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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ㅣ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평점 :
뉴욕타임즈에서 소설가, 작가, 비평가 등의 전문가들이 꼽는 21세기 최고의 책 100 권을 매 주 업데이트했고, 15위에 '파친코'가 있었다. 이전에 읽다 말았던 책을 다시 끝까지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4대에 걸쳐 역동적인 현대사를 살아남은 가족의 이야기이다. 등장인물들이 다 인상적이다. 이 시대의 이야기들을 읽는 것은 그 배경때문인지, 더 분명하고 뚜렷한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다. 요즘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시대 반영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희미한 캐릭터들인 것과 비교된다.
페이스가 빠르면서도 강렬한 순간들이 인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활력이 강하고, 판단력이 있으며, 살아남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평은 이삭의 선자에 대한 평이지만, 같은 이유로 한수에게도 선자는 특별했다. 선자가 이삭과 함께 오사카에 가서 경희와 요셉을 만나게 되는 장면의 여운이 길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에서 각 등장인물들의 첫 만남들이 다 기억에 남는데, 한수와 선자의 첫 만남, 선자와 이삭의 첫 만남, 선자와 이삭과 경희와 요셉과의 첫 만남 등등 정말 힘든 상황에서 화합하고, 연대하는 것이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고, 그렇게 화합하고 연대할 수 있는 유전자가 오래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렸다. 전쟁은 이유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꽁꽁 뭉쳤다. 책에 나온 것과 같은 끈끈한 관계들은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게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 부분들이 갑갑했다. 특히 요셉. 강인하고 영민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요셉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경희, 이삭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선자. 선자와 가족들을 살린 한수에게만 자신이 받을 것과 받지 않을 것을 선택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선자가 한수의 도움을 끝까지 받지 않은 것은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이삭과 요셉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 여자의 한계인 것 같아서 갑갑했다. 가부장제가 없었다면, 선자와 경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도 겪어보지 못한 세상이라 알지 못하지만, 상상해보고 싶다.
"요셉은 희망에 차 있는 듯했다. 오사카에서 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다 나아지기 마련이었다. 가진 것이 돌멩이와 쓰디쓴 고난뿐이라도 얼마든지 맛있는 국을 끓여낼 수 있을 것이다." (171)
요셉이 좋아하는 동생 이삭을 만나고 희망차하는 이 장면의 이 말이 좋았는데, 역사를 알고, 소설을 알다보니, 맛있는 국을 끓여내지만, 시대가 밥상을 엎을텐데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역사소설을 읽는 묘미라고 생각한다.
"선자는 경희를 언니라고 불렀고, 둘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좋았다.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이 두터워졌다. 행복을 크게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던 두 여자에게 이런 우정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199)
선자와 경희의 관계가 읽는 내내 좋았다. 처음 김치를 팔러 나간 선자에게 경희는 "우리는 좋은 한패야" 라고 말한다.
그 부분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경희의 미모와 단아함은 책을 읽는 내내 언급되는데, 드라마 캐스팅 봤다가, 아니,책 속의 경희가 저기 있네 싶었다. 선자와 한수 캐스팅도 좋아보였고, 나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침 시즌2도 나왔으니 드라마도 보려고.
'파친코' 같은 책을 읽는 경험을 하고나면, 현실로 돌아와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좀 더 수월하게 느껴진다. 더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여지가 늘어난 기분이기도 하다. 지금 내 고민들이 사소해지고, 매 순간 감사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다음에 파친코를 읽을 때는 원서로 재독해보고 싶다. 또 다른 느낌이겠지. 원서 리뷰 쓰는 날을 기약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