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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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안녕, 주정뱅이> 이후 읽는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의 '봄 밤'이 내 안의 뭔가를 눌러 읽을 때마다 눈물이 철철 났더랬다. 

그렇다고 특별히 기대하고 읽은 건 아니었지만, 권여선의 글이 내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는 이 소설집을 읽고나니 좀 알 것 같다. 


지난해 내가 계속 생각했던, 의문 가졌던 것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단편적인 말들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 작가가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고, 문학평론가 백지은의 해설은 작가의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상황들을 모조리 선해하였으나,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고, 일단, 알겠다. 그 비참함과 옥죄인, 무거운 중력의 삶. 그 안에서 살아지는 인물들. 


"야근과 뒷정리를 마친 소희는 4A 주차장에서 마지막 통근버스를 기다린다. 밤이라 춥다. (..) 전철이나 통근버스에서 서서 갈 때 소희는 종종 돈 계산을 한다. 오늘 얼마를 썼는지. 이번달에 얼마를 쓰게 될지. 그러면 시간이 빨리 간다. 돈 계산을 하고 가계부를 쓸 때에만 소희는 살아 있는 것 같다. 뭔가 벅차오르다 금세 풀이 죽고 갑자기 조그증이 났다 울렁거렸다 종잡을 수 없는 흥분 상태에 사로잡힌다. 이번달 월급 백칠십만원을 받으면, 받으면..." 


'손톱'의 소희. 돈 들고 튄 엄마가 없었으면, 돈 들고 튄 언니가 없었으면, 좀 더 편했을텐데. 기대도 하지 말고, 인연 끊는 돈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시작하면 좋을텐데. 마음이 커서 좋은 점이 뭔지 모르겠다. 나쁜 점만 잔뜩이다. 약할 수록 더 그렇다. 


"오래전, 그게 언제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간에 어머니는 삶을 놓아버렸고 그 자리에 가끔 웅웅대며 울고 가래 때문에 그르렁거리는. 한쪽은 나무토막처럼 굳고 다른 쪽은 가시처럼 마른, 움직이지도 못하고 갑작스러운 경련만 일으킬 따름인 기저귀를 찬 작고 마른 생물체만 남았다." 


'너머'에 나오는 기간제 교사인 N 과 그녀의 엄마 


'손톱'과 '너머'를 읽으면, 가난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끊임없이 계산하게 만들고, 존엄과 생활을 저울대에 올려놓고,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자괴감을 남기고 마는 것. 


'친구'의 해옥과 아들인 민수를 보면, 긍정적인 성격이라는 것도 곧이 들리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 없이 자기합리화를 최대치로 밀어붙이는 것. 그걸 내가 알고, 긍정적인 것으로 포장할 수 없다. 


입술 뜯으며 찜찜한 기분으로 읽었지만, 마지막 단편인 '전갱이의 맛' 이 책을 사니 '전갱이'를 부록으로 줬던 '전갱이의 맛'은 참 좋았다. 말을 잘 하던 남자, 대학 강사가 성대 낭종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자기만의 말을 찾게 된 이야기. 남자는 1인칭 화자인 '나'의 오래 연애했고, 짧은 결혼생활을 하고, 이혼한 전남편이다. 


" 나만의 말은, 그가 힘주어 말했다.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기억되거나 발견되는 거야. 내가 어떤 언어를 간절히 원했던 순간을 기억하거나, 그 간절함이 생겨나는 순간을 발견해서 내 말로 삼는 거지. 그러니까 내 말들은 어원을 잃는 법이 없어. 최초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위에 다른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말 속에 삶이 깃드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내가 말할 때 '나'라는 화자도 중요하다는 것. 하지만, 역시 십년간 가장 친밀한 사이였던 파트너였어서 그 또한 통했을거라고 생각한다. '나 만의 말'이 통하는 사이. 말하는 내가 화자이자 듣는 청자라는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내가 평소에 말하면서 답을 찾고, 정리하는 것도 나라는 청자가 있어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경쾌한 한국 소설들을 많이 읽었어서, 오랜만의 이런 가난하고, 늙고, 병들고, 말을 잃은 사람들 이야기들이 좀 찐득찐득했다. 똑같이 가난을 이야기하더라도 말이다. 딱 이 정도까지가 내가 읽고 좋았다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들인 것 같다. 더 가면, 신파 같고, 혼자 비장한거 같고 싫을 것 같은데, 딱 여기까지는 읽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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