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환상문학전집 23
크리스타 볼프 지음, 김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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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신화를 알고계세요? 사실, 메데이아 혹은 메데아란 이름은 제게 낯설었답니다. 서양문화 2000년 최고의 악녀라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아르고호와 이아손의 황금양털을 구하기 위한 모험. 이라고 하면, 아, 하며 끄덕끄덕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아손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아손은 이올코스의 왕인 아이손의 아들인데, 어릴적 이복형제인 펠리아스에 의해 쫓겨나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 왕위를 되찾기 위해 가던 중 누추한 노파로 변장한 여신 헤라를 도아주기도 합니다. 이 때 한쪽 샌들을 잃어버립니다. '한쪽 샌들만 신은 아이손 가문의 남자가 자기를 파멸시킬 것' 이라는 신탁을 받았던 펠리아스는 이아손을 없애버리기 위해 계책을 꾸며 그에게 코르키스에 가서 황금 양모피를 가져오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조건을 세웁니다. 이아손은 아르고호라는 배에 그리스의 이름난 영웅들을 이끌고 코르키스에 도착하지만, 코르키스의 왕 아이에테스는 그에게 불을 내뿜는 황소로 밭을 갈고, 거기에 용의 엄니를 뽑아 뿌리면 그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 책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뒷 이야기는 이아손이 아이에테스의 딸이며 마녀인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황금 양모피를 가지고 귀국을 하고, 그 과정에서 아이에테스왕이 못 쫓아오도록 메데이아는 어린 동생을 죽여 살점을 바다에 뿌립니다. 이런저런 모험 끝에 귀국하게 되나 그 사이 펠리아스가 아이손을 죽였음을 알고,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힘을 빌려 펠리아스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코린트로 달아납니다. 세월이 흘러 이아손과 메데이아 사이에는 두 아들이 생겼고, 이아손은 코린트 국왕의 딸 글라우케와 결혼하여 코린트에서 권력을 잡고자 합니다. 격분한 메데이아는 왕과 신부, 그리고 두 아들까지 죽이고 멀리 달아납니다. 라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마녀'로 등장하는 메데이아는 신화속의 또다른 유명한 마녀 키르케처럼 유능한 치료사이고 마법사입니다.
이 책 속에서 키르케는 메데이아의 이모로 나오고, 아르고호가 귀국하는 사이 들러서, 고국을 등지고 새로운 곳을 찾아 도망가는 메데이아의 미래의 모습의 복선과도 같이 비참한 모습입니다.

언젠가 한 무리의 남자들을 돼지 떼처럼 섬에서 쫓아낸 적이 있었지. 그러면서 나는 그들이 티끌만큼이라도 스스로를 인식하도록 도와준 것이기를 내심 바랐단다. 메데이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느냐?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은 정말 사악해질게야. 서서히 사악해져서 종내는 바닷가에 홀로 서서 저주를 퍼부으며 아무도 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할 게다. 그들이 나한테 쏟아 부은 그 모든 사악함, 야비함, 비천함은 물처럼 쉽게 흘러 나가는 게 아니더구나.

이야기 속의 가장 큰 갈등은 현재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옛관습을 악용하고 시민을 선동하는 권력자와 자신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광포하게 구는 시민들과 메데이아, 코르키스의 강한 여인, 치유자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Medea, Stimmen>으로, <메데이아, 목소리들>로 번역됩니다  <...'악녀'를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은 이 책이 이야기하는 정반대를 가르키고 있어 찜찜합니다만, 원제의 '목소리들' 이 나타내듯 '목소리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메데이아-이아손-아가메다-메데이아-아카마스-글라우케-로이콘-메데이아-로이콘-메데이아' 각각의 목소리들은 일반 소설의 챕터역할을 하고, 챕터의 제목인 등장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책의 첫페이지에 이와 같은 방식을 '아크로니 :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사건들을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배열하는 이야기 방식. 비시간적 서술' 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어려워보이고, 처음 읽을때는 낯설지만,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점점 더 메데이아에 몰입하게 됩니다.

메데이아라는 소위 '악녀' 를 주인공으로 하는 책에 나오는 진짜 악녀로는 메데이아의 제자였던 아가메다가 있습니다. 메데이아를 증오하는 그녀는 ... 왜 그토록 메데이아를 증오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메데이아가 사랑을 덜 줘서? 메데이아에게 열등감을 느껴서? 라고 짐작하지만, 그 증오의 깊이가 너무나 깊습니다. 다시 정독해볼 일입니다. 아무튼, 그녀는 메데이아를 파멸로 이끄는 열쇠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예리한 지성을 지니고 있으며, 코르키스에서 온 사람 중에 유일하게 코린토스에 집요하게 적응한 여인입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로 듣는 그녀는 꽤나 정떨어지는 여자입니다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것만은 아닙니다. 굉장히 시니컬한 그녀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과 우리의 관심이 일치하기 때문에 자신과 우리를 경멸한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그걸 안다는 것을 아카마스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의 관계는 차츰 밑도 끝도 없는 것이 되어 가고, 그래서 정말이지 신명이 난다. 명쾌한 관계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메데이아와 아가메다 외에 이야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여인은 등장부분은 짧지만, 그만큼 강렬한 등장과 퇴장을 하는 코린토스 왕의 딸 글라우케입니다. 어릴적 경험한 일로 인해 트라우마가 있고, 심리적 불안감은 종종 발작으로 드러납니다. 깊은 내면 속에 묻어둔 '기억'은 약한 그녀의 몸과 마음을 억압합니다. 메데이아를 만나 한때 그녀를 억압하는 사슬이 느슨해지나, 운명은 그보다 더 강해, 그녀를 비극으로 몰고갑니다.

섬세한 영혼과 지성을 지닌 아가메다와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글라우케는 내내 메데이아를 증오하지만, 그 증오 아래에는 강렬한 애정과 경외와 질투와 시기가 있습니다.  극도로 복잡미묘한 그것은 남녀관계따위의 복잡함과는 비교도 안됩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에 한눈에 반하고, 이아손 역시 메데이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빠집니다.
이아손의 이야기는 이아손의 목소리로 들어도 별로 와닿지 않습니다. 우유부단하고,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는 원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그. 뭐, 어쨌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메데이아니깐요.

남은 주요 등장인물로는 아카마스와 로이콘, 그리고 왕들.이 있습니다.
왕들은 어째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나쁜 마법사에 홀린 상태의 로한의 왕과 같은 포스입니다. 권력이라는 마법에 홀린.   
아카마스와 로이콘은 둘 다 코린토스의 실세였으나, 아카마스는 권력지향으로 남았고, 로이콘은 권력의 뒷켠으로 물러났습니다. 아카마스는 아가메다와 관계를 맺고 메데이아를 제물로, 희생양으로 파멸로 몰고가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아카마스의 심리는 단순한 신화 속의 악당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매력적인 이유이지요.

로이콘은 이 모든 일을 지켜보는 사람입니다. 존재감은 희미하지만, 어쩌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이니 미워할 수 없습니다.

저기 나의 별자리들이 다시 튀어나온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 일들은 얼마나 증오스러운가. 전부 혐오스러울 뿐이다. 이제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내 말에 귀기울여 줄 사람도 없다. 외롭게 홀로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별들의 궤도를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좋든 싫든 끊임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영상들을 보고,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들을 들어야 한다. 예전에는 인간이 무엇을 감내하고 사는지 미처 몰랐다. 이제 여기 앉아서, 인류는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어 가며 목숨을 부지하고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능력, 이 진저리 나는 능력 덕분에 존속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혹시 예전에 이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구경꾼으로서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주 가까운 사람의 불행이 가슴을 찢어 놓지 않는 한, 결국 구경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입니다.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빼고 여기서 리뷰를 마칩니다. 메데이아의 목소리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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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7-03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스트 작가라는 별명이 안붙었으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봤을까요- 책 다 읽고 뒷편보니 불과 몇개월 전에 산 책인데, 2005년 초판이더라구요;;
이런 책이 ㅠㅠ 이렇게 묻혀버리다니!!!!
그래도 전 하이드님 덕에 정말 좋은 책 많이 읽습니다- 항상 고마운 마음^^;

마음이 정말 말 그대로 무겁네요. 책장 넘기기가 참 힘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