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마르는 시간 - 그럼에도 살아볼 만한 이유를 찾는 당신에게
이은정 지음 / 마음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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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예쁘고, 책도 귀엽고, 작가의 시골살이 에세이 정도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초반에 몇 번이나 그만 읽을까 싶은 부분이 있었지만, 다 읽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으니, 그냥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만 남았다. 싫은 부분이 있어도 좋은 부분도 있으면 이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물 표지가 온라인 이미지보다 예뻐서 택배박스를 열고, 책을 확인하는 순간, 아, 감탄이 나온다. 그 외의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은 처음 보는 신기한 우리말들이었다. 처음에는 오타인줄 알고 적어뒀는데, 그 후로도 계속 처음 듣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작가가 산골 마을의 자기의 방에서 보리국어사전 같은 걸 뒤적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소리 없이 이불 위로 몸을 뉘고 있었다. 모처럼 마음먹고 여름내 묵은 땀내를 지우려고 널어놓았더니 오늘따라 하늘이 심술궂은 만을보 같다. 여짓거릴 새도 없이 이불을 마구잡이로 끌어내려 집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 139-

건조대를 찾아 들고 창고를 나서는데 느닷없이 비가 와락 쏟아진다. 문을 열다 말고 다시 창고 안으로 몸을 피한 뒤 비가 머츰해질 때를 기다린다. "  - 140


책 초반에 이런 글이 있다. 


" 괜찮아요, 살아 있으니 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덕분에 꿈을 되찾았어요..." 

읽을 때는 그냥 넘어갔는데, 다 읽고 다시 돌아가보니, 숨이 콱 막힌다. 목졸라서 트라우마까지 남겨준 전남편한테 하는 이야기다. 죽으라고 목 졸랐는데, 안 죽고 살아 있으니 다 괜찮다고, 덕분에 다 버리고, 바다로 산으로 끈 떨어져 흘러 다니지만, 꿈을 찾아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고맙다고. 


진짜, 아이고, 아이고다. 이 책을 사게 만든 리뷰를 다시 봤다. 이 부분의 글이 나와 있다. 너무 늦은 남자. 

용서할 수 있냐고. 괜찮다고 얘기할 수 있냐고. 그 남자 너무 늦은 남자인데 계속 스토커처럼 편지 처써서 불쌍하냐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본인밖에 없는데, 그걸 보는 사람은 그게 맞다고 잘생각했다고 하면 안된다고. 그냥 폭력범죄자 놈편만 졸라 욕해야 한다고. 


아버지는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했는데, 그런 아버지가 안쓰러워질 수 있을까? 내 엄마한테 그랬는데? 난 엄마랑 애틋하고 그러지 않지만, 그런 이유로 아빠를 싫어한다. 절대 좋아할 수 없다. 내 엄마를 그렇게 취급했고, 그렇게 취급하고 있는데. 저자는 엄마도 아버지도 애틋하다. 전남편한테도 괜찮고, 고맙대. 모르겠다. 사람 마음도 상황도 다 다르고, 살려고 그러는건지, 그냥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쩌리.인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분노도 에너지가 필요하니깐. 도망쳤으면 됐어요. 잘했어요. 


제목인 '눈물이 마르는 시간' 이 좀 신파같지만, 그냥 제목 그대로다. 저자의 눈물이 마르는 시간. 세상의 폭력에 노출되어 왔는데, 울면서 그래도 살겠다고, 죽지 못하니깐. 살아야지. 그 끈을 놓지 않는 것이 강인해 보였다. 


" 산골 마을로 들어오기 전, 몇 년 동안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지낸 세월이 있었다. 친구도 가족도 다 외면한 채 개나 고양이를 향해 혼잣말했고, 나무와 바람에 살을 부비며 긴 하루를 견뎠다. 사람이 주는 상처보다 차라리 고독이 낫다고 생각했다. 맞서 싸우거나 버틸 만한 기력이 소진되었을 무렵, 나는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기어들고 싶었다. 산을 찾은 이유였다. 그러나 외롭고 긴 겨울밤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만큼 버티기 힘든 것이었다. 삶은 내 몸이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무거웠고, 나는 가벼워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인위적으로 덜어낼 수 있는 가장 일 순위가 사람이었다. 내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부터 피를 나눈 가족들까지 모든 인연을 끊어버렸다. 살마을 덜어내고 나니 허전하리만큼 가슴이 뚫렸다. 그러나 휑한 가슴은 내 무게를 조금도 줄여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다. 이틀을 굶고 죽을 먹다가, 또 이삼 일을 굶고 음식을 먹었다. 몸이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굶기를 반복하니 이명이 들리고 속이 쓰렸다. 기력도 의욕도 없어 잡념에 휘둘리기 예사였고, 오랜 세월 고치지 못했던 불면증이 극에 달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단식을 중단하고 밥을 먹었다. 얼굴에 생끼가 돌기 시작하고 팔다리에 힘이 올랐다. 문제는 배가 불러도 잡념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잡념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머릿속을 비우는 일에 몰입했다. 길게 산책을 하고 바른 자세로 명상을 했으며, 많은 것을 내려놓는 마음 수련을 해나갔다. 절에 가서 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백팔배를 반복했다. 조금씩 천천히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백팔배를 반복했다. 조금씩 천천히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묵은 원망과 증오가 사라졌고, 진행 중이던 미움이 퇴색되면서 하나둘 연민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법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사람과 악수하고 포옹하며 때론 웃고 가끔 우는 예전의 내가 되어 있었다. " 


근래 읽은 책들이 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앞으로 나가기 위해 지지 않고, 실패를 징검다리 삼고, 방법을 찾아내는 씩씩한 여자들 이야기였는데, 망가져 엉망진창일 때, 물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평범해지기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향상성은 늪바닥에서 끌어올려주기도 하고, 꿈을 좇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도 하는 거구나 깨달았다. 


이 책에서 진심으로 저자와 함께 기뻤던 것은 저자가 세무서에서 받은 편지 확인하는 에피소드, 왠지 울컥해서 눈물이 글썽해졌던 것은 마을에 맷돼지 등장했을 때. 왜 울컥했을까. 두번째 읽을 때도 울컥했는데, 왜 그랬을까. 혼자인 것 같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아, 눈물 나.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도시에서 시골 내려가 사는, 살려는 여자들이 듣는 시골괴담들 많은데, 시골생활 희망편 있다는 거. 요즘 본의 아니게 좀 모았다. 시골생활 희망편 1. 박문영 ' 3n의 세계' 2. 이은정 '눈물이 마르는 시간' 3. 나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내 모습을 마주쳤다. 작가에 대한 응원이자 나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다. 


ps. 작가님, 여자의 젖무덤, 미망인의 빨간 립스틱, 기생 비유 버려요. 한남문인 같다구요. 나 중간에 때려치고 싫어하는 마음만 남을뻔 했잖아요. 엄마 얼굴 사과, 알몸이 된 사과 이런거 하지 마요. 플리즈. 

억겁의 인연을 끊는 대가로 빚과 가난이 따라왔다. 그의 손에 한 번 버려진 적이 있었던 반려견도 내가 품었다. 그리하여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할 세 가지가 생겼다. 빚과 가난과 개. 나는 그것들을 내 소설로 책임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소설은 밥벌이가 되지 못했고, 빚은 늘어갔고, 그러므로 가난했고,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반려견의 약값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살았다.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인간의 명줄이 얼마나 질긴 것인지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신은 고약하게 굴었다. 지금까지도. - P37

도시에 살 적에 나는 누군가 먼저 날 사랑해주길 원했고, 타인긔 관심과 인정에 목말라했다. 항상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고 입에 발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도 죄책감이 없었다. 불행이란 게 달리 싹을 틔우랴. 남의 눈을 의식하고 살았던 나 자신이 불행의 씨앗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내 삶은 돌보지 않고 비굴하게 살았지만, 결국 성공보다 상처가 먼저 왔다. 세상에서 가장 까다롭고 냉정한 판단이 자신을 평하는 것이지 싶다. 그게 바로 되어야 비로소 남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자존감의 결여는 훗날 자아의 파국을 초래한다는 깨달음을 안고 산동네로 들어왔다. 나는 인제야 내게 관심을 주려고 애쓰는 중이다. 뒷마당에 음식을 내어놓는 일은 결국 나를 위한 푸닥거리인 셈이다. 말하자면, 나에게 던지는 고수레인 것이다 - P168

지독한 고독이 가끔 옆구리를 찌르지만 덕분에 나는 꿈을 꾼다. 한정 없는 적막과 고요가 때론 남아 있는 상처들을 눈물로 이끌지라도 꿈이 있는 사람에게 고독과 적막은 달콤할 뿐이다. 떠나면 분명 그리워질, 나는 그런 곳에 산다. - P192

"그럼 넌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지금보다 더 불행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지금이 바닥이니 아마 더 나빠질 일은 없을 거라고. 굳이 행복과 불행으로 말하자면, 나는 행복해질 일만 남은 것 같다고.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조그맣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맞아!"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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