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중. 이라는 카테고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책읽는중'이라는 카테고리는 말그대로 '책읽는 중' 에 쓰는 책이야기이다. 읽다가 생각나는 잡다한 것들을 적어 놓는 카테고리인데, 간혹 다 읽은 리뷰 쓰기 전의 책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읽는 중의 소회를 적곤 한다. 리뷰에는 적지 않을 디테일한 글들을 적기에도 좋다.
그 소회는 '서점에서 후루룩 보는 책의 표지와 실물 만듦새'와 '리뷰' 사이에 머무른다.
처음 좋았던 것이 끝까지 가지 않는 경우도 있고, 드물게는 영 맘에 들지 않았다가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좋은 경우도 있다.
혹평이건, 호평이건 끝까지 다 읽고 하자. 혹평이나 호평의 이유를 대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책읽는중'은 말그대로 읽는 중의 수다다. 별점도 없고, 강추도 비추의 결정도 내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 카테고리의 글을 퍼가서 '제대로 읽지도 않고 리뷰' 라고 깐다거나 ( 이 정도의 게으름은 봐주겠지만) 이 카테고리의 글을 '리뷰'로 칭하며, 그것에 대해 까는 것은 사양한다는 이야기다. 뭐, 읽는 사람이 카테고리 이름까지 봐주어야할 의무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이야기 해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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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 교수의 책을 아직 읽어 본 적은 없지만, 왠지 먹음직스러운 <대항해시대>를 로망과도 같이 보관함에 고이 넣어두고 있었는데, 평들도 좋고. 처음 읽는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는 첫 챕터부터 꽤 삐걱거리고 있다.
일단 가격대비 책의 얇팍함이 맘에 들지 않았었다. 13,800원에 200페이지대. 얘가 또 책값드립하는거냐. 싶겠지만, 그렇다기 보다도, 이 정도 주제가 이정도 페이지에 이정도 가격이라는게 맘에 들지 않는다는거다.
표지도 어수선하니 맘에 들지 않았다. 이미지보다 실물이 확 촌시럽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보니, 표지는 좀 괜찮아 보이려고 한다.
종이질도 과하게 좋다. 문학으로 역사를 읽고, 역사로 문학을 읽는다는 역사교수로 역사학의 관점에서 문학 이야기인데, 종이질이 거의 움베르트 에코의 '미의 역사' 수준이다. 그럴 필요 없이 과한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이 가격에 반영된다면 더욱 더.
이 책에 도판도 의외로 많다. 거의 매 장 있는데, (이 주제에, 이 가격에, 이 두께에, 도판까지 많으니 읽을 글이 그닥 많지 않을 것임은 쉽게 짐작 가능) 근데, 그 도판들도 맘에 안 든다. 굳이 이 도판들이 필요한가 싶다. 포커스가 없이 산만한 책의 '본보기'를 보는 것 같다. 주제로 봐서는 '글'에 포커스가 맞아야 할 것 같은데, 쓸데없이 도판도 많다.
가장 화려한 페이지는 각 챕터의 제목이 있는 페이지다. 이거 이렇게 화려하게 풀페이지로 찍을 필요 있었나? 어수선하고, 돈도 더 많이 드는거 아님?
그러니깐, 전체적으로 맘에 안 드는데, 가격까지 높으니 가격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맘에 안 드는 만듦새는 '글' 만 좋다면, 일단 무시하도록 노력해 볼 수는 있다. 근데, 첫 챕터 읽었는데, 어쩌나, 글도 영 ..
'현명한 노예가 살아가는 방법' 이란 제목의 챕터다. 이솝우화를 부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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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같은 곳에는 이런 부채 노예를 외부지역에 팔아 영구히 노예로 전락시키기도 했지만, 솔론이라는 정치가가 이와 같은 부채 노예를 금지하는 개혁을 실시하여 이를 없애 버렸다. 기원전 500년경부터는 문자 그대로 주인이 노예의 생사를 좌우하는 가혹한 노예제가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졌다. 고대 그리스의 탁월한 문화적 성과들을 단순히 문화적 황금기의 산물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빚어낸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 중략...) 이솝은 아폴론의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 시민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신앙심이 끓어 넘치는 그 고장 사람들에게 괜히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맞아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공상을 해 본다. 그렇게 현명한 말을 잘하던 이솝이 정작 자신이 설파한 교훈대로 살지 못한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정녕 지혜롭게 한세상 사는 것이 어렵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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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론이라는 정치가가
역사교수라는 사람이 '솔론이라는 정치가가' 와 같은 어휘를 구사하는 것은 영 믿음직하지 못하다.
'문자 그대로 주인이 노예의 생사를 좌우하는 가혹한 노예제가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졌다' 는건 알겠는데, 그게 왜 뜬금없이 '고대 그리스의 탁월한 문화적 성과'가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빚어낸 결과' 로 이어지는지, 앞 뒤로 전혀 그에 대한 이유가 없다. 벙-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어서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맞아 죽은 것은 아닐까' '공상을 해 본' 게 다면서, 왜 바로 그 다음 문장에서 '정작 자신이 설파한 교훈대로 살지 못한 것을 보면'으로 결론이 내려진걸까? '참혹하게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자신이 설파한 교훈대로 살지 못'한 것.으로 자동결론 내려지는 거임?
마지막을 교훈조로 맺는 것도 너무 뻔해서 지루하다. 마지막 문장에 엄청 신경쓰고, 미문을 쓰는 유재원 교수가 문득 떠오르네.
무튼, 이다음에 어떤 글들이 나와 맘이 팩 돌아선 독자를 조금이라도 돌려세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기대는 안된다만)
맘에 안드네. 읽어보지도 않고, 좋은 저자라고 믿고 있었던지라 왠지 모를 배신감과 억울함까지 느껴지는 첫챕터다.
두번째 챕터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을 소재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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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의 부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딸을 죽인 데 대해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아가멤논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아이기스토스를 정부로 삼았다. 아이기스토스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부녀간 근친상간으로 태어났고, 양아버지이자 큰아버지인 아트레우스를 죽인 데다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시아버지를 죽인 인물이다. 이런 문제 많은 사람과 딴살림을 차리고 결국 그와 합세하여 자기 남편을 죽이게 되니, 그녀는 '악녀' 소리를 들을 자격을 고루 갖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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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상간으로 태어나 양아버지이자 큰아버지를 죽인 아이기스토스는 '문제 많은 사람'이고,
딸을 죽인 남편을 죽이고, '문제 많은 사람'과 딴살림 차린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악녀 소리 들을 자격 고루 갖추'었다고?
꼬투리 잡는 것 같지만, 이런 식의 관점이라면, 난 이 저자 좋아하기 힘들 것 같다.
아가멤논 챕터의 결론은
제목은 아가멤논이지만, 주인공은 클리타임네스트고, 사랑을 증오로 바꾸어 버린 주인공은 동시에 국가의 민주 질서를 압살한 국적이어서 '그리스 비극은 인간이 내적으로 부딪히는 근본 문제에 대한 심원한 성찰을 담고 있는 동시에, 고대 그리스 세계가 역사적으로 발전시켜 온 정치 질서를 시민들에게 교육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고 역사와 연결짓고 있다.
내가 <아가멤논>을 아직 읽지 못해서 그런가, 뜬금없고, 미심쩍은 결론이었는데, 나의 미천한 독서를 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런류의 책을 쓸 때는 짧은 챕터라도, 독자가 그 연결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거 아닐까?
검색하다 보니, '그리스 막장 드라마로 시민 교육? ' 이라는 수준 높은 제목의 기사도 있다.
* 덧붙임
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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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말로 끝난다면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두고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비극의 의미를 명백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 비극은 이야기가 슬프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탁월한 인간이 겪는 고통과 불행이라는 요인이 핵심이다. 김동인의 소설 [감자]에 묘사된 복녀처럼 비참한 삶을 사는 보통의 인간은 자연주의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는 있지만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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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쌩뚱맞은 복녀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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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고통을 피해 가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겪어 나간다.' 이들이 장대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동정과 두려움, 그리고 그 때문에 정화되고 맑아진 감동의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은 위대한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 인생의 본질에 대해, 신이 주관하는 이 세계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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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이야기인데, 이런 문장들에서 '문장늘리기'의 혐의를 발견하는건 나뿐인건지. 이 후로도 최상급, 클리쉐, 부사의 남발로 무척 피곤한 읽기가 계속된다.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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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으로부터 <춘향전>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사랑 이야기가 많기도 하지만, 사랑의 극진함으로 따지자면 <트리스탄과 이즈>를 따를 작품이 없다. 이 이야기를 우리말로 옮긴 이형식 선생은 이를 두고 "곡진하고 자상한 심정이 엮어 낸 한 편의 긴 노래"요 "간절하고 고요하며, 뜨겁되 악착스럽지 않은 노래"라고 평했지만, 나는 "살짝 징그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치명적인 사랑의 이야기"라고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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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과 '곡진'은 라임도 아닌 것이, 반복도 아닌 것이.
'~ 따를 작품이 없다' 와 같은 최상급 남발.
살짝이고, 약간이고, 아주 쬐끔이고, '징그럽다' 는 표현을 쓴 로맨스를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길 바라는건지.
트리스탄과 이즈 이야기에서 트리스탄이 이즈의 침실로 가서 밤마다 밀회를 즐기고, 이를 마크 왕(이즈의 남편)이 알게 된다.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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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현장에서 간통을 들켰으므로 트리스탄으로서도 아무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이때 트리스탄은 오늘날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주장을 편다. 그는 맹세코 왕비에게 '범죄적' 연정을 품은 적이 없으며, 이 사실을 결투를 통해 밝히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즈와 사랑을 나눈 것은 오직 사랑의 묘약을 잘못 먹은 때문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어떻게 누군가와 결투를 해서 자신의 결백함을 밝힌다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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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가 '오늘날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과 같은 단어를 고전문학에 사용하는 것은 '나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유연하지 못하고, 저자가 이렇게 고전과 문학작품, 뒤로 가면 과학작품까지, '오늘날의 사고로' 혹은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논리적으로 이상한 일뿐이다.' 혹은 '아무리 과학소설이라지만' 과 같은 추임새를 넣는 것은 이 책에서 가장 맘에 안 드는 부분이다. 게다가 그것을 '힘센자가 곧 정의'라는 '원시적인 도덕률' 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니깐 중세로맨스의 '결투'장면을 보면서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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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식의 중세적 재판은 '힘센 자가 곧 정의'라는 원시적인 도덕률로 보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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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지. 코끼리 덤보에서, 아무리 동화라지만, 어떻게 코끼리가 귀를 펄럭여서 하늘을 나나요. 하는거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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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들도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논리적으로 이상한 일뿐이다. 어느 날 마크 왕이 모루아 숲에 사냥을 하러 갔다가 우연히 잠자는 이 두 사람을 발견하는데, 이때 두 사람은 칼을 사이에 두고 잠들어 있다. 마크 왕은 두 사람이 그만큼 순결한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 같지만, 어쨌든 이 일을 계기로 트리스탄은 마크 왕과 화해를 하고 이즈를 되돌려 보내기로 한다. 문제는 궁정의 신하들이 이즈가 순결하지 않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사실 그들 말이 맞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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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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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작품 속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나 복종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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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쉐 남발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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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여성들의 비중이 매우 높고 또 여성의 지위가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어 때로는 기존 법률과 도덕에 대해 과감한 개혁을 요구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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깝깝한 '무엇보다도' '매우' '놀라울 정도로'
p88
신밧드의 모험 이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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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험 이야기들은 아마도 문학적 상상력의 최고봉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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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급남발
p106
주신구라 이야기에서 사무라이와 할복 이야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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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와 우리 문화가 워낙 달라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일본한테 식민 지배를 받아서일까.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죽음을 찬미하는 이들의 정신세계가 우리에게는 낯설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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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09
주신구라 이야기의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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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기사도가 호전적 전사들의 도덕률이었다가 명예를 중시하는 신사의 규범으로 발전했듯이, 일본의 무사도 역시 고약한 파시즘으로 귀결되지 않고 앞으로 건전한 방향으로 진화하면 좋겠다는 것이 한때 그들 때문에 불행한 일을 겪었던 이웃의 소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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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미워 죽겠어. 니토베 이나조라는 일본사람의 글을 인용하고 있지만, 인용부분과 주신구라 이야기. 내가 아는 얕은 사무라이와 할복과 일본인의 자살 등에 대한 지식에 비추어 그 글이 어떻게 '무사도가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 파시즘의 한 요소로 귀착되었을 가능성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건지 몇번을 읽어봐도 모르겠음.
<푸른수염>과 <하얀새> 에 나오는 주제 혹은 주장들
p111
푸른수염이 열쇠를 맞기고 그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 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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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다 알다시피, 옛날이야기에서 어떤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주인공이 그 금기를 지키는 일은 결코 없다. 작은 방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는 꼭 그 방에 들어가 보라는 강력한 유혹과 마찬가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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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장밖에 안 되는 챕터에 중간에 삽화도 있는데, 문장이 이런 식. '문장 늘리기'의 의혹이 아니라도 비경제적이거나 무의미함.
주장 1. 옛날 이야기에서 어떤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주인공이 그 금기를 지키는 일은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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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는 무엇보다도 주인공 여성의 호기심을 비난하며 그것이 비극을 가져온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호기심은 사람을 유혹하지만/ 심대한 후회를 불러오리라." 이것이 페로가 이야기의 끝에 스스로 정리해서 제시하는 교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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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2. 페로는 <푸른수염>을 그의 책에 수록하면서 여성에 대한 편견을 덧입혀 놓았다.
주장 3. 그림형제는 비극의 원인으로 여성의 호기심을 비난하지 않는다. 여성은 지적인 힘과 용기로 어려움을 이겨 내는 적극적인 주인공이다. 비난받을 사람은 사악한 마법사다.
주장 4. 같은 계열의 이야기라해도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른 내용과 메세지를 포함하고, 역사학자들은 이런 점에 착안해서 민담과 동화를 통해 민중들의 심성을 읽어내려고 했다.
주장 5.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술문화의 세계에 살았고, 문자를 남긴 사람은 엘리트이니, 엘리트의 각색에 이루어진 자료를 이용하는 것이니 옛날 서민들 이야기랑은 다를 수 있음.
주장 5. 민담과 동화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성과 사랑 결혼에 대한 태도를 잘 알 수 있다.
주장 6. 가장 널리 퍼져 있고 또 현대에 들어 특히 큰 인기를 얻은 것은 <미녀와 야수>계열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이다.
그렇게 삼천포에서 잠깐 헤매다가 결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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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수염>은 "참혹했던 날들의 기억은 잊혀졌습니다."라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베트남 출신 신부 살해 사건을 담당한 어느 판사가 말한 것처럼, 무슨 물건 수입하듯 이웃 나라 젊은 처녀들을 돈 주고 데려와서 학대하고 심지어 술 취한 남편이 그녀들을 때려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는 것을 보면 부끄럽게도 어떤 곳에서는 이 이야기가 아직 현재진행형인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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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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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국의 낯선 섬에 묻힌 금은보화를 찾아 나서는 모험 이야기인 <보물섬>은 마땅히 인간의 탐욕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좋은 텍스트가 된다. 재화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결국 파멸을 불러오고, 특히나 사악한 해적 집단은 목숨을 잃거나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정리하자면 작가의 주장에 모순이 생긴다. 재화에 대한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은 해적만이 아니라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도 해당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작가는 사악한 해적들의 탐욕은 비난하면서 선한 주인공 일행이 보물을 구하는 것은 용감하고도 의로운 행위로 칭송하고 있다. 사실 원론적으로 보면 해적들이나 주인공이나 모두 로또와도 같은 보물찾기에 목숨 걸고 달려든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모험심 강한 영특한 소년과 해적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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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용말고 어른용을 읽으세요. 라고 말하고 싶다. 공평하게 하기 위해 덧붙이면, 이 바로 뒤에 '양편을 가르는 결정적 기준은 '국가'이다.' 라고 이야기하며 국가편에 스면 해군이나 사업가고 국가 명령 위반하면 해적. 이야기가 나온다.
p194
타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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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중문화는 늘 세상을 구하는 초인적인 영웅들을 그리곤 한다. 그런 흐름이 약간 '오버'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베트맨, 스파이더맨, 또는 원더우먼 같은 난감한 캐릭터들이 나온다. 그에 비하면 타잔은 약과다. 지성, 야성, 개성이 함께 어우러져 빛나는 인물, 단순무식한 '몸짱'인 듯하면서도 고귀한 도덕적 품성을 간직한 야생의 사나이 정도로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급기야 그는 서양 문명의 핵심 요소들을 모두 모아 놓은 고대 전사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인용생략)
이 소설이 폭발적 인기를 누린 데에는 이런 잡스러운 요소들이 절묘하게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에게는 '전형성'을 제시하는 것만큼 잘 먹혀드는 것이 없다. 좋은 편과 나쁜 편을 딱 잘라서 가르고 그 둘이 싸워서 좋은 편이 이기게 만들면 통쾌한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다. 요즘은 지켜보는 눈이 하도 많아서, 이처럼 제국주의적, 인종주의적 표현이 걸러지지 않고 드러나거나 노골적으로 남성우월주의를 찬미하는 작품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타잔은 지난 20세기 문화의 부정적 요소들을 다 모아 놓은 텍스트 같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었다. 원래 불량식품이 맛있는 법. (중략) 모든 게 다 받아들이기 나름인지라 제인 구달처럼 이 소설을 보고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꿈꾸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전반적으로는 흑인들을 업신여겨 낮추고 백인 남서으이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세계에 전파한 역기능이 너무 크지 않았나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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