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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고헤이지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북스피어에서 나와서 잠깐 방심했는데, 이건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물이 아니라 교고쿠 나쓰히코의 시대물이었다.
교고쿠 나쓰히코는 '만만함'이란 없는 작가이다.
독자는 장광설에 멍해졌다 머리를 써보려고 노력해보았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내가 지금 뭘 읽은건가 싶지만, 그래도 뭔가 대단한 것을 읽은 것 같아. 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느낌이 덜하고 더한 차이가 있을 뿐. 만만한 작품이 없다.
눈부신 햇빛 아래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지만, 캄캄한 어둠도 큰 차이는 없다. 그래서 고헤이지는 늘 어둑한 곳에 있다. 그리고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있다.
젖지도 마르지도 않은, 어둑어둑하고 차갑고, 먼지 냄새밖에 나지 않는 헛방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내밀고, 늘 눈알이 마를 정도로 눈을 부릅떠 눈동자에 힘을 주고 꼼짝도 않고 있는 것이다.
헛방의 문은 살짝 열려 있다.
닫아 버리면 안은 어둠이 된다. 따라서 반드시 열어 둔다.
가늘고 가느다란 길쭉한 틈이야말로 고헹지에게는 세상이다.
그 가늘고 가느다란 길쭉한 틈이야말로 고헤이지에게는 세상이다.
그 가늘고 가느다란 길쭉한 틈에서 새어들어 오는 희미한 빛만이 고헤이지를 비추는 것이다.
짧은 분량 아니지만, 교고쿠 나쓰히코의 다른 작품들 중 워낙 벽돌분량의 책이 많이 나왔으니, 그렇게 긴 분량도 아니다.
'엿보는 고헤이지'의 가장 큰 인상은 위의 인용이다.
쓸모없는, 존재감 없는, 인간 같지 않은 고헤이지는 배우다. 주어진 대사만 겨우겨우 더듬거리며 뱉어내는 정도이니 제대로 된 배우일리 없다. 하지만, 그런 그가 누구보다 잘 하는 것은 '유령' 역이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살았는지, 죽었는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 존재감 없는 존재감으로 극단과 함께 지방으로 공연을 따라가게 된다.
전처와 아들이 죽고, 오쓰카와 함께 살고 있다.
오쓰카는 엿보는 고헤이지를 매일매일 미워한다.
고헤이지를 끌어들인 이들은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악당들이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지헤이의 과거를 알게 된다.
유쾌한 인과응보일리 없다. 맘 놓이는 인과응보도 아니다. 처절한 인과응보다. 처절함에 감정이입도 못하게 하는게
유령 고헤이지이다.
고헤이지의 이야기, 지헤이의 이야기, 오쓰카의 이야기, 다쿠로의 이야기, 기지로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하는 책.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떻게 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하는 데 무슨 의미가있는지, 그 점을 잘 알 수가 없다. 맛있다고 생각하면 맛없는 것도 없다. 기쁘다고 생각하면 슬픈 일도 없다. 가엾다고 생각하면 분하지도 않다.
누구든 맛없는 것은 먹고 싶지 않을 것이다. 슬픈 일도 당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분한 마음도 느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좋은 생활, 기쁜 생각, 즐거운 생각을 하고 싶기 때문에 사람은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리라.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도, 꾹 참고 견디는 것도, 남의 눈에 신경을 쓰며 꾸미는 것도, 모두 좋은 일을 불러들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근면과 소박함을 칭찬하지만, 오쓰카는 과연 그럴까 하고 의심한다. 오쓰카는 근며놔 욕심을 구별하지 못한다. 검약과 인색의 차이를 모르겠다. 정애와 집착의 차이를 모른다.
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는 생활이, 나태하게 지내는 생활이 어디가 나쁜지, 지금의 오쓰카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