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다가

역에서 쓴 이 시들이 이 시집을 이루고 있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다음 역을 향하여

 

2016년 가을

허수경

 

 

+++

 

힘든거 지나면 정신 차려야지. 한 것이 벌써 올해 내내인 것 같다. 정신 차려야지.라는 말은 좀 이상하지. 시간에 끌려다니지 말아야지. 정도가 맞겠다. 최근에는 관광지의 관광철에 알바 하며 미치게 힘들어서 뒤집었고 (다행히 좋은 결과), 여름이 더워서 수국정원에서 죽어나가는 수국 살리려고 물고생 했고, 추석에 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올데이 알바했다가 앓았고, 전산 바꿨고.. 알바 하는 곳에서는 가장 이상하던 둘 짤리고, 그 다음으로 이상하던 사람은 입원해서 수술 앞두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직원들은 가장 좋은 두 사람이라 정말 참고 견디니 이런날도 오는군. 의 마음이다.

 

어제는.. 이렇게 계속 힘든거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쉴 거 다 쉬다가 아무것도 못하겠군. 생각하고, 집에 오자마자 청소와 빨래를 하고, 백만년만에 수국 업데이트를 했다. 올해 안에 하기로 마음 먹은 여성학책 열 권 읽기도 지지부진한데, 열흘에 한 권 정도로 계획 잡았지만, 이 페이스면, 두 달에 다섯권씩! (무리무리) 읽어야할 판이라 거다 러너의 가부장제의 창조 마지막 두 챕터를 남겨두고 (뒤로 갈 수록 진도 안 나감) 잘 읽힌다는 래디컬 페미니즘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는 전애인에게 처음으로 이별을 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주를 찾은 오랜 친구와 한라산을 마시며 마음을 정리했다.

한 번에 되지는 않았고, 엊그제야 참았던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하고, 이별을 고했다. 너의 힘으로 정신 차리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나타나. 당신이 처음부터 말했듯이 나는 나의 인생을 살테다. 우리는 서로만을 바라 보지 말고, 자신을 더 사랑하면서 함께 '같은 곳을 보는 것'으로 좋았을텐데.

 

얼마전 알라딘에서 메일을 받았다. 블로그를 이용하는 사람이 급감해서 TTB2 광고를 종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아.. 그래도 서재 블로그에 책장 있는건 없애지 말지. 광고는 아니라도. 십년 전에도 알라딘 블로그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한줌이었는데. 아쉽다.

 

내가 요즘 하루를 의탁하는? 140자 미만의 단문들로 이루어진 트위터는 과정보의 공간이라 정신을 혹사시키지만, 내가 어떤 탐라를 만드냐에 따라 알려줘서 고마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얼마 전 허수경 시인님이 돌아가신 것도, 그 전에 암투병을 하며 편지를 띄운 것도 트위터에서 제일 먼저 봤다. 시인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담고 있던 시인의 글들을 올려줬고, 나도 마음에 담았다. 시인이 새로 빛을 보여주고 싶었다던 산문집이 알라딘 서재에서 1위겠군. 하고 들어왔는데, 음.. 

 

허수경의 책들을 읽어봐야지.

 

그 전에 사람들이 꺼내 보여 준 시인의 글들을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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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에 핀 붉은 꽃을 기어이

보지 못했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꽃이 질 때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헌 여행을 잊어버렸지. 지겨운 연인을 지상의 거리, 어딘가에 세워두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슬프면서도 즐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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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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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병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

어둑 대책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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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 라고 했는데 꼭 잘 자, 라고 한 것 같다

 

- 포도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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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있는 듯 없다.

 

- 불취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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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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