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책,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올해는 아직 반이나 남았지만, 꽃집에서의 아주 바쁜 반이 가고, 꽃집에서의 아주 한가한 반이 남았지만,
그말인즉슨, 나는 책을 지금까지 읽은 것보다 훨씬 많이 읽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올해의 책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보통 열 권 정도를 꼽는다. )
2011년 맨부커상 숏리스트가 발표되며 위원회에서 후보작을 고르는 기준으로 '가독성readability'를 내세웠고, 심사위원장인 스텔라 리밍턴은 '(맨부커상) 수상작품을 독자들이 사서, 직접 읽기를 바란다. (...) 사지는 않으면서 숭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라고 했고, 수많은 작가, 평론가, 문학 에이전트, 그리고 아마 독자들도 반박하고, 거기에 또 반박하며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맨부커상의 수상작이 결정되었을 때, 모두가 평화로웠다.
왜?
문학성과 가독성의 두마리 토끼를 잡고, 대중작가로도 인기 있고, 맨부커상 후보에 세 번이나 올라 평론가들의 호평도 받는 줄리언 반스의 작품들 중에서도 눈이 번쩍 뜨일만큼 뛰어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가독성과 숭배 사이에서 '숭배'하고, '사기'까지는 하지만, '읽기'는 살짝 아슬아슬했던 것 같다.
짧은 분량 뿐만 아니라 ( 원서로 150여페이지) 줄리언 반스의 프로필의 사진엔 주름이 자글자글해져버렸지만, 여전히 재기발랄해서, 이렇게 늙어서 이렇게 재기발라해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성장소설, 미스터리, 연애소설, 원하는대로 읽어도 좋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sense of ending>의 맨부커상이라는 후광과 유독 재미있었던 뒷이야기, 그리고 줄리언 반스라는 이름을 제쳐놓더라도 이 책은 나의 올해의 책이자, 요즘 새로이 작성하고 있는 '100권의 책' 리스트에 오랜만에 업데이트 된 책이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사고를 치자! '인생 블랙박스'론은 뒤에 나오는 글로 보충된다.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이 부분에서 가슴이 쿵 -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걸까. 놀라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무뎌졌다고 하는데, 그건 그냥 거북이마냥 두껍고 두꺼운 껍데기 안에 들어 앉아 있었던건 아닐까. 환희와 절망, 자책을 마음속 깊이서 우러나와 해 본적이 언제였더라. 환희, 절망, 자책외의 모든 감정적인 것을 그저 다듬으며 다독이며 참으며 방관하며 지내고 있는건 아닐까.
무채색이나 파스텔이 나쁘고, 비비드한 색만이 맞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색이건간에, 어떤 삶이건간에 '내가 선택한' 것일 것. 이라는 것이 중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내가 중심일 것.
그런 생각들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