 직후였다. <백년의 고독>에 나온 마마 그랑데의 이야기가 단편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에서도 나오듯이, 이 어린 창녀의 이야기는 훗날 <순진한 에렌디라와 포악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슬픈 이야기>라는 제목의 중편으로 각색되어 출간된다. (그리고 에렌디라가 자리를 잡은 장터에서 마찬가지로 좌판을 벌인 '블란카만'은 또 다른 단편 <기적을 파는 착한 사람 블란카만>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한 <하늘에서의 사랑>이라는 또 다른 자전적 에세이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찾아갔던 사창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만 보아도, 가르시아-마르케즈에게 있어 사창가나 창녀라는 대상은 그리 낯설거나 민망한 소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굳이 <백년의 고독>에 나오는 필라르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똑같은 에로티시즘이라 해도 가와바타가 묘사한 일본의 것과, 가르시아-마르케즈가 묘사한 남미의 것은 뭔가 좀 다르지 않나 하는 기분이다. 일본 것이 어딘가 좀 기묘하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남미 것은 오히려 솔직하기 때문에 건강하다는 느낌조차 든다. 어쩌면 일본에 대한 편견이나, 남미에 대한 선입견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소설 자체는 여전히 가르시아-마르케즈 다운, 솔직한 건강한 에로티시즘이 압도적이라는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미 가와바타와 나보코프를 열광하며 읽은 탓에, 적어도 "순수한 소녀를 넘보는 추악한 노인"에 대한 혐오감이나 뭐 그런 것은 아예 사라진 지 오래인 까닭도 있을 것이다. 가와바타의 <잠자는 미녀>가 직접적인 에로티시즘보다는 아직 만개하지 않은 젊은 처녀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그러나 탐미적으로 그리고 있는 데 비해, 가르시아-마르케즈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오히려 유쾌하고 해학적인 데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소설의 화자의 노쇠와 무기력에 대한 회한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이지만, 가와바타의 노인이 점점 짙어만 가는 자신의 무기력을 느끼면서도 탐미적으로 "잠자는 미녀들" (그가 갈 때마다 상대인 아가씨들은 계속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 에 빠져드는 반면, 가르시아-마르케즈는 오히려 잠든 소녀를 통해 다시 한 번 회춘하며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사랑의 감정에 몸부림치니 말이다. 여기서 문득 이 소설을 단지 "순수한 소녀와 추악한 노인"의 관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는 사실에 좀 놀라게 된다. 마침 김기덕의 신작 영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사실에 거부반응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솔직히 영화나 소설은 그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단지 "노인은 변태새끼다" 혹은 "소녀가 불쌍하다"는 차원으로만 그치고 말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거다. 마찬가지로 나로선 "노인과 소녀의 숭고한 사랑"이니 "세대를 뛰어넘은 러브스토리"라는 식의 무조건적인 찬양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패러디"로 봐야 한다.  가르시아-마르케즈의 창의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이 작품은 가와바타의 <잠자는 미녀>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 확실하기 (저자가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까)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가와바타의 작품을 읽는 것이 "필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패러디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라면, 패러디의 대상이 된 원저를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패러디라고 해서, 요즘 개그맨들이 주절거리듯이 아무 생각 없는 "흉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소재를 놓고서도 가르시아-마르케즈의 이야기가 독특한 만큼, 가와바타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도 또 다른 감동과 아울러, 이 작품에 대한 좀 더 깊고 사려깊은 생각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소재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기에 앞서, 가와바타를 먼저 읽고, 가르시아-마르케즈는 그로부터 영향받은 작품이란 사실을 기억하며,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내 제안에 따를 사람이 많지야 않겠지만. 죽은 듯 몸을 움직이지 못하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몸을 제공하는 여성의 이야기라니, 여기서 문득 <뉴로맨서>의 몰리 언니 이야기를 꺼내면 지나친 비약일까? [<매트릭스>의 트리니티를 연상시키는 여전사 몰리는 온 몸에 무기를 장착하는 개조 수술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사이버 유곽에서 일한다. 즉 <잠자는 미녀>와 비슷한 식으로 자기 두뇌에 전극을 연결하여, 잠들어 있는 동안 멀리 떨어져 있는 유곽에서 자기 몸을 손님들이 마음껏 주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술 부작용으로 인해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얼떨결에 자기에게 가학적인 행위를 가하던 유력한 정치가인 손님을 죽이고, 그로 인해 한동안 뒷골목으로 잠적해 숨어다니는 생활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책을 덮으면서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가와바타를 은근히 동경했다면, 가르시아-마르케즈도 어쩌면 그토록 약간은 독자에게 지루한 감을 주더라도 오히려 탐미적인 성향의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의 성격은 분명 탐미적이거나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의 성격은 제아무리 진지하려고 해도 어디선가 돼지꼬리나, 하늘로의 승천이나, 쉴 새 없이 주위를 배회하는 망령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것이 아닐까. 하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그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로 꼽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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