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담론을 만들어내는 책들이 있다. '88만원 세대'라던가, 피케티의'21세기 자본'이라던가. 

이 책도 그런 조짐을 보인다. 어젯밤에 잠깐 읽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흥미롭게 잘 읽힌다.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역자서문, 저자의 한국판 서문과 프롤로그에 잘 나와 있지만,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해 단숨에 읽어낼 것이다. 

2010년에 방송된 대하드라마 '료마전'에서 오카다 이조로 분했던 사토 다케루(당시 21세, 사이타마 현)는 에도바쿠후 말기와 현대를 비교하면서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에도바쿠후 말기가 아닌 현대에 태어나고 싶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칼로 사람을 베야만 살아나을 수 있었던 바쿠후말기의 상황과 달리, 요즘 시대는 "1박 2일 일정으로, 친구들과 함께 바비큐를 먹으며 지바로 가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카모토 료마처럼 유신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것이 아니다. 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영웅으로 칭송받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사토 다케루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영웅주의가 아니다. 단지 "1박 2일 일정으로, 친구들과 함께 바비큐를 먹으러 지바로 가는" 작은 행복인 것이다
사토 다케루의 발언이 상징하는 바대로, 요즘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생각은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및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 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본 경제의 회생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혁명 역시 그리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현대 사회에 잘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젊은이들이 행복하다."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프라와 생활 환경의 측면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최고의 '풍요'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이 아무리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해도, 그 '행복'을 지탱해 주는 생활 기반은 서서히 썩어 들기 시작해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는, 이처럼 '뒤틀린' 사회 구조 내부로부터 젊은이들 스스로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기묘한' 안정감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많은 면에서 우리나라를10- 20년 앞서가고 있어서 2001년에 나온 이 책은 여전히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이다. 다시 뒤져보지 않아도 머리에 쏙쏙 박히는 몇가지 팩트들은 일본보다 더욱 암울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짐작케한다. OECD 국가들 중 젊은이들의 자살율이 지난 10년간 가장 높다거나, 노인빈곤률이 OECD 국가들 중 압도적으로 1위라던가. 일본의 평균 연령이 45세이고, 한국은 38세로 젊은 나라이지만, 우리나라의 노령화 속도는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하다는 거.    


이와 같은 세대 문제에 자유로운 연령대는 없을 것이다. 젊은이도, 노인도. 이이슈와 관련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페이퍼 제목으로 적은 '절망의 나라 불행한 젊은이들' 은 한국 젊은이들을 말한거지만, 이 책의 제목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다. 서문에 힘들어도 만족하고 소소한 기쁨을 찾아라. 라는 이슈로 이용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놀랐다. 절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은 한국에서 오해받기 딱 좋은 책이다. 제목만 보면 '힘들어도 행복을 추구하는 젊은이가 있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 않는가? 이것은 '고난을긍정적으로 이겨 내는 스토리'를 과하게 좋아하는 한국 사회의 특징과 무척이나 어울린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에 대한 절망감에 행복해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불평 좀 하지 마라.'라면서 권장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이 책은 그런 '주술적'인 내용이 아니다. 

노리토시의 사회학적 시대 진단은 간단하다. 첫째, 일본 사회는 절망적이다. 둘째, 일본 사회에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인과 관계로 엮여 있다. 즉, 절망적인 사회 덕택에 개인이 행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다음 질문이 가능하다. 아니, 사회가 뒤틀렸는데, 어떻게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기묘한' 안정감이 가능하지?


노리토시는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그가 발견한 젊은이들의 '행복'은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지 않기에 가능하다. 쉽게 말해, 미래를 포기 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지다. 


  

저자가 제시하는 결말과 제안도 상당히 현실적이라 읽어나가면서 실망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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