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일의 보고서 문학동네 청소년 60
조우리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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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렌 산토스.' 

나무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밀크초콜릿 빛깔의 문에 손을 올렸을 때 무의식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이름이 수면 위로 둥실, 부표처럼 떠올랐다. 


그 문, 문 뒤로 사라진 마법사 헤렌 산토스. 문 뒤로 사라진 .. 


좋은 어른들이 많이 나오는 책은 왠지 가짜같다. 나쁜 어른들이 매일 뉴스에 나온다. 그것은 진짜. 좋은 어른들은 뉴스에 나오지 않으니 모르는걸까? 나쁜 어른들때문에 다치고, 아프고, 죽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매일 뉴스에서 보다보면, 그 주변에 있는 좋은 어른들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런 책들이 있는 걸까? 필요한 걸까? 


어른의 눈으로 아이가 주인공인 책을 읽지만, 어른들을 원망하게 된다. 왜 쿠키런에 홀딱 빠진 열 살 아이와 일곱 살 아이를 호텔 로비에 두고 해피 아워라고 술을 마시러 갔어요. 진짜 나쁜 부모들이었다면, 맘놓고 욕하겠는데, 평범하게 좋은 부모들이었다. 실종된 아이도 아이이고, 남은 아이도 아이인데, 남은 아이를 왜 유령으로 만들었어요. 불행이 닥쳤을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현수는 자신이 제대로 못 봐서 동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투명인간이 되는 것을, 불행해지는 것을, 모든 끼니에 소화불량에 걸리는 것을 택한다. 가족이라는 팀이 거대한 불행에 맞닥뜨려 산산조각이 났을 때, 어떻게든 부서진 조각들을 메우겠다고 있는 애를 다 쓰는데, 조각난 아이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고, 조각난채로 유령이 되어 휩쓸린다. 


그렇게 유령이 된 조각 아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벽만들기. 그 벽을 아랑곳않고 넘어오는 선의의 사람들이 조각을 메워준다. 근데, 그 선의의 사람들도 조각 사람들. 조각난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조각난 사람들. 사실, 사람들은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모르는 채, 부서진 조각들로 살아나가는 것. 


현수는 어릴적에 가족들과 해변으로 호텔에 갔다가 동생을 잃어버린다. 그랑블루 호텔의 해피 아워 시간에 엄마는 쿠키런에 빠져 있는 현수에게 동생 잘 보고 있으라며 아빠와 한 시간 반 정도 술을 마시러 간다. 오락을 하던 현수가 정신을 차리니 동생이 없어졌다. 책 속의 사람들도, 독자인 나도, 왜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술을 마시러 갔어. 부모를 비난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을 헤아릴 수 없지만, 참새 눈꼽만큼도 도움되지 않는 비난은 속으로 하고, 힘내라고 얘기해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 누군가는 '힘내'라는 말도 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그럼 뭘 할 수 있을까. 전국민의 마음에 트라우마로 남는 참사들을 겪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생각하게 된다.  


부모는 후회로 자신을 매일 죽이면서, 망가진다. 이유가 없어도 이유를 찾을텐데, 현수와 혜진의 부모에게는 가장 찾기 쉬운 이유가 본인들 앞에 놓여 있다. 그렇게 몇 년간 혜진이를 찾으며 몸도 마음도 관계들도 망가지는 중에 현수는 방치된다. 학교에서는 투명인간이 되기를 바라고, 학교 끝나면 돌봄센터로 가서 시간을 보낸다. 거기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난다. 센터장인 선생님은 서프라이즈 광팬이다. 같은 학교 다니는 최수민은 센터에도 오게 되는데,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할말만 하는 이상한 아이다. 센터에서 보고, 학교에서는 아는체 하지 말자고 말하고, 다음날 학교에 가니 현수의 자리에 앉아 있다. 수학 숙제 했냐고 묻는 수민이에게 현수는 아는 척 하지 말자니깐. 말하니, 싫다고 한다. 왜 싫은데? 물으니, 수민이는 "아는 사이니깐 아는 척하고 싶어." 라고 말한다. 구구절절 왜 싫은지 설명하니


 "그래서 수학 수제를 했어, 안 했어?"  

수민이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이쯤 되자 오늘 학교에서 분량 이상의 말을 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설득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교실로 털레털레 돌아와 수민이에게 수학 숙제를 넘겼다. 


서로 장래희망을 묻는 장면, 이 책이 진심으로 좋아지기 시작한 장면이다. 


"장래 희망이 뭐야?" 

"선생님." 대충 자기소개서에 썼던 직업을 말했다. 

"아니, 직업 말고." 자기는 직업을 물은 게 아니란다. 정말로 장래의 희망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한다. 

"장래 희망 하면 왜 꼭 직업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인생이 다 직업에만 달려 있는 것처럼." 

"넌 그럼 뭔데?" 

"나는 하얀 강아지 한 마리랑 갈색 강아지 한 마리랑 얼룩 강아지 한 마리랑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황당한 대답이었다. 할 말을 잃었다. 

"되게 어려운 거야. 반려동물을 네 말나 키우면서 경제적 상황도 좋아야 하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귀여우려면 매너나 마인드도 좋아야 해. 그리고 옷도 귀엽게 입어야 해. 손으로 뜬 스웨터 같은 거. 즉 손재주도 좋아야겠지. 평생을 바쳐 이뤄야 하는 장래 희망 아니냐고." 수민이는 다시 내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그런 식의 장래 희망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하자 지금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난 .... 전단지에 붙은 얼굴들을 주의 깊게 보는 어른이 되고 싶어. 혼자 걷는 아이에게 부모님은 어디 있냐고 묻는 어른이 되고 싶어. 슬픈 기사에 악플 대신 힘내라고 댓글 다는 어른이 되고 싶어." 


아이가 살아남기 위해 하는 일들이다. 누가 동생 혜진이를 잘 돌봐주고 있으면 좋겠다. 슬픈 기사의 슬픈 사람들에게 악플 달지 않고 힘내라고 댓글 다는 어른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좋은 어른들이 많이 나온다. 혜진이와 현수가 다녔던 어린이집의 원장선생님은 혜진이 사진이 있는지 묻는 현수에게 원에서는 개인정보 때문에 폐기했지만, 혜진이 친구 어머님들 통해 알아봐주마고 한다.  "혜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이제 너에 대해서도 기,도할거야." 라고 말한다. 현수는 동정하는 사람도 많고, 우는 사람도 많지만, 기도하는 건 조금 다른 차원의 접근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냉담자지만,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종종 든다. 기도의 마음. 


엄마가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아버지는 혜진이를 놓아주려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혜진이 찾기를 포기한대요. 전 혜진이 찾기를 시작했어요." 


슬픔만 가득한 바다에 홀로 떠있던 현수가 웃기는 짬뽕같은 수민이를 만나고, 서프라이즈 마니아에 좀 미친 것 같은 센터장 선생님을 만나고, 개를 만나고, 호텔 지배인을 만나고, 혜진이의 친구 빛나를 만나고, 혜진이가 실종된 날 아이를 잃은 여자를 만나며 바다에서 육지로 헤엄쳐 나오게 된다.   


그 과정의 이야기들이 얼토당토 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잠식되어 있으면서도 쪼개지지 않는 단단함들이 모여 앞으로 나아간다. 


개는 리드미컬하게 돌며 박자를 맞추듯 한 번씩 짖었다. 개가 짖는 걸 듣고 있자니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있던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소리도 냄새도 동네의 풍경도 어느새 평범한 오월 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P67

혼자일 때는 괜찮은데 마음이 슬픈 사람과 함께 있으면 체하게 된다고 말하자 의사는 신경정신과를 권했다. 의사는 심인성이라는 단어를 썼다. (..)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이 내게 전이되는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가 아픈 것인지 다른 누군가가 아픈 것인지 점점 더 경계는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몰래 토했고 몰래 소화제를 삼켰고 몰래 음식을 뱉었다. 당연하게도 내 몸은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 P77

나는 울지 않는다. 울지 못한다고 해야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울어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남들에게 동정만 살뿐이다. 울고 난 뒤의 이상스러운 개운함도 싫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도 싫다. ‘울고 나면 시원해져.‘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부류의 인간들도 싫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나만 감정적으로 시원해지고 나면 뭐 어쩌라는 건지. - P96

아버지가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방법은 순서가 틀렸다. 비일상이 끝나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다. 비일상의 상황에서 일상을 지속한다고 일상이 될 수는 없는 거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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