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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책을 읽는 내내,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걸까. 생각했더랬다. 마지막 장을 덮고, 옮긴이의 후기에 나오키상 심사위원이었던 이노우에 히사시의 평이 옮겨져 있다. "삶과 죽음과 사랑이라는 인간의 삼대 난문을 정면에서 도전했다." 라고.
애도하는 사람으로 불리우는 한 남자가 있다. 주간지나 신문, 라디오에서 사망 기사를 보고, 죽은 장소에 가서 '애도'를 하는 사람이다.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어떤 일로 감사 받았습니까' 이 세가지 질문이 애도하는 사람, 시즈토가 애도하기 위해 주변의 사람들에게 묻고 다니는 질문이고, 애도여행을 하며 느낀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습니까
어떤 일로 감사받았습니까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위의 세가지를 찾아 '기억'하는 것이 시즈토의 '애도'이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ㅇㅇ을 사랑했고, ㅇㅇ에게 사랑받았으며, ㅇㅇ가 ㅇㅇ로 당신에게 감사헸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았다는 것일 기억하겠습니다.' 예의 그 동작. 오른손을 위로 올렸다가 가슴으로 내리고, 왼손을 땅으로 내렸다가 가슴으로 모으는.
불쾌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텐도 아라타의 잘 꾸민 이야기 속의 그 남자가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 그렇게 '죽음'을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보통의 반응은 '왠 미친놈' 정도일 것이다. 그것이 정상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왜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고, 왜 하늘에는 해가 뜨고, 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두가 제할일을 하는지' '왜 그사람은 죽어서 잊혀지는지' 를 원망하는 사람에게라면, 그가 누구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자체로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방어기제로 묻어 놓았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편안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시즈토를 이해시키기 위해 직접적인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동생인 미시오의 결혼이 수상한 오빠 때문에 깨지게 되었을 때 어머니인 준코의 입을 통해, 가족 역시 제대로 이해 못하지만, 이런이런 계기. 시즈토의 어린시절부터 그가 겪어온 죽음들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 그리고, 영혼인 사쿠야를 통해서, 주간지 기자인 마키노를 통해서, 그러나, 시즈토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러고 있는지 잘 모르고, '죽음', '잊혀지는 죽음' 에 대한 강박으로 죽은 자리를 찾아다니며 애도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 걸. 질문하는 사람도, 답변하는 사람도 납득하고 편하게 받아들였던 그 답변, 병에 걸려서, 어디가 아파서, 그러니깐 머리가 좀 이상해서가 정답일지도 모른다.
텐도 아라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쓰는 작가다. 그가 쓰는 가족 이야기는 보통은 <애도하는 사람>과 같은 '소설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따뜻하고, 사랑 가득하고, 이해심 넘치는 가족보다는 반대 의미에서 소설에 나올법한 깨어지고, 부서진 가족인 경우. 특히 아동학대에 관한 부분이 많았다. 뒷맛 찜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뽀샤시효과를 준 이 아름다운 가족 이야기도 그리 뒷맛이 좋지만은 않다. 아름답게 포장된 이야기를 걷어내고 나면, 뭐, 그 아름답게 포장된 이야기가 소설이고, 그것을 걷어내는 것이 소설을 안 즐기기 위해 어거지 놓는거라고 해도 할 수 없지만, 아들로서의 시즈토, 생면부지의 낯선 남자로서의 그, 연인으로서의 시즈토,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자조적으로 말하는 '늘 한발 늦은 남자' 라는 것은 좋지 않다. 좋지 않아.
작가의 한마디를 보니 '제가 칠 년에 걸쳐 쓴 이 작품은 지금 이 세상에 꼭 있었으면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재미있고, 때로는 감동적이고, 대부분은 담담하게 '애도하는 사람'에 대해 독자에게 느끼게 하려 하고 있다.
(유키요와 사쿠야의 이야기는 좀 무리였다고 생각되지만)
혹은 저자는 '애도하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더 많이 있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 많은 죽음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 공무원이 순직했다고 하고, 지금도 40여명의 군인들이 컴컴한 바다속 배 안에 갇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있고, 그들을 구하려던 해병이 죽기도 했다. 모두가 좋아했던 여배우의 자살 이후, 그 동생이 자살 소식이 들려와서, 우울해 하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죽음도 있고, 개죽음으로 보이는 죽음도 있다. 그 하나하나의 죽음은 가족과 친구와 지인들에게 엄청난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뉴스'이고, '나쁜 정부의 증거'이고, '나쁜 미디어의 증거' 이다. '안 됐다' 는 마음이 '애도'와 얼마나 닿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하는 일'과는 좀 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저자는 그 점이 싫었던 것 아닐까? 소설 속의 시즈토처럼. 너무나 많은 죽음, 죽음에 무뎌지는 사람들이 갑갑했던 건 아닐까?
'애도하는 사람'은 책 속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 모두는 분명 삶의 한 부분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남겨 놓고 있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늘, 나쁜 뉴스를 듣게 될 것만 같아 마음이 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