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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지음, 정승희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난 단편집을 좋아한다.
중남미 소설을 좋아한다.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라는 작가의 프로필도 맘에 든다. ' 여성, 동성애자, 좌파'인 그녀는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을 통해 제도와 문명이라는 틀 속에서 살아가는 회의하고 주저하는 일상의 순간, 현대적 삶의 편린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무려 서른개의 단편이 있으니 책도 실하다.
제목들도 너무 멋지다. '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 '장거리 주자 멈추어서다', '언어의 심연' , '도마뱀의 크리스마스' ,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한 지침들' , '빛이 물고기에게 미치는 영향', '돼지에게 국화 먹이기' ...
단편들의 내용들은 '어디선가 읽은' 이라기 보다 ' 신선한 날것의 새로운' 느낌이다.
동시에 ' 지루해서 죽을 것 같은' 과 ' 잔인해서 눈쌀 찌푸리게 하는 ' 이기도 하다.
이 모든걸 다 함께 지닌 단편집이라니.
읽어볼 시도 해볼만하다.
표제작이기도 한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은 어느 정크야드에 세워진 '쓸모없는 노력' 의 기록을 모아 놓은 박물관과 그 박물관을 매일같이 방문해서 기록을 열람하는 '나'의 이야기이다.
' 가계도를 복원하고, 금을 찾아 광산을 파헤치거나, 책을 쓰는 것 같은 쓸모없는 노력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복권에 당첨되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책에서 이야기되는 '쓸모없는' 은 머릿속에서 계속 퍼져나가서, 이 세상의 모든 행동과 꿈들이 '쓸모없는 짓'으로 분류되어 박물관 어딘가 처박혀 있을 것 같은 염세적인 마음마저 들게 한다.
그 외에도 '모나리자' 에서는 뒤샹의 '모나리자' ( 콧수염 그려진) 을 보고 스토리를 새롭게 만들어 내고 '타잔의 외침' 에서는 은퇴한 배우 자니 와이즈물러( 초대 타잔역) 에 대해 희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등 현재를 관찰해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시간이 약이다' , '창과 벽 사이' ( 스페인 숙어로 곤란에 빠졌다는 뜻) , ' 고집스런 양 한마리' 에서는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의 꼬.투.리.를 잡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망명작가인 그녀의 경험은 '조각상들과 이방인들의 조건' ' 도시' 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으며,
그런 경험에서 나왔을법한 사회와의 화해. 충돌에 관한 이야기들도 '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한 지침' , ' 느슨한 줄에서 살기' 등에서 볼 수 있다.
줄거리만으로는 종합선물세트같은 단편집이 아닐 수 없다.
여기 모인 단편들을 난 '미완성' 혹은 '메모'라 부르고 싶긴 하다. 단순히 길이가 짧아서, 스토리가 완결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평생 단편만을 썼던 보르헤스의 그 단편들에 집약된 완벽하고 완전하며 완결된 느낌을 받기 힘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