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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한다. 밥쪽으로 끌려아야만 또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밥벌이가 지겹다는 말은 처음의 공감의 단계를 넘어가, 이제는 그마저 너무 흔해져버려 '그래서 어쩌라구' 하는 심정이 되어버린다. 아주 오래간만에 읽는 김훈의 문장은 어떻게 끄적이건간에, 촘촘하게 날이 서있다. 세상에 예민한 작가의 글은 깜냥 안 되는 독자를 피곤하게 한다.
연필과 지우개와 종이를 놀려 밥벌이를 하는 작가는 몸에 대한 자연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인지, 인간이라면 가져야할 자연스러운 동경인지 모르겠다.
전화기 너머, 모니터 너머의 누군가와 숫자와 돈으로 밥벌이를 하던 나는 몸을 쓰는 일을 하는 지금, 몸 쓰는 일의 정직함과 보람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고, 감탄하고 있기에, 후자인걸로 하고 싶다.
자장면을 배달하던 소년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자장면 배달통이 깨어져 내용물이 쏟아져 ㅏ왔다. 우동과 짬뽕과 군만두가 아스팔트에 쏟아졌고 나무젓가락이 흩어졌다. 짬뽕 국물이 피와 범벅이 되어 아스팔트에 늘어 붙었다. 음식을 주문한 사람은 아마도 배달이 너무 늦는다고 식당에 전화를 했을 것이다.
일상은 아니지만, 매일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주변의 일도 김훈의 문장을 거치면, 불편할 정도로 생생해진다.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이 나오던 그 때처럼 지금도 연필과 지우개와 종이를 쓰고 있을까? '핸드폰'이라는 낚싯바늘을 삼켰지만, 여전히 자동차를 싫어할까? 그럴것 같다.
자전거와 바퀴 이야기는 지루했지만, 꽃과 풀과 물고기와 새 이야기는 다시 눈여겨 봤다.
꽃은 꽃 한송이로서 아름답고 자족한 세계를 이룬다. 꽃은 식물의 성적인 완성이며, 존재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은 스스로 자지러진다.꽃에는 그리움이 없다. 꽃은 스스로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워하게 한다.
몸과 자연에 몰두하는 작가는 노동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나는 노동을 싫어한다. 불가피해서 한다. 노는게 신성하다. 노동엔 인간을 파괴하는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노동에 의해 구성돼 있다. 나는 평생 노동을 했다. 노동을 하면 인간이 깨진다는거 놀아보면 안다. 나는 일할 때도 있었고 놀 때도 있었지만 놀 때 인간이 온전해지고 깊어지는 걸 느꼈다. 기자를 보면 기자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같이 보이는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거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좀 다른 얘기긴 한데, 예술하는 사람들이 독특한건, 독특하지 않게 굴어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대부분의 우리는 밥벌이를 위해 평범한데 말이다.
김훈의 글은 독자를 밀어붙이는 것 같다. 나같은 독자는 밀어 붙이는대로 밀릴 수 밖에 없는 무력한 기분이다.
'밥벌이의 지겨움'의 마지막 장을 덮고, 바로 읽기 시작한 책이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 였다. 강상중, 소세키, 빅터 프랑클, 의 이야기를 읽으니, 김훈의 글과 태도가 더욱 억세게 느껴진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