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음모 1
데이비드 리스 지음, 서현정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 이것이 내가 자네한테 경고했던 사악한 짓일세. 우리가 상대해야 할 진짜 적은 종이돈에, 채권에, 주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이야. 종이 위에서 범죄가 저질러지고, 종이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피해자뿐이야."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에 이어 두번째로 읽는 데이빗 리스의 작품이다. 커피상인에서의 소재가 선물, 풋옵션 등이 복잡하게 얽힌 추리소설에 그닥 등장하지 않는 금융소재였는데, 데이빗 리스의 데뷔작이자, 에드거 알랜 포우상 수상작인 <종이의 음모Conspiracy of Paper> 역시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던 영국 최초의 주식시장 붕괴를 소재로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남해회사의 주식시장 버블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 나오는 주식거래, 국채, 복권의 개념은 모두 당시에 신개념이었고, 데이빗 리스는 은화에서 '종이'로의 가치전환이 막 이루어지는 시기의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광기를 작품 속에 잘 녹여 내고 있다. 

주인공인  벤자민 위버는 유대인이고, '유다의 사자'로 알려진 유명한 권투선수 출신이기도 하다. 엄격한 유대인 집안에서 검은양이었던 그는 집을 나온 후 이런저런 '밝히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다가 자신의 신체적 특기를 살려 도둑잡이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도둑잡이마저 사기꾼이자 거리의 좀도둑, 매춘부, 배우들의 왕인 조나단 와일드의 등장으로 위태로운 지경에 벨포라는 사내로부터 의뢰를 받게 된다. 벨포의 아버지는 자살로 죽었고, 위버의 아버지는 마차사고로 비슷한 시기에 죽었는데, 그 두 죽음이 실은 연결되어 있고, 살인이라는 것이다. 위버는 이 조사와 함께, 준남작인 오웬경의 '연애편지' 를 찾는 일을 해결하는데, 그 과정에서 당시 금융시장의 가장 큰 두 축인 잉글랜드 은행과 남해회사 사이에 끼게 된다. 두 커다란 금융회사의 거물들 자신의 아버지를 원수처럼 여겼던 블로스웨이스트와 영 꺼림찍한 남해회사의 에이들먼의 사이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종이의 음모'를 밝혀 나간다. 소재가 지루하다고 이야기까지 지루한 것은 결코 아니다. 벤자민 위버의 유대인 신분은 당시 시대의 갈등의 도화선과도 같았으며, 벤자민 위버는 유대인 사회의 이단아여서, 자신의 과거와 밀접하게 연관된 지하세계를 이용하여 밥벌이를 한다. 그의 경쟁자격인 조나산 와일드는 지하세계의 왕이고, 위버는 자신의 정직성과 자신은 미처 모르는 '사업의 재능' 을 이용해 자신을 차별화한다. 18세기 런던의 뒷골목에서 귀족들이 다니는 살롱까지 종횡무진하는 위버의 활약. 암코양이 같은 매춘부와 닳고 닳은 술집주인이 등장하고, 아름다운 과부와의 로맨스도 빠지지 않는다. 맞고, 때리고, 찌르고, 총질하며 쫓고 쫓기는 긴박한 장면들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에서도 그랬지만, 술술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위버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엘리아스로부터, 그리고, 당시 증권거래의 중심이었던 커피하우스에서 귀동냥을 해가며 주식거래, 국채 등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독자 역시 그 배움에 함께 한다. 금융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개념들이지만, 역시나 이 소설의 백미는 '처음으로' 종이쪼가리들이 가치를 가지게 되었을 때의 혼란과 두려움이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광기와 탐욕이 인물들을 통해 드러나는데, 각 인물들은 각각의 개성을 넘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지 구름 위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아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 주인공인 벤자민 위버부터가 일반적인 영웅 캐릭터와 거리가 멀다. 주인공은 물론이고, 조연 하나하나에도 숨을 불어 넣는 데이빗 리스의 솜씨에는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0년도 더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읽으면서 기시감을 느꼈던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시에 처음으로 등장한 각종 '가치 있는' 종이들로 인해 첫 버블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다면(이야기는 패닉에 빠지기 전 혼란기와 부흥기까지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금융위기 속에도 200여년전 소설 속에 나왔던 혼란과 두려움, 광기와 탐욕이 현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종이의 음모는 현재진행형이다.

*번역된 작품으로는 이 작품의 2탄격인 <부패의 풍경>이 남았는데, 제목만으로도 재밌을 것 같은 <whiskey rebels>나 <ethical assasin> 도 빨리 번역되길 바래본다.

** 베텔스만에서 두권으로 분권씩이나 해서 나오면서 원서 뒤에 있는 '리더스 가이드'를 실지 않은건 정말 창피한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