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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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현은 어둠 속에서 슬쩍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인생이 고독할 거라고 했던가, 모든 것이 마구 흘러가버릴 거라고, 아무것도 곁에 머무는 것이 없을 거라고 했던가... 그러나 알고보면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없고, 다시 돌아나가지도 못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으로 살 수 있을 뿐이다. 
 

누경, 서강주, 기현, 그리고 마지막에 인서까지. 

한 명의 여자 누경과 세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오래간만에 읽는 전경린의 글은 낯설고 와닿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꽤 별로라고 생각했던 <나비>보다 더 안 와닿는데..
그건 아마 내가 변해서일꺼다. 내가 나이 먹어서일꺼다. 전경린이 이야기하는 유리가 부서지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이 부서지는 사랑의 아픔같은 거 알게 뭐냐. 하는 둔치에 회의주의자에 현실주의자에 게으르기까지 해서.  

그 와중에 와닿는건 기현. 앞에, 뒤에 잠깐 나오는 왠지 불쌍한 캐릭터인데, 그러게, 사랑 따위 하지 말지 그랬냐. 그게 맘대로 되지 않는거긴 하지. 손금이 고독할 팔자라는데, 안 걸려도 좋은 병도 있는 법이라구.  

누경의 서강주 사랑은 참 그렇다. 서강주가 매력적이라는건 알겠다. 너무 매력적이어서 도저히 끊을 수 없이 중독되었다는거. 유부남 친척오빠와의 사랑의 끝은 너무나 분명하고, 지레 겁먹고, 아니, 겁먹고, 도망치고, 무너지는게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너지나, 저렇게 무너지나. 그런 사랑이라면 해 보지 그랬니. 몸은 없고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부인, 살아내야 하는 삶.으로 여겨지는건 행복한가? 행복할지도. 그렇게 사람은 다 다른거니깐.  

그래도 그 사랑이 너무 병신같고, 병신같이 끝나고, 새로운 사랑이 또 그렇게 찾아오는건 너무 소설같잖아.  

기현은.. 남자로 안 보이면 할 수 없지. 남자로 마음이 안 생기는데,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거거든.
얼마전에 읽은 산도라 마라이 아저씨의 <결혼의 변화>에서 보니,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 받는 것이 더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난 그 전까지 되돌려 받지 못하는 사랑만이 괴로운 건줄 알았거든. 그러고보면, 너가 좋아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나는 좋아하니깐, 어쩔 수 없어. 라며 사랑을 주는 건 얼마나 교만하고 이기적인지. 심지어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희생자처럼 보이기까지 하니깐.  

냉장고 청소가 취미에요. 주말에 깨끗이 냉장고를 치워두고 정돈된 냉장고 안을 보면 모든 일이 잘 돌아갈 것만 같아요. 요리 하는 것도,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도. 그러면서 일상과 마음을 달랜다고 하는 기현. 어이구, 나랑 살자.   

사랑을 앓는 사람은 결코 사랑으로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뜨겁다가도, 어느 순간 어리둥절할정도로 짜게 식어 버려서 위화감이 드는 거라고들 하지만, 마음이 다쳐서 몸이 상하면, 마음은 식더라도 몸은 기억하지 않겠어? 그런 사랑을 징검다리처럼 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랑이 장난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고, 그건 병이야. 회복되더라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욱을 남기는 병.  

너, 누경이, 행복해지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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