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슨의 미궁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요즘 긴 소설을 많이 읽어서인지, 페이지수와 상관없이(작은 판형에 널널한 자/행간) 좀 긴 중편의 느낌이다. 뒤로 갈수록 있는대로 몰아치기에 후다닥 읽어버려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중반부까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모험도감>이나 '디스커버리채널'을 떠올리며 읽었다. 아홉명의 서로 모르는 사람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에서 깨어나 서바이벌 게임을 하며 죽고 죽임을 당한다는 점에서 작년 이맘때의 <이노센트밀>을 떠올리게도 하고, 자연 속에 고립된 곳에서 공격을 받으며 쫓고 쫓긴다는 점에서는 <폐허>를 떠올리게도 한다. 소시오패쓰, 식인귀의 등장은 <신세계에서>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고.  

여러가지 작품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휙휙 지나가는걸 보면, 역시나 기시 유스케의 이번 작품도 (초기작이긴 하지만) 어디서 많이 보던.. 그런 포맷이다. (그래도 '모험도감'을 떠올린건 좀 심했;)  

크림슨의 미궁은 정체모를 주최측이 게임의 일환으로 지구 어느 곳, 일본이 아닌 곳, 기이한 풍경이 지구가 아닌 것 같은, 작품 속에서 '화성'을 의미하는 그 곳에 모아 놓고, 게임기를 하나씩 주며 아이템을 하나씩 얻으며 '게임'속의 캐릭터처럼 움직이도록 한다.   

처음 그들이 모두 모여 게임기의 메세지를 확인하고 1차로 정보를 모을 때 실업자인 후지키와 에로만화가인 아이가 파트너가 되고, 나머지들도 각각 파트너를 찾아 식량을 얻는 남쪽, 정보를 얻는 북쪽, 호신무기를 얻는 서쪽, 서바이벌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동쪽으로 나누어 각각의 아이템을 받아오기로 한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린 '식량' 을 얻는 남쪽에서 후지키와 아이는 아이의 제안에 따라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정보'를 얻는 북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첫번째의 선택이 그들 모두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중반부까지는 가볍게 술술 넘기며, 무인도, 사막과 다름없는 그 곳에서 그들이 어떻게 불을 피우고, 먹을 것을 구하고, 방향을 찾는 등의 자잘한 이야기들을 읽다가, 중반부의 어느 시점에 식인귀가 나타나면서 텐션지수가 확 올라간다. 과연 기시 유스케,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포인트를 초기부터 잘 꿰고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이라는 말은 너무 진부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이 역시 인간이다.  

결말은 모호하고, 그닥 새롭지 않고, 뜬금없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중반부터 막 가슴 콩닥거리며 읽다가 카타르시스 없이 그냥 무서운 상태로 끝나버린 느낌.

글을 '너무' 잘 써서 역겹게 느껴지고, 다시 들춰보기도 싫은 작가들이 있다. 기리노 나쓰오의 몇몇 캐릭터와 에도가와 란포의 몇몇 단편들이 내게는 그렇다. 기시 유스케는 적어도 내게는 그 역겨움과 공포 사이의 줄다리기를 아주 팽팽하게 유지하여 유일하게 좋아하는 공포작가로 남아있다.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도 책을 읽다보면 실망하는 작품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작가의 책은 적어도 지금까지 번역된 책들은 완벽의 정도, 공포의 정도는 제각각일지라도 언제나 무서운 뭔가를 남겨두고, 나의 공포더듬이를 마구 떨게 만든달까.  세련되고 미묘한 공포를 구사하는 작가다.  

야외에서의 서바이벌이란 주제는 그닥 흥미롭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기시 유스케.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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