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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손아람 지음 / 들녘 / 2015년 6월
평점 :
소수의견 : 대법원 등의 합의체 재판부에서 판결을 도출하는 다수 법관의 의견에 반하는 법관의 의견.
원작이 있고, 영화가 있는 경우, 나는 글자를 먼저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소수의견'의 경우에는 원작이 있는지도 몰랐고, 영화를 먼저 보게 되었던 경우다. 원작을 영화로 만들때 꽤 높은 확률로 실망스럽고, 아주 좋아야 본전인 경우가 대부분인데,(이건 내가 책읽기를 영화보기에 비해 월등히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수의견'의 경우는 영화를 먼저 본 것도 괜찮지 않았나 싶다. 영화 자체로도 굉장히 좋았고, 윤계상이란 배우가 처음으로 정말 멋진 배우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계상과 윤변호사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없었고, 너무 매력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던 대석의 역을 유해진이 맡은 것도 괜찮았다고 본다. 김옥빈이 맡은 기자 역도 괜찮았는데, 여기에 법학과 교수 이민주가 빠진 것은 너무 아쉽다! 책에서도 영화에서처럼 몇 번인가의 카타르시스가 있는데, 그 중에 야당 의원이 얼렁뚱땅 하고 지나간것이 알고보니 이주민이 나오는 꽤나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이 외에도 이주민은 등장하는 윤계상,유해진,야당의원,이준형기자,염교수 등등에 녹아 있다. 박재호역은 이경영이 맡아서 더 인상적으로 나왔던 것 같다. 책에 나온 부분이 거의 빠지지 않고 다 나왔다.
영화 '소수의견'이 정말 좋았던건 내게 변호사가 주인공인 사회파 미스터리로 읽혔기 때문인데, 책으로 읽으면 법정물에 더 가깝다. 영화의 마지막 법정씬이 좀 오버스러웠던 점이 유일하게 거슬린 점이었는데, 책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다 좋았어서 영화는 이 점이 좋았고, 책은 이 점이 좋았다. 는 정도의 비교만 계속 된다.
내용을 다 알고 읽는데도 정말 재미있게 밤을 꼴딱 새며 읽었다. 영화는 원작에 굉장히 충실해서 재미있는 부분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다 담았고, 책에서는 윤변의 과거와 배경에 대해,그리고 변호사로서의 고민에 대해 더 디테일하게 나와 있어 좋았다.
'소수의견'이라는 것이 단순히 소수의 의견이 아니라 전문용어인건가 하고 찾아보지 못했는데, 법정용어로 맨앞에 썼듯이 '다수 법관에 반하는 법관의 의견' 이다. 그러고보니 간간히 뉴스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철거현장에서 아이가 죽었고, 아이의 아빠가 경찰을 죽였다. 아이 아빠, 박재호의 국선변호를 맡게 된 윤변호사는 박재호의 아들 박신우를 죽인 것이 철거용역이 아니라 경찰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학벌도 인맥도 없고 집도 가난하고 의욕도 없는 평범한(?) 국선변호사에게 떨어진 사건 중에 하나였던 그는 사건을 맡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알게 되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에서 '정당방위'로, 그리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을 함께 진행하게 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보통 국선변호인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 나는 왜 국선변호인을 그만두지 못하는가. 국가가 나에게 월급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내가 국선변호인인 한 국가는 나에게 돈을 준다. 그건 의지와 생계 사이의 문제였다. 사람들은 그런 기로에 봉착하면 양자택일을 하는 대신, 그냥 현재를 택한다. 나머지 문제는 미래라는 관성에 내맡긴 채 삶을 굴려 내보내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곧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사람들은 그런 때를 맞는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평범한 직업은 아니지만, 그들 세계에서 윤변호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우연히 맡게 된 사건, 그리고 그 주위의 사람들로 인해 그는 인생 사건이 될 박재호 사건을 맡아 이름을 알리게 된다. 평범한 누군가도 언제든지 이렇게 시험에 들 수 있다. 그럴 때의 선택이 항상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울 수 없지만, 계속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자만하더라도 반성할 줄 알고, 인생에 큰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계속 밟히는건 거부하는 그런 '작은 인간' 으로 나온다. 영화에서 윤계상이 윤변 그 자체인듯 너무나 잘 표현해주었고, 책에서 그 디테일을 채울 수 있었다.
"만약, 만약에 내가 국선전담변호사를 그만둔다면."
대석은 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 넌 국가소송이 끝나기 전에 굶어죽어. 이기지도 못할 재판과 정의에 대한 알량한 환상 때문에. 넌 평범한 민사소송을 해본 전력도 없잖아."
나도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봤다. 계속 고민하고 있다. 삶의 국면마다 비슷한 질문들이 있었다. 법대를 졸업하는 날부터,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국선변호인이 된 지금까지. 기척 없이뿌려진 무수히 많은 질문들. 기억은 시간 속으로 제각기 흩어졌지만 질문들의 몸통은 결국 하나였다.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의 문제.
"올리버 홈즈 전 미국 연방대법관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 사람은 재직기간 동안 연방대법원 자료실에 파격적인 소수의견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놨습니다. 한때는 그가 정신병자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자 그가 내놓은 소수의견들의 대부분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주류적 입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형사 법정에서도 모자라 이제 민사 법정에서까지 검사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누군가 강력한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투견처럼 용맹한 검사 군단으로 우리의 목을 물어 뜯어버리겠다는 의지를. 그들은 두려워하길 바랐겠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사실 쾌감에 가까웠다. 이 나라 모든 검사의 적이 된다 한들,우리는 여전히 단 한 사람의 변호사일 뿐이다. 낭만적이었다.
서랍 안에는 별게 없다. 통장은 하나다. 거래내역도 잔고도 짧다. 숫자는 일곱 자리다. 642만 7847, 당연히 달라는 아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죽도록 세상을 달린 결과가 그거였다. 세상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종종 커다란 피해를 끼치기도 했다. 나는 세상을 향해 투덜걸지 않는다. 다행히 변호사가 됐기 때문이다.
청구금액이 11억 원이라면 소송인세 비용만 해도 상당했을 것이다. 원고들은 재개발이 필요한 낙후지역의 부동산 소유자들이었으니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 터다. 나는 적어도 이들이 가진 피해의식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단지 한 세기 전의 사고방식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지지정당이 자신들의 이권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판단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들. 자기 아들이, 또 자기 손자가 희생되지 않는 한 현존하는 세계의 실제 모습을 회의해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을 사람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 역시 피해자였다.
세상의 주어진 하루마다 많은 생물들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상들이, 많은 문화들이 도태된다. 그것은 멸종이고 멸종은 적자생존의 법이다. 연민은 자연의 법을 거스르는 허위인가. 나는 진화론자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연민은 왜 진화했는가. 그렇다면 연민은 왜 도태되지 않았는가.
나는 걸어나갔다. 4번 배심원이 남긴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다. 저 개새끼. 법정을 나설 때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으스대는 얼굴. 이 법정에서 자신만이 정의롭고, 자신만이 솔직하고, 자신만이 실천주의자라고 공표하는 확신에 찬 얼굴. 정의의 진짜 적은 불의가 아니라 무지와 무능이다. 역사를 통틀어 그래 왔다.
우리는 개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역사를 사는 것이다.
노무현 (前 대한민국 대통령,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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