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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평점 :
천선란의 단편집과 켄 리우의 단편집을 연달아 읽었더니, 머리가 좀 이상해진 기분이다.
천선란의 책부터 이야기해보면, 읽자마자 확 와닿는 작가는 아니었다. 작가의 말을 보고 나니, 작가가 자신의 감정들을 책에 담았다는 말을 보고나니, 좀 다르게 와닿았다. 작가의 말이 좋아서, 어딘가에 적어둔 글을 예전에 본 것 같다.
"나는 아이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이고, 내 10대는 무대 위의 아이돌과 함께 버무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정 시기를 추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그때 유행했던 아이돌의 노래와 춤이 있다. 어느새 나는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었고, 내가 선망했던 아이돌들은 은퇴를 했거나, 연기를 하거나, 혹은 세상에 없다. 한때 나의 영웅이었고, 내 시절이었던 그드른 왜 떠나야만 했을까. 인사 한 번 나눠보지 않았던 그들의 새벽이 서러워 덩달아 뒤척였던 새벽이 많았다. 어떤 말을 하고 싶다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해 한숨만 쉬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그 친구들과 또래라 힘들어 하는구나." 그 이야기를 들어쓸 때 딱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누구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일이구나. 또 하나는, 그렇다면 나는 이 감정을 잊지 말아야겠구나."
누군가에겐 아무 일도 아닌 일들에 대한 깊은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작가는 감정들을 박제하고, 기록했나보다.
'사막으로' 는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깝다고 한다. 거짓된 꿈이 척박한 현실보다 강하고, <너를 위해서>는 낙태죄 폐지를 외쳤던 2019년에 썼다고 한다. 이렇게 남기는 기록들 좋다. <래시>는 환경문제를 테마로 잡았다고 한다. 사실, 나는 어떤 이야기에서도 모성이 주된 테마가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떤 물질의 사랑>은 사랑 이야기인데, '국경도 없는 사랑'이야기인데, 다른 무엇보다도 햇빛이 드는 작고 한가한 독립서점에 작고 반짝이는 비늘이 떨어지는 장면이 맘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림자놀이' 같은 이야기가 켄 리우의 작품들하고 겹친다. 감정과 현실의 물질성을 거세당한 것 같은 그런 차갑고 매끈하고 이질적인 것들. 아무렴, 지금의 질척질척함 보다는 낫겠다만.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와 '마지막 드라이브'도 좋았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는 비무장지대에 등장한 싱크홀 비슷한 커다른 구멍에 대한 이야기인데, 지나고 나니, 계속 생각난다. '마지막 드라이브'는 센티멘탈한 분위기. 인간의 감정을 흉내낸 더미와 차에 흐르는 음악 같은 거.
이 작품집에서 가장 좋았더 건 '두하나'다.
왜 아니겠어. 남자가 좀비 같은 바이러스 전파자고, 여자들이 연대해서 맞서 싸우는 이야기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지.
" 차라리 지구상의 모든 생물학적 남자가 빠짐없이 전염됐다면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모든 남자를 구분 없이 죽이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지나는 언제나 연민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당장에 먹고살 돈이 없다며 그 무능력한 남자를 끌어안고 살았던 엄마도 연민이 문제였다. 그것을 여자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화낼 수 있는 대상은 언제나 서로가 전부였다. (..) 어쨌든 그 연민은 추가적인 희생을 동반했다. 전염의 속도가 달랐음을 알지 못하던 때였다. 자신의 남편, 애인, 아들, 아버지는 변하지 않았다고 울며 애원하는 여자들을 내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았다. 그녀들이 간절하게 붙잡고 있는 손을 차마 끊어낼 수 없었다. 대피소에 들어왔던 남자들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변했다. 그들의 첫 번째 희생자는 모두 그들을 대신해 울던 여자들이었다. 어쩌면 변하지 않은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적 이유를 뛰어넘은 숭고한 정신이 육체를 지켰을지도. 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경우를 다 따지기에는 위험변수가 너무 많았다. 대피소는 굳게 닫혔다. 긴 다리를 건너온 여자들에게만 열렸다. 생존자들은 그 다리를 '고독의 다리'라고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