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제주에 갈 때, 세 권의 책을 가져갔다.
제주바람 맞으며 몇 번째인가 다시 읽은 <화차>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파 추리소설 중 대표적인 작품이지만, 이전에 읽었을 때, 이건 신용카드 문제를 다룬 책이 아니라구. ( 물론 다룬거 맞는데, 그게 주가 아니라구) 생각했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아주 오래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는데 (구하기가 어려워 시아 출판사에 전화해서 출판사 앞까지 가서 받았던 책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 외적, 내적 다) 지금도 역시 변함없이 '문제다' 라는 점이, 변함없어 좋으면서도 (그럴리가!) 갑갑하기도 하고..
띠지는 맘에 안 들고, 결말을 내버린 영화도 볼 생각 없지만, 문학동네에서 나온 <화차>의 표지는 책의 내용과 참 잘 어울린다 싶다.
"정보파산?"
"네. 이렇게 저렇게 하면 돈을 왕창 벌 수 있다. 주식을 해라, 아니, 집을 사라, 아니, 골프회원권이다 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한창 놀고 싶을 나이의 젊은이들은 요새는 어느 나라가 재미있다느니, 어디로 여행을 가는게 현대적이라느니, 사는 곳도 이 지역에서 살아야 폼이 난다, 맨션도 이런 세련된 곳이 좋다, 입는 옷은 이게, 차는 저게 좋다... 니런 것들이 다 정보잖아요? 다들 들떠서 정보를 좇기에 여념이 없어요. (...)"
사람들은 왜 그런 정보를 좇는 걸까. 거기에 뭔가가 있다고 믿고 따라가는 것이리라. 거기에서 뭔가를 보고 있으리라.
세네키 쇼코는 어린 시절부터 행복을 실감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옛날의 자신도 지금의 자신도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늘 조바심을 냈던 것이다. (...) 그것은 누구나가 마음속 깊이 숨기고 있는 소원이자 살아가는 원동력이며, 한 사람의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세키네 쇼코는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방법을 선택했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는 대신, 그런 모습을 찾아낸 듯한 착각을 일으켜주는 거울을 사버린 것이다.
'뭔가'를 보고 '뭔가'를 좇는다. 자신의 원하는 '본연의 것' ,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는 대신, '착각'을 일으켜주는 거울을 사서 주변을 채운다.
<화차>에는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가해자'와 '피해자'와 '희생자'를 보는 시선이 진하게 묻어난다.
외롭고, 불행하기에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다른 것'을 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뭔가'라는 사실이 인간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함께, 세상의 수많은 세네키 쇼코를 불행하게 만든다.
왜 외로울까? 뱀은 뱀인데, 왜 다리를 원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