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쏜살 문고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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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문고의 책은 네 권째이다. 책표지의 문장이 활을 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카프카가 독서는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기 위한 도끼와 같아야 한다고 했고, 쏜살문고는 화살처럼 독자의 마음에 꽂히려고 하나보다.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불법 임신 중절 경험을 회고한 책이다. 저자는 그것을 'event' , 사건이라고 말한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시대를 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이 이야기는 어쩌면, 나의 사건이었을 수 있겠다. 


아니 에르노가 임신을 진단 받고 필요했던 것은 '주소'와 '돈'이었다. 


"P.-R. 부인은 400프랑을 받았다. L.B.는 알아서 그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주소와 돈, 이것이 그 당시 내가 필요로 했던 유일한 것이었다." 


임신 중절로 책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여기는 좀 다를까, 검색해보니, 백인 남자 작가의 <임신 중절, 어떤 역사 로맨스> 가 검색되어 좀 웃었다. 비웃음. 코웃음, 헛웃음. 


하지만, 나는 봄알람의 <유럽 낙태 여행>, 시몬 베유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 후마니타스에서 낸 <배틀 그라운드>, 주디스 자비스 톰슨의 <낙태에 대한 옹호>, 민우회의 <있잖아, 나, 낙태했어> 같은 책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 


배우지 못했고, 터부시 했고, 설마 내 일이 될까 생각했던 '일어날 수 있는 일', 그 사건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다. 노래방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살해당할 수 도 있었는데, 살아 있다니 나는 운이 좋았다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나는 운이 좋았다' 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것이 일어났건, 일어나지 않았건, 나와 함께 사건의 당사자인 상대방에게는 그것이 '운'과 상관 없는 일일 것이다.  


새라 워터스의 <나이트 워치>는 픽션이지만, 나는 전쟁중에 불륜으로 임신한 여자와 남자를 진심으로, 심하게 욕했었다. 

사회적, 신체적 목숨을 걸고 감당하는 쪽은 언제나 여자다. 여자를 좀 더 욕해도 되는 걸까? 이 사건에 인간 남자는 없고, 정자만 있다.    


유부남 지인에게 상담했을 때, 집으로 초대하여 부인이 장 보러 간 사이, 섹스할 시간은 될 것 같은데, 라고 말하는 남자, 무엇을? 무엇을 자세히 알고 싶은지 눈을 빛내며 물어보는 남자, 하지만 윤리적인 이유로 돈은 못 줘줘. 나는 아기 생각이 없어, 니가 알아 해라.는 남자. 


"나 같은 여자들은 의사의 하루를 망쳤다. 돈도 연줄도 없는 - 그렇다고 무턱대고 의사들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여자들은 자기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고, 영영 의사 면허증을 앗아 갈 수도 있는 법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고 의사들은 감히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여자들을 죽게 방치하는 법을 위반하느니 차라리 당신들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솔직하게 나서지 않는 한, 임신할 정도로 멍청한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눈 때문에 자기가 이룬 모든 걸 잃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같이 여자들의 임신 중절을 막더라도 그녀들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낼 거라 생각했으리라. 부서질지도 모르는 자기들 이력에 비하면, 여자들이 질 속에 뜨개질바늘을 넣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 신고하는 케이스들 생각난다. 전 남편, 전 남친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 요즘, 아니 에르노의 책을 열렬히 읽은 적 없었던 나는 이 책을 읽고, 아니 에르노를 좀 더 읽고 싶고, 더 읽고 싶지 않았다. 두 마음이 동시에 드니, 아마 읽겠지. 


쏜살문고의 이 책은 굉장히 얇고 작아서 (샘플북인줄 알고 버릴뻔 했다) 여느때와 좀 다른 독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고 얇지만 꽉꽉 채워 놓아서 이 책을 늘리면, 양장의 좀 두꺼운 책이 나올 것임을 안다. 얇고, 작고, 꽉꽉 찬 책을 만들어주는 쏜살문고 응원해. 처음에는 좀 당황했지만, 생각할수록 좋은 컨셉트와 좋은 컨텐츠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은 이번에 나온 쏜살문고 여성문학 컬렉션에 속해 있다. 이 외에 토베 얀손, 강신재, 박완서가 있음. 


다음 날 아침, 침대 위에 누워서 뜨개질바늘을 조심스럽게 성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자궁 경부를 찾지 못한 채 더듬었고, 고통을 느끼자마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무력감에 절망했다.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안되었다. ‘아무것도 못 함.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울음. 정말 너무 지겹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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