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런웨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6
윤고은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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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에 이어 두 번째로 읽는 윤고은의 책이다. 

와, 윤고은 글 정말 재미있게 잘 쓰는구나가 첫번째 감상


책소개에 'AS안심결혼보험' 에 얽힌 이야기라고 해서, 뭐여? 보험 이야기? 결혼 보험 이야기? 궁금했는데, '안심 결혼을 AS 하는 보험' 부분이 판타지였다. 아, 대놓고 판타지가 아니라, 그런 일이 상상에서나 가능할법해서 판타지다. 


"안나는 고요한 책들 사이로 걸어가는 걸 좋아했다. 키 높은 서가들이 담벼락처럼 이어진 도서관에서는 아무렇게나 걸어서는 안 됐다. 신발 밑창, 특히 뒷굽을 지면에 잠깐 접촉한다는 느낌으로 내려놓아야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포스트잇을 한장씩 바닥에 붙이는 것과 비슷하게. 안나는 자신의 걸음이 바닥에 오래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접촉에 대한 부담 없이 총총 걸었따." 


첫 문장부터 빨려들어가는 책이다. 읽으면서 기발하고, 반짝거리는 문장들에 반하게 된다. 

책에 나오는 연애 티키타카에 가슴 몽글거리게 된다. 


언젠가부터 'AS안심결혼보험'에 가입하기 어려워졌는데, AI가 1차로 엄격하게 고위험군을 걸러내고, 2차로 사람이 걸러낸다. 

그 보험에 가입한다는 자체가 어떤 자격을 주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은 보험사에서 요구하는 개인정보들을 착착 내밀면서 자신이 결혼에 적합하다는 증빙을 얻고 싶어한다. 


책인 줄 알고 도서관에서 빌린 벽돌책은 알고 보니 보험약관이었다. 이 보험약관이 중고로 백만원까지 거래되는 희귀본임을 알게 되고, 보험약관인데, 앞부분은 결혼에 대한 에세이처럼 읽히는 책이었다. 


보험금을 청구하는 사례들로 안심결혼을 보장하는 것, 차량보험이 운전자의 안전에 대한 교육과 매뉴얼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이 운전자와 차의 안전이 아닌, 결혼과 부부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매뉴얼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혼에 쓴 돈을 합리적으로 쓴 것임을 증명할 수 있으면, 300만원 까지 현금으로 100만원 이상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약관을 보고 K의 식구들은 영수증들을 긁어 모아 제출하지만, 돌려 받는 금액은 미미하다. 냉장고만 200만원인데, 사치품으로 분류된다. "예전에 쓰시던 냉장고도 용량이 비슷한데, 고장도 아닌데 굳이 왜 바꿨느냐 그거죠." 버려진 냉장고는 831리터 용량이고, 한 번도 고장난 적 없었던 제품. 소음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상범위였고, 꽃무늬 디자인이 구식이고, 새것도 800리터대 규모였고, 4도어라는 것만 달랐다. 디자인 때문에 멀쩡한 냉장고를 바꾸게 되었으니 합리적 소비가 아니어서 환급받을 수 없다는 결론. '반상기' 도 거절당하는데 "반상기는 '구시대적 발상'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신부가 부모님을 봉양하는 의미라고는 하지만 그게 과연 지속 가능한 결혼생활을 위한 합리적인 소비일지 의문입니다." 라고. 


보험사의 답변이 계몽적이기까지 한데, 그냥 들었으면 흘려듣거나 발끈했을 것 같은 이야기들도 '환금성' 으로 계산하여 돈을 돌려 받기 위한 이야기로 너무나 쉽게 스위치 되서 보험사 입장을 학습하게 된다. 


안나와 유리는 한 때 룸메이트였던 사이이고, 만났다 안 만났다 연락을 이어가는 관계이다. 

유리와의 줌으로의 연락을 마지막으로 안나가 잠적하고, 그런 안나를 걱정하여 안나와 북클럽을 하는 미정이 유리를 찾아온다. 


본격 코로나 시대 소설이고, 안나는 코로나로 사라지는 여행사에서 일했고, 유리는 코로나로 더 바빠진 보험사 직원이었다.


결혼과 보험, 여행과 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각관계가 나온다. 


코로나 시대, 사라지는 것들. 사랑을 하고, 사랑이 끝난 이후를 말하는 소설이다. 


삶이 좋아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게 아님을 알아. 먹구름에 가려 일몰을 볼 수 없는 날도 생기고, 애써 준비한 마음이 오해되고 버려지는 경우도 생기겠고, 삶의 타이밍이 늘 한 발 늦을 수 있고, 내 경우엔 미련도 품을 수 없을 만큼 열 발쯤 늦을 때가 많고, 시간 낭비 같은 산책도 많지.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일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세계가 훼손되고 내 속도가 흔들릴 때도 울지 않을 거라고 말할 자신은 없는데. 그렇지만 무언가를 누군가를 아주 좋아한 힘이라는 건 당시에도 강렬하지만 모든 게 끝난 후에도 만만치 않아. 잔열이. 그 온기가 힘들 때도 분명히 지지대가 될 거야.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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